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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트러스트 아라비아 2025, 도하에서 만난 모든 패션

2025.12.19

패션 트러스트 아라비아 2025, 도하에서 만난 모든 패션

패션의 시선이 도하로 향했다. 이곳에서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FTA 프라이즈 2025의 수상자 7팀.

11월의 카타르 도하는 완연한 패션 도시다. 사막에서 낙타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다가 같은 테이블에 앉은 한 이탤리언 에디터가 말했다. “어제 크리스찬 루부탱을 봤어.” 그리고 곧 프랑스 패션 어워드 안담(ANDAM)의 설립자로 지난 36년간 마르탱 마르지엘라, 크리스토프 르메르, 안토니 바카렐로 등의 디자이너를 지원해온 나탈리 뒤푸르(Nathalie Dufour, 우리는 사막까지 한 차를 타고 오면서 친해졌다)가 누군가를 소개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야구 모자를 쓴 캐주얼한 차림의 그 남자는 빅터앤롤프의 롤프였다. 도하의 대표적인 전통 시장 수크 와키프(Souq Waqif)에서는 길을 잃은 것 같은 지암바티스타 발리도 목격했다. (길을 잃은 것 같다는 건 나의 추측이다. 미로 같은 수크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어쨌거나 모두가 도하에 있다. 안나 델로 루소, 지젤 번천, 나탈리아 보디아노바, 스테파노 필라티, 프란체스코 리소, 듀란 랜팅크, 시몬 로샤, 조나단 앤더슨··· 이 모든 패션계 인물들이 도하에 모인 건 단 하나의 이유다. ‘패션 트러스트 아라비아 2025(Fashion Trust Arabia 2025, FTA 2025)’에 참석하기 위해. 실제 조나단 앤더슨은 패션 트러스트 아라비아의 시상식이자 하이라이트 ‘FTA 프라이즈(FTA Prize)’의 전야제로, 두바이에서 운영하는 온라인 패션 플랫폼 우나스(Ounass)와 함께 파티를 열었고, 전 세계 패션 프레스들과 디자이너들은 늦은 시간까지 도하의 밤을 즐겼다. 참석한 사람들부터 도시 풍경, 행사 성격까지 모든 것이 글리터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생소한 이름이지만, FTA는 중동과 북아프리카(MENA) 지역 신인 디자이너를 지원하는 패션 어워드이자 멘토링 프로그램이다. 카타르 왕실이 직접 후원하는 유일한 패션 프로젝트라는 상징성 덕분에 MENA 지역 패션계의 권위를 대변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2018년 설립된 FTA는 2019년 도하에서 첫 번째 시상식을 열며 든든한 지원과 초호화 심사위원단으로 전 세계 패션계의 시선을 끌었다. 현재까지 패션 산업 인프라가 부족한 이곳에서 가장 실질적인 프로그램으로, ‘중동의 LVMH 프라이즈’라고 불릴 정도다. 수상자는 <보그>와 <BoF(Business of Fashion)>를 비롯한 전문가들의 멘토링, 우나스와 네타포르테 등의 입점, 국제적인 홍보 같은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매해 이어지는 재정적 지원, 글로벌 심사위원단과의 네트워크는 단순한 어워드를 넘어 MENA 지역의 새로운 재능을 세계 무대에 올리는 성장 엔진으로 기능한다. 결국 FTA는 중동의 뜨거운 에너지와 젊은 창작자의 서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는 플랫폼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패션 풍경인 셈이다.

실제 FTA에서 보낸 시간은 아트 페어나 패션 위크를 떠올렸다. 그저 파티나 사막, 호텔 로비에서 런웨이에서 볼 법한 인물들을 마주쳤기 때문이 아니라 FTA 프라이즈를 중심으로 ‘위성 이벤트’라고 해도 좋을 만한 프로그램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앤더슨과 우나스의 파티를 시작으로 도하 필름 페스티벌, 인도와 아랍 지역의 꾸뛰르 디자이너와 신인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토크 세션이 이어졌다. 특히 전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Franca Sozzani)가 개척한 길을 살펴보는 다큐멘터리 영화 <Paving the Way-Franca’s Legacy> 상영회와 함께 열린 첫 번째 공식 갈라에서는 400만 달러 이상이 모금됐다. 이 모든 수익은 ‘프랑카 펀드(Franca Fund)’에 기부되며, 추후 신생아의 DNA를 통해 향후 질병을 예측하는 선도적 예방 유전체학 연구에 사용된다. 레드 카펫에서 카를라 소짜니(Carla Sozzani)는 미국 <보그>에 이렇게 소감을 밝혔다. “프랑카가 젊은 디자이너를 위해 했던 일들을 기리기 위해 이토록 멋진 행사가 기획됐다는 사실이 정말 기쁩니다.”

