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그 자리에, 배우 안성기에 대한 기억 7가지

겨울에 태어난 안성기는 겨울을 싫어했다. “난 한여름에도 목욕탕 가서 찬물에 안 들어가.” 1997년 12월, <보그> 독자를 위해 카메라 앞에 섰던 배우 안성기가 박중훈에게 말했다. 그는 이날의 야외 촬영도 탐탁지 않아 했다. 화보가 아닌 영화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영화 <남부군> 촬영 때는 한겨울에 비를 맞는 장면을 두고서도 앞장섰던 그다. “어떤 일에서든 제일 중요한 건 영화야. 다른 건 부수적이거든…” 안성기가 있는 현장에서는 언제나 영화가 먼저였다. 촬영 현장이 아니어도 안성기는 영화를 위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국내 영화제의 수많은 개막식, 또 수많은 시사회, 그 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듣는 행사들까지. 돌이켜보면 안성기는 영화 속에서도 그 자리를 지키는 남자를 자주 연기했다. 무너지지 않으려고 버티거나,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자리를 사수하거나, 누군가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하지만 이제 한국 영화에는 배우 안성기가 없다. 그는 하필 자신이 가장 힘들어한 계절에 세상을 떠났다. 안성기가 앞으로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의 대표작을 찾아봤다. 겨울에 촬영한 영화가 많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1980)
감독 : 이장호
출연 : 안성기, 김성찬, 이영호, 유지인, 김보연, 임예진
볼 수 있는 곳 : 티빙, 웨이브, 왓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70년대 강남 개발과 함께 서울로 유입된 시골 청년들의 이야기다. 차가운 도시가 그들에게만 친절할 리 없다. 덕배(안성기)는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쓴다. “참고 살아야 해.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벙어리인 척.” 하지만 그들은 가난해서 무시당하고 어리숙해서 조롱당한다. 덕배가 아픔을 딛고 찾은 건 ‘복싱’이다. 첫 스파링에서 처절하게 얻어맞은 덕배는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곧 맞은 것 같은데, 이제는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구만요.” 다른 사람을 때릴 만큼 강해지는 것보다 그냥 맞고 버티기를 선택한 것도 애잔했다.
안성기가 연기한 덕배는 이전의 한국 영화가 보여준 남자들과 달랐다. 덕배는 첫 장면부터 사나운 개 앞에서 기가 죽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꾸부정한 자세와 더듬는 말투, 소심한 심성 탓에 자기가 입은 피해를 제대로 주장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가서지도 못한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이전의 한국 영화 속 남성이 ‘박력’을 내세웠다면, 덕배는 그처럼 누가 봐도 애처로운 남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후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의 영민,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의 병태, 그리고 <남자는 괴로워>(1995)의 안 과장처럼, 안성기가 보여준 연약한 남성의 기준점이 ‘덕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안성기가 연기한 남자들 중에 나쁜 사람은 있어도 적수가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은 없었다.
만다라(1981)
감독 : 임권택
출연 : 안성기, 전무송, 방희
볼 수 있는 곳: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안성기의 대표작 중에는 그를 길 위에 올려놓은 작품이 많다. <고래사냥>(1984), <안녕하세요 하나님>,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무사>(2001) 등등. 영화 속 안성기는 정처 없이 떠돌거나 뜻밖의 여행 중이거나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만다라>는 순서상 그의 첫 번째 여정이다. 6년간의 수행에도 무엇 하나 얻지 못한 승려 법운은 만행 중이다. 그는 우연히 승적을 박탈당한 파계승인 지산(전무송)을 만난다. 법운은 지산과 떠돌기로 하지만, 그의 말들은 법운의 생각과 부딪힌다. “경계에 부딪혔을 때, 법운은 겁이 나서 피하지만 나는 뛰어넘고자 몸부림치지. 번뇌에서 벗어나려면 번뇌를 삼켜버려야 해.” 법운은 다시 혼자만의 수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어디서도 답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지산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두 승려는 겨울을 같이 보낸다.
