스페인 셰프 페란 아드리아, 그의 본질적 미식에 대하여
현대 미식의 뉴 노멀을 제기한 스페인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식의 세계화를 논하기보다 미식의 본질과 구조를 탐구하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세상에 없던 패러다임을 제시한 사람을 우리는 혁명가라고 부른다.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는 미식계 정의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다. 스페인 카탈루냐의 작은 해변 마을에서 탄생한 그의 레스토랑 ‘엘 불리(El Bulli)’는 접시 위에서 온갖 요리 실험을 펼치며 20세기 후반 미식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특히 ‘분자 요리’를 통해 전 세계 미식 트렌드를 뒤흔들었는데, 이는 미식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됐다. 2011년 엘 불리를 정리한 후 그는 엘 불리 재단(El Bulli Foundation)을 열고 미식 교육과 연구, 시스템 구축에 공들여왔다.
페란 아드리아가 지난 10월 말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세계 미식계를 이끌어온 인물이 한식의 식문화를 직접 탐구하기 위해 내한한 것이다. 그는 워크숍과 컨퍼런스로 가득한 나흘을 보냈다.
워크숍 내내 페란 아드리아는 “김치 같은 한국의 발효 채소는 차가운 상태로만 제공되나?” “김치와 피클의 차이는 무엇인가?” 같은 기본에 충실한 질문을 던졌다. 서울 성북동의 어느 한옥에서 열린 컨퍼런스 역시 단순한 초청 강연이 아니라 ‘한식이 세계 미식의 담론에서 어떤 위치를 점할 수 있나?’에 대해 아드리아와 국내외 셰프들이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다. 간담회가 끝난 후 나눈 대화는 한식에 대한 인상이나 K-푸드의 가능성 같은 주제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한 정의와 이해에 입각한 선구적 비전이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미식의 본질, 그것을 지탱하는 사유의 구조를 향해 뻗어갔기 때문이다. 그와의 대화에서는 특히 두 가지 키워드가 눈에 띄었다.
미식, 구조적으로 사고하기

페란 아드리아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정의’였다. “아직 미식 산업에는 전 세계적으로 합의된 언어가 없습니다. 같은 단어를 써도 각자 다르게 이해하죠. 그래서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는 미식을 논하기 위해선 먼저 같은 언어로 사유할 수 있도록 개념의 토대를 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예를 들어 ‘오뜨 퀴진(Haute Cuisine)’과 ‘파인다이닝(Fine-dining)’은 엇비슷한 개념처럼 쓰이지만, 문화적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미식은 단일 산업이 아니라 많은 영역이 교차하는 복합적 구조에 가깝기에 언어의 정립은 무척 중요하다. 그는 음식과 미식의 경계를 먼저 짚었다. “음식은 생물학적 필요지만, 미식은 그 너머의 개념입니다.” 그는 미식을 단순히 맛을 내는 기술이 아니라 문화·경제·교육이 맞물려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보았다.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만드는 행위만으로는 미식을 얘기할 수 없어요. 농업, 식품 산업, 교육, 소비자의 인식이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하나의 미식 생태계가 완성되죠.” 페란 아드리아는 미식 전반을 아우르는 매트릭스를 살피는 ‘구조적 사고(Structural Thinking)’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맛을 논하기 전에 접시에 담긴 음식이 어떤 구조에서 나왔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시선은 언제나 시스템을 향한다. “스페인 GDP의 28%가 음식과 관련되고, 그중 4.5%가 미식 산업입니다. 하지만 비즈니스 개념조차 없는 식당이 많죠. 교육의 부재 때문이에요.” 그는 교육의 부재를 스페인 미식 산업의 가장 큰 한계로 꼽았다. 산업이 지속되려면 비즈니스와 교육의 논리에 동시에 접근해야 한다며 “교육 없이는 미식 문화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는 그가 실제로 세계 곳곳을 살피며 내린 결론이다. 그런 점에서 한식 역시 세계 무대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대학 수준의 체계적인 미식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단순히 요리 기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경영, 과학, 역사, 예술을 아우르는 다학제적 교육이 필요합니다.”
창의성, 인간 이해하기

그렇다면 개인의 차원에서 미식 산업을 육성할 방법은 무엇일까? 페란 아드리아는 그 해답을 ‘창의성’에서 찾았다. “창의성이란 결국 인간이 감각하고 성찰하는 인지적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그는 감각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사고가 그것을 정리하며, 감정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이 복합적인 인식 순환을 창의성의 터전으로 바라봤다. 쉼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물 한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물은 투명하고 향이 없다고 하죠. 하지만 화학물질이 있기에 여기에도 미세한 향이 있습니다. 또 혀에 닿는 순간의 촉감, 온도, 텍스처도 물맛을 바꾸죠.” 결국 맛이란 감각·인식·기억의 총합이다. 그리고 이는 미식의 본질과 연결된다. “결국 요리는 음식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왜 쓴맛에 얼굴을 찡그리는지, 어떤 음식 냄새가 어린 시절 특정 기억을 떠올리는지 같은 질문을 끝없이 하면서요. 그게 창의성의 시작입니다.”
아드리아는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맞는 답을 찾아가는 일을 조리보다 훨씬 어려운 과제로 짚었다. “한식에 대해 잘 모르는 셰프라도 3~4일이면 비슷하게 따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왜, 어떻게 그것을 만드는지 아는 일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훌륭한 미감과 다양성을 인정받으며 경쟁력을 갖춘 한식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질문과 답변’, 즉 연구다. 단순히 외국인이 먹기 쉬운 김치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김치의 색과 향, 맛, 그 저변에 자리한 생물학·역사·기술의 맥락까지 이해할 때 비로소 세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되, 끝없이 묻고 가늠하면서 임하길 바랍니다.” 그의 당부는 한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자, 미식을 지식의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에도 그는 답변이 아니라 질문을 건넸다. “지금 뭘 알고 있나요?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VL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글
- 유승현(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 박나희, GettyImagesKorea
- Courtesy of
- El Bulli Found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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