이 말은 FTA에도 적용된다. 올해 FTA 프라이즈의 장소는 도하의 카타르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Qatar). 프랑스의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사막의 장미(Desert Rose)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이 건축물은 호화로운 도하의 도심에서도 단연 고고한 자태를 뽐낸다. 붉은 조명으로 더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는 카타르 국립박물관에서 카타르 미술관 의장과 FTA 공동 의장인 ‘셰이카 알 마야사 빈트 하마드 빈 할리파 알 사니(Sheikha Al Mayassa bint Hamad bin Khalifa Al Thani)’의 환영사로 본격적인 FTA 프라이즈가 시작됐다. “MENA 지역은 최근 가장 도전적인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창의적인 직업을 가진 많은 사람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저를 가장 감동시키는 건 우리 공동체가 가진 힘입니다. 이 지역의 디자이너들은 계속 작업을 이어가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가 누구인지 세계에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올해 FTA 프라이즈에서는 레디 투 웨어, 이브닝 웨어, 액세서리, 주얼리, 신인상(Franca Sozzani Debut Talent Award), 패션 테크, 게스트 국가(2025년에는 인도다) 등 7개 공식 부문과 평생 공로상(Lifetime Achievement Award), 혁신적 시도를 한 디자이너를 기리는 트레일블레이저 어워드(Trailblazer Award)까지 총 9개 부문에서 시상이 이루어졌다. 시상식 전, 후보 21명의 작업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쇼케이스에서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하늘하늘하고 투명한 컬렉션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이건 내 졸업 컬렉션이에요. ‘Further Deeper Softer Closer’라는 이름이죠.” 바레인 출신 디자이너 알라 알라라디(Alaa Alaradi)의 설명에 컬렉션을 직관적으로 관통하는 이름이라고 여겼는데, 누군가 불쑥 디자이너에게 말을 건넸다. “난 딜라라라고 해요. 사실 몇 달 전 당신 작품에 투표했어요. 컬렉션에서 정성과 배려가 느껴졌어요. 옷에 달린 주얼리, 뒷모습까지 정말 아름다운 작업이었으니까요. 디테일도 구조적이었고요. 언젠가 당신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디자이너 딜라라 핀디코글루(Dilara Findikoglu)의 극찬을 받은 알라 알라라디는 결국 신인상을 수상했다. 울먹이며 트로피를 받아 든 모습을 보면서 쇼케이스에서 그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옷을 만들 때 조각적으로 접근해요. 실루엣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죠. 그리고 모델을 만나면 꼭 ‘입었을 때의 느낌’을 물어봐요. 여러 스타일링을 해본 뒤 필요 없는 걸 덜어내요. 이 컬렉션을 입게 될 사람이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실크와 가죽 등 다양한 소재, 유연함과 견고함의 긴장을 정교하게 해소한 옷이었고, 수상자로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FTA 프라이즈 2025에서 신인상을 수상한 알라 알라라디의 컬렉션. 흐르는 듯 유연한 실루엣과 섬세한 소재, 조각적인 접근이 특징이다.