영화 속 법운은 종교적인 깨달음을 위해 떠돌지만, 그에게는 인생의 지향점을 찾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 함께 보인다. 스스로 세워놓은 경계에 갇혀 사는 것도 종교인만의 딜레마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만다라>가 보여주는 법운의 방황은 종교를 넘어선 운명처럼 보인다. 법운을 연기하는 배우가 안성기라서 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의 이름을 지우고 ‘안성기’만 놓고 볼 때, <만다라>는 3년 후 세상에 나온 <고래사냥>의 프리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래사냥>의 무기력한 대학생 병태와 인간사의 허망함에 빠져 출가를 선택한 법운의 방황이 비슷해 보인다고 할까. 또 법운이 <고래사냥>의 왕초가 되는 상상도 가능하다. <만다라>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만행을 시작한 법운의 모습을 보면, 그처럼 그는 언제나 그 길에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래사냥(1984)
감독 : 배창호
출연 : 안성기, 이미숙, 김수철
볼 수 있는 곳: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방황하는 청춘에게는 ‘형’이 필요하다. <고래사냥>의 왕초가 바로 그런 형이다. 짝사랑에 실패하고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대학생 병태(김수철)는 고래를 잡겠다며 집을 나선다. 위기에 처한 병태를 왕초가 구해주고, 그때부터 병태는 형을 따라 나선다. 이때 이들의 여정에 춘자(이미숙)가 합류한다.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춘자를 사랑하게 된 병태는 그녀를 고향에 데려다주기로 한다. 왕초는 하는 수 없이 두 사람과 함께 고생길에 나선다.
<고래사냥>에서 안성기가 연기한 왕초는 숙련된 ‘거지’다. 그는 어디에서나 잘 수 있고, 어떻게든 먹을 수 있다. 그가 입고 있는 코트 속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잔뜩 숨겨져 있어서 언제든 면도를 할 수도 있고, 식사 후에 이를 쑤실 수도 있다. 그런 남자가 춘자와 병태에게 유일한 ‘믿을 구석’이 되어준다. 각설이 타령을 해서라도 먹을 것을 구해주고, 위기에 처하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들을 먼저 피신시킨다. 의도치 않은 갈등으로 먼저 떠나버린 왕초가 다시 나타나 춘자와 병태를 구해주었을 때, 이 캐릭터의 낭만이 극대화된다. “인마, 네가 예뻐서 온 게 아니야. 안심이 안 돼서 왔어.” 이때 배우 안성기의 미소는 춘자와 병태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무장해제시킨다. <고래사냥>이 보여준 청춘의 방황은 바로 안성기 덕분에 아름다운 여행이 되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감독 : 배창호
출연 : 안성기, 황신혜, 최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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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12시에 덕수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남자는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1987년에 개봉한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이 대사는 애달픈 사랑을 담고 있었다. 시대 보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도, 영화 속 영민만큼은 받아들일 것이다. 연극배우인 그녀에게 직접 쓴 ‘희곡’으로 고백하는 남자,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이후에도 그녀와 잠시 함께 있었던 카페를 찾는 남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는 여자의 냉정한 한마디에 “생일 축하드립니다”라고 답하는 남자라면? 그럼에도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런 남자를 연기하는 배우가 안성기이기 때문에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영민은 지금까지도 절절한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안성기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어떻게 상대를 기다리는지 모조리 보여준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 영민은 당연히 일찍 약속 장소에 나가 의자도 바꿔 앉아보고, 넥타이도 만져보기를 반복한다. 영화는 그런 상황을 약 1분 4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담는다. 이후에도 영민의 역할은 기다리거나 맴도는 것이다. 창문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뻔해 보일 수밖에 없지만, 안성기는 그의 기다림에 진심을 담아낸다. 이 영화를 연출한 배창호 감독은 14년 후 영화 <흑수선>(2001)에서 안성기를 다시 기다리는 남자 역할로 데려다 놓았다. 비를 맞으며 사랑하는 여자를 기다리는 안성기의 모습은 그렇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남부군(1990)
감독 : 정지영
출연 :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이혜영
