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라노, 진태옥, 서영희 그리고 0세부터 100세까지, 한국 여자
패션이 꿈이자 일인 여자들의 세계는 1993년생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굳건했다. 어느덧 백수를 바라보는 한국 1세대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와 진태옥, 패션을 넘어 전방위로 활약하는 60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만삭의 몸으로 반나절을 함께했다. 90세가 넘어서도 계속 꿈꾸고 일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하여 두 디자이너가 직접 들려준 이야기가 <보그>를 통해 이제 다음 세대로 향한다.

나는 어쩌다 패션계에서 글을 쓰고 있는 걸까? (4월 개봉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에서 나와 같은 피처 에디터로 등장하는 앤드리아(앤 해서웨이)의 삶을 통해 다시 한번 내 운명을 가늠해볼 계획이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문득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됐는지’ 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답은 늘 비슷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게 좋았어. 졸업 후 패션지, 영화지, 출판사에 지원했는데 패션지에서만 연락을 받았지. 그래서 나는 패션지와 어울리는가 보다 했어.” 내 생애 최초의 ‘패션 모먼트’라 한다면, 그러니까 패션이 내 삶의 주요 이슈로 떠오른 첫 순간을 꼽는다면, 초등학교 1학년 때 벌어진 어느 사건이 떠오른다. 소풍 전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단체 사진 촬영을 위해 샛노란 우등생 체육복을 드레스 코드로 지정했는데 그 사실을 숨긴 채 나는 엄마에게 급히 옷을 사야 한다고 우겼다. (집념에 가까웠던 그때 그 감정이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난다.) 시간이 한참 지나 결과물을 본 엄마는 노란 무리 속에서 홀로 민트색 벙거지 모자와 오버올을 착용한 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 후로도 시기마다 새롭게 눈에 띈 스타일 아이콘이 내 삶을 이끌었다. 중학교 수련회에서 입은 수수한 핑크색 피케 티셔츠와 청바지는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린제이 로한을 오마주한 패션이었고, 고등학교 교복 위에 한동안 베이비 핑크색 후디를 걸친 건 당시 한창 인기몰이 중이던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영감을 받은 스타일이었다. 대학 신입생 환영회, 첫 데이트, 유학을 앞두고 언제나 나는 새 옷을 샀다. 새 옷이 내일에 대한 설렘을 극대화해주는 게 좋았다. 특정 복식의 기원과 역사를 파고들거나 유서 깊은 패션지를 탐독한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나 패션 피플보다 문학가를 더 흠모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옷에 대한 꾸준한 애정이야말로 패션 매거진이라는 지금의 세계로 나를 이끈 가장 강력한 동인일지 모른다고 어렴풋이 확신하고 있다. 나는 그렇게 패션계에 안착했다.
패션은 내가 염원하는 자아이자 또 다른 이상이었던 것 같다. 패션은 늘 내가 바라는 내 모습과 내가 꿈꾸는 세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막상 입문한 패션계는 여성으로 머물기에 꽤 안락한 세상이기도 했다. <보그> 편집부는 여자들이 점령했고(편집장은 남자지만), 다른 매거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 업계에서 지난 10년간 알고 지낸 사람들 대부분도 여성이다. 나이와 경력은 제각각이지만 우린 여자, 패션, 일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친근한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언제나 손쉽게 친해졌다. 함께 했던 화보 촬영 뒷이야기를 나누며 전우애를 다지거나, 실력과 매력을 겸비한 여성 예술가들과 셀러브리티를 한마음 한목소리로 추켜세우면서.
