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겹 역설의 레이어, 얽히고설키며
새로운 해가 밝았습니다. 하지만 해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게 있죠. 저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최재은: 약속>을 둘러보면서, 격변의 시간에도 변함없는 것들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영문 전시 제목 ‘Where Beings Be’는 ‘존재하는 곳’이라는 의미일 겁니다. 작가는 ‘공생지약(共生之約)’이라 표현했는데요. 이는 문명 훨씬 이전부터 시공을 관통해온 자연의 상호 연대성을 되새기게 합니다. 약속이 ‘맺을 약(約)’과 묶을 ‘속(束)’으로 구성되었듯, 유구한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히고설키며 무언의 약속처럼 공생해왔기에 지금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죠. 최재은의 작품은 당연하지만, 종종 잊어버리는 이 진리들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그래서일까요. 설사 관람객들로 꽉 찼다고 해도 전시장 안은 오히려 고요합니다.


최재은 작가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인간 목소리 이면의 소리 없는 풍경을 사유해온 현대미술가입니다. 조각, 설치, 건축, 사진,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생명의 근원, 존재의 탄생과 소멸, 자연과 인간의 복합적인 관계를 그려왔지요.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작가의 주요 대표작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요. 특히 전시장 초입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거대한 조각 ‘루시(Lucy)’는 매우 반가운 작품입니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약 320만 년 전의 화석으로, 당시 ‘최초의 인류’로 추정되었죠. 화석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골반 형태에 주목, 역삼각형 구조를 쌓아 올린 조각은 보는 이를 단숨에 인류의 시원으로 안내합니다.


전시의 키워드, ‘루시’를 비롯해 ‘경종’, ‘소우주’, ‘미명’, ‘자연국가’라는 소주제는 물 흐르듯 연결되어 있습니다. ‘경종’의 공간에서는 검은 바다의 수면과 온도를 찍은 영상과 오키나와 해수의 이상고온으로 백화된 산호가 생태계 파괴의 순간을 우리 앞에 가시화합니다. 바로 옆방, 대지의 안팎에 존재하는 ‘소우주’를 담은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World Underground Project)’도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 세계 여러 지역의 토양에 묻어두었다가 일정 시간이 흘러 형성된 문양 및 색감을 고착화하는 방식으로 완성한 평면 작업인데요. 땅속의 필연적인 변화, 즉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증거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작품이, 저는 어떤 위대한 그림보다도 장엄하고 신비로웠습니다. 절대 인간이 그릴 수 없는 그림을, 자연과 시간이 그려냈기 때문일 겁니다.
‘미명’이라는 소주제는 작고 미미한 존재까지 세상을 이루는 고유한 생명으로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가장 부드럽게 보여줍니다. 최재은은 일상에서 마주한 들풀과 들꽃을 수집했고, 그 이름을 찾아 기록하는 작업을 지속해왔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When We First Met)’는 들풀과 꽃 560여 점의 기원과 의미, 문화를 함께 보여주는 작업인데요. 작가는 관찰자로서 이들을 해설하거나 설명하는 대신 이들이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식물들이 읊조리는 이야기는 장영규 음악감독과 협업한 음향 설치 작업 ‘이름 부르기(To Call by Name)’와 어우러져 바로 ‘우리의 세계’가 됩니다.

미술가로서 최재은의 실천력은 그다음 ‘자연국가’에서 더욱 단단해집니다. 이들 모두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희망이 펼쳐지기 때문인데요. 2014년에 시작된 ‘대지의 꿈(Dreaming of Earth)’은 DMZ 지역을 ‘자연이 지배하는 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꿈이기도 합니다. 한편 ‘자연국가(Nature Rules)’는 그 연장선에서 DMZ의 생태를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생태 숲을 복원하고자 하는 작가의 청사진입니다. 전시를 둘러보다 보면 어쩌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지 모를 이 ‘인생 작업’을 통해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가는 작가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전시 마지막에 배치된 다양한 아카이브가 단순히 과거 대표작들의 흔적이 아니라 순환, 흐름, 대지의 개념을 평생 탐구해온 작가 최재은의 현재적 시선과 걸음으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전시는 2026년 4월 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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