볼 수 있는 곳: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남부군>의 주인공 이태는 ‘조선중앙통신사’의 종군기자다. 그는 전세를 기록해야 하는 임무와 ‘두려움과 호기심이 엇갈리는 새로운 삶과의 만남’이란 기대로 빨치산에 합류한다. 영화는 시간을 버티듯 흘러간다. 잠시의 휴식, 갑작스러운 이동, 또 잠시의 평안함, 다시 갑작스러운 전투와 도주. 추위는 굶주림과 함께, 봄의 따뜻한 햇볕은 전염병과 함께 찾아온다. 그런 혹독한 상황에서도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과 고뇌가 생겨난다. <남부군>은 그렇게 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 이태가 결국 혼자 남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빨치산’ 입장에서 그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라는 점에서 <남부군>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관객은 안성기가 연기한 주인공 이태의 시점에서 그들의 생과 사를 바라본다. 관찰자 자리에 위치한 배우 안성기의 존재감은 금기의 선을 지워버린다. 안성기 덕분에 관객은 영화 속 빨치산을 ‘빨치산’이 아닌,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관객이 체험하는 극단적인 허탈감이 그 정점이다. 이 장면에서 주인공 이태는 괴성을 지른다. 그런데 안성기는 그 이전에나 이후에나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는 배우다. 그래서 이 괴성은 더 허망하게 들린다.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춥고 고통스러운 겨울이었다.
무사(2001)
감독 : 김성수
출연 : 정우성, 주진모, 장쯔이, 안성기
볼 수 있는 곳 : 쿠팡플레이

명나라에 간 고려의 무사들이 사막에 고립된다. 이제 이들에게는 생존이 유일한 목표다. 하지만 갈등이 불거지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다. 안성기가 연기한 진립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을 찾는 인물이다. 오랜 세월 전장을 누비며 얻은 경험과 지식, 그래서 장군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감, 무엇보다 무사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간절함이 진립을 가장 이상적인 리더로 부각시켰다.
개봉 당시 <무사>가 앞세운 배우들은 정우성, 주진모, 그리고 장쯔이였다. 당연히 안성기 때문에 <무사>를 보려고 한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모두 안성기에 대해 말했다. 다른 캐릭터들이 칼과 창을 내세워 싸울 때, 진립은 활을 쏜다. 많은 관객이 산에서 뛰어 내려오면서 활을 쏘는 그의 모습에 매료됐다. 그런 캐릭터를 다른 배우가 아니라 안성기가 연기한 덕분에 진립은 <무사>를 상징하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안성기는 배우 인생 최초의 남우 조연상(2001년 청룡영화상)을 수상했다. 선봉에 서지 않을 때 비로소 발견되는 역할이 있다. 진립이 그렇고, 안성기가 그랬다.
라디오 스타(2006)
감독 : 이준익
출연 : 박중훈, 안성기, 최정윤
볼 수 있는 곳 :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쿠팡플레이

배우 안성기를 향한 추모 메시지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다. 안성기가 연기한 박민수는 자신이 지키는 스타에게 아낌없이 주는 인물이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던 최곤(박중훈)을 발군해 스타로 만들고, 그가 사고를 치면 뒷수습을 했으며, 몰락한 이후에도 그의 옆을 지킨다. 심지어 최곤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후에는 그의 더 큰 성공을 위해 스스로 물러나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박민수는 최곤에게 했던 말을 스스로 실천한다.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 스타를 밝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매니저가 바로 그였다.
<라디오 스타>가 처음 개봉했던 그때도 관객들은 박민수를 현실의 안성기로 대했다. 그와 배우 박중훈의 실제 관계가 스며든 듯한 설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안성기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박민수는 돌아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고(<기쁜 우리 젊은 날>), 새로운 모험을 함께하고 이끌어주는 사람이었다(<무사>). 그리고 기꺼이 다시 돌아와주는 사람이었다(<고래사냥>). 그래서 <라디오 스타>에서 다시 돌아온 박민수가 최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순간은 그때의 온도로 볼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이제 안성기는 돌아올 수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없다. 그래도 그의 영화가 남아 있다.

- 포토
- 조선희,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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