하지만 한국 패션 디자이너 1세대인 노라노(Nora Noh)와 진태옥이 경험한 패션계는 내가 경험한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패션이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 K-패션을 개척한 노라노와 진태옥에게 패션이란 환상과 마법, 꿈과 이상, 부활과 환생, 그 모든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는 시대와 사회, 때로는 가족까지 거스르는 결단과 희생이 필요했다. 그들이 척박한 곳에 길을 낸 개척자라면 나는 가이드라인이 안전하게 표시된 그 땅을 천진난만하게 배회하는 관광객에 불과하달까. 그 모든 세월을 통과한 1928년생 노라노와 1934년생 진태옥이 이른 봄 햇살이 기분 좋게 스며드는 한남동 스튜디오에 지극히 꼿꼿하고 우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여자가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영어와 타이핑을 잘해야 취직할 수 있었는데 영어를 배우려면 미군 가정에 메이드로 들어가야 했죠. 3개월 동안 영어 회화를 독학하고, 어느 서전트(Sergeant) 집에 드나들던 아는 동생에게 빌린 타이프라이터를 베낀 그림을 놓고 타이핑을 익혀서 겨우 취직을 했답니다.” <보그> 카메라 앞에서 노라노와 진태옥의 2026년 버전 패션 대담을 이끄는 중대한 역할을 부여받은 스타일리스트 서영희가 선구적 시점에 패션 공부를 시작한 계기를 묻자 3월 21일 백수연을 맞이하는 노라노가 명랑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전 그저 씩씩한 소녀 노명자였던 노라노는 1940년대에 조선식산은행 총재의 비서로 밥벌이를 하게 됐다. “모시는 분을 따라 본의 아니게 파티에 참석할 일이 많아졌죠. 한국의 옷감이 따로 없던 시절이었기에 당시 구하기 쉽던 기모노를 해체해서 얻은 원단으로 파티복을 만들어 입었는데 그 드레스가 고위직 부인들의 눈에 띈 거예요. 하루는 교포였던 재무 국장 부인이 제 드레스를 보고 옷을 어디서 해 입는지 묻더군요. 직접 만들어 입는다고 하니 깜짝 놀라 거기 있는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더라고요. 부인들이 ‘얘 옷 입는 것 좀 봐라’ ‘멋쟁이 아니냐?’ 하다가 아무래도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것 같으니 저를 공부시켜주자고 즉석에서 뜻을 모으더군요.” 노라노가 아득한 기억을 차근차근 길어 올렸다. 전부 그녀가 채 스무 살이 되기 전 일이다. “그 시절 미국인 장관들이 전부 저를 위해 추천서를 써줬어요. 그렇게 1947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가게 됐죠.” 미국 유학은 기적처럼 찾아온 삶의 터닝 포인트였다. KBS 초대 방송국장인 노창성과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 이옥경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그녀도 시집살이에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고, 결국 열아홉 살에 이혼을 감행한 시점이었다. “아무리 좋은 집안이라고 해도 이혼한다고 하니 사람 취급을 안 해줬어요. 같이 식사도 못하는 건 물론이고 하녀 방에서 3개월을 살았다니까. 그렇지만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첫 번째 일이 바로 이혼이지요!” 그 후 그녀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인 ‘노라’라는 새 이름을 달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귀국해 1955년 ‘노라노의 집’이라는 양장점을 명동에 차린다. 6∙25전쟁 직후 몸을 가리기 위해 여자들이 전부 몸뻬 바지만 입던 시절이었다.
아방가르드한 재킷과 스커트에 하얀색 아디다스 가젤을 산뜻하게 매치하고 노라노의 말을 경청하던 진태옥은 1950년대부터 그런 노라노의 아우라를 좇다 보니 패션 공부를 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스무 살이었나, 친구랑 명동을 걷다가 아주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윈도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게 선생님 의상실이었죠. 바깥에서 느껴지는 센스와 분위기부터 다른 가게와는 달랐어요. ‘여긴 뭐지?’ 하며 들어갔는데 원단이 담긴 근사한 서랍장 뒤로 선생님이 등장하셨죠.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해요.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으로 까만 파이프를 든 채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처럼 속눈썹이 긴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방금 말씀하신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그 모든 얘기가 어찌나 근사하고 극적이던지, ‘이분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소설 속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에겐 완전히 문화적 쇼크였어요.” 여배우들이 내게 꾸준한 영감이 됐듯 진태옥은 노라노라는 존재를 선망했다. 진태옥의 무의식 속에 ‘디자이너는 멋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자리 잡은 순간이었다.