FTA 프라이즈가 진행되는 내내 우리 테이블에서는 누가 수상할 것인가를 두고 토론이 이어졌는데, 가장 논쟁적인 부문은 ‘게스트 국가’였다. 모두가 카르틱 쿰라(Kartik Kumra)의 컬렉션을 최고로 꼽았지만, 누군가는 그가 아주 유명하기 때문에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보탰다. 사실이었다. 그의 브랜드 ‘카르틱 리서치(Kartik Research)’는 이미 섬세한 공예와 디자인으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았던 디자이너이자 니트웨어 전문가, <퍼펙트 매거진> 패션 디렉터인 에드워드 L. 뷰캐넌(Edward L. Buchanan)은 “모든 후보자의 옷이 훌륭했지만, 카르틱 쿰라의 컬렉션은 ‘입고 싶은’ 옷이었다”고 평했다. 그 말이 꼭 맞았다. 쇼케이스 밖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그 컬렉션이 더욱 궁금해 내가 다시 돌아갈 정도였으니까. “인도 곳곳의 훌륭한 장인들과 함께 일합니다. 제대로 하려면 그들을 직접 찾아가야 해요. 문자나 이메일로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죠. 현장에 가서 관계를 쌓아요. 그렇게 움직이다 보면 정말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보게 돼요. 패션계에서 아직 잘 다루지 않은, 새롭고 개척되지 않은 느낌의 장소를 계속 방문하게 되니까요. 그런 여정에서 영감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카르틱 쿰라에게 영감과 작업이란 결국 장인 그 자체였다. 그리고 가장 인간적인 그의 옷은 FTA 프라이즈 2025 게스트 국가 부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FTA 프라이즈 2025 게스트 국가인 인도의 브랜드 ‘카르틱 리서치’. 디자이너 카르틱 쿰라는 인도 곳곳의 장인들과 함께 작업하며 현장에서 얻은 영감을 기반으로 컬렉션을 구성한다.

레디 투 웨어 어워드는 지난 10월 파리 패션 위크에서 재치 있는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인 모로코 출신 디자이너 유세프 드리시(Youssef Drissi)에게 돌아갔다. 그의 브랜드 ‘Late for Work’는 일상적인 아이템을 해체적으로 재구성해 반항적이고 빈티지한 분위기가 특징이다. 이브닝 웨어에서는 지퍼를 열거나 리본을 푸는 것만으로 형태가 달라지는 드레스를 선보인 지야드 알부아이나인(Ziyad Albuainain)이, 액세서리 부문에서는 기하학적이면서도 전통적인 가방을 디자인한 브랜드 ‘탈렐(Talel)’의 레일라 루크니(Leila Roukni)가 수상자로 지목되었다. 미래적이면서도 컬러풀한 3D 프린티드 백으로 새 시대의 디자인을 제안한 파테마와 달랄 알카자(Fatema & Dalal Alkhaja)의 브랜드 ‘터치리스(Touchless)’가 패션 테크 어워드를 수상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유산을 현대적인 형태로 정제한 ‘FYR 주얼리(FYR Jewelry)’의 파라 라드완(Farah Radwan)은 주얼리 어워드를 수상한 뒤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이렇게 외쳤다. “이집트를 위하여!”

FTA 프라이즈의 피날레를 장식한 건 두 개의 특별상이었다. 레바논 출신 디자이너 주하이르 무라드(Zuhair Murad)가 지역적인 문화 정체성을 세계 무대로 확장시킨 인물로 트레일블레이저 어워드의 수상자가 되었고, 평생 공로상의 주인공은 당연하게도 미우치아 프라다가 수상해 감동을 전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2026 봄/여름 시즌 미우미우 커스텀 드레스를 입고 차분히 소감을 전했다. “이 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무엇보다 이 상이 문화의 교류와 협업을 의미한다는 것이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는 어느 때보다 이런 가치가 중요하다고 느끼니까요.” 모두가 기립박수로 미우치아 프라다에게 존경을 표했다. 사실 그녀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순간부터 테이블마다 “그녀는 정말 전설이야” 같은 찬사가 터져나왔다.

FTA 프라이즈 2025는 미우치아 프라다의 소감 그대로였다. 교류와 협업, 모든 연결 고리가 이곳에 있었다. 각자의 문화와 기술, 기억과 전통이 도하에서 만나고, 그 사이에서 탄생한 새로운 미래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시간이었다. FTA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뿌리와 과거를 다루고 있었다. 단순히 오래된 시간을 탐구하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쪽에 가까웠다. 어쩌면 FTA의 하이라이트는 트로피가 아니라 MENA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스스로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동력을 얻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걸 목격한 우리 역시 패션이 열어주는 가능성의 미래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느꼈다. 카타르는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날 밤 도하는 분명 패션 수도였다. VK

    디지털 디렉터
    권민지
    포토그래퍼
    PROD ANTZOULIS
    COURTESY OF
    ALAA ALARADI, KARTIK 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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