“노라노 선생님 옷 한 벌이 당시 6,000원이었어요. 괜찮은 옷 한 벌이 1,800원 하던 시절이죠. 오빠에게 온갖 구박을 받아가며 타낸 용돈으로 선생님께 맞춘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명동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꿈처럼 황홀했어요.” 그러나 노라노와 마찬가지로 스물다섯 살에 결혼하자마자 시집살이의 덫에 걸린 진태옥은(“결혼한 다음 날 시댁에서 식모를 내보냈어요. 시할머니까지 계시는데 말이에요. 내가 일하는 사람이 된 거지”) 바라던 미래로부터 조금씩 멀어졌다. 한때 변호사와 정치인을 꿈꾸며 서울대 법대 시험에도 도전했던 담대한 소녀였지만 출산까지 겪고 나니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더 요원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첫아이가 돌을 맞이한 순간, 불현듯 노라노의 존재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패션 공부를 해야겠다 싶었어요.” 누군가의 딸이자 며느리, 엄마가 아니라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진태옥에게 패션 공부는 가장 현실적인 돌파구처럼 느껴졌다. 그 후 1963년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하고 이종천패션연구소에서 실무를 배운 그녀는 1965년 명동에 ‘프랑소와즈’를 열었다. 노명자와 진태옥이라는 소녀의 꿈을 통해 1950~1960년대 명동 양장점 시대가 부흥한 것이다.
대기업에서 근무한 우리 엄마와 시어머니도 출산과 동시에 퇴사를 선언해야 했던 사회적 흐름을 고려할 때, 그보다 몇 세대 위인 노라노와 진태옥이 꿈을 좇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설움을 홀로 삼켰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들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 없이 6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보그>와 함께 한국적인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화보를 기획하고 선보이는 서영희의 존재 역시 내게 대단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디자이너와 스타일리스트로 시작한 서영희는 전시 기획으로 커리어가 확장되고 깊어지며 노라노와 진태옥의 존재를 점점 더 경외하게 된다고 고백한다. “옷의 기본과 탄생에 대하여, 그리고 그렇게 만든 옷이 어떻게 조화롭게 보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옷이 말을 걸어왔는데 그런 옷 중 가장 시적인 작품이 진태옥 선생님의 옷이었어요. 여전히 볼 때마다 전율을 느끼죠(2015년 서영희는 진태옥 데뷔 50주년 기념전 <앤솔로지>의 전시 총감독으로도 활약했다).” 노라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2016년 <보그 코리아> 창간 20주년 기념 기획전을 통해서다. “당시 선생님께서 너무 잘 협조해주셔서 감사했지만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아카이브라는 생각 외에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어요. 그러다 올해 3월 21일부터 7월 16일까지 경운박물관에서 열리는 노라노 선생님의 전시를 위해 몇 달에 걸쳐 오랜 고객들의 소장품을 받아 보는데 그 시대의 미감과 디자인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고, 애정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한복 옷감을 활용한 방식과 프린트를 연결하는 재단법, 실크 드레이프 등 모든 디테일이 귀하게 느껴졌죠.”
“이 여자 일을 빨리도 시작했구나, 오래도 일했구나, 그러겠죠, 뭐.” 노라노의 전시 <노라 노: First & Forever>를 기획 중인 서영희가 전시를 감상한 최신 세대가 어떤 인상을 받게 될지 궁금해하자 노라노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노라노가 보유한 아카이브 박스 14개를 정리하고 선별한 서영희는 이를 시대와 테마별 카테고리로 나누어 친절하게 소개할 계획이다. “약간의 감동은 있겠지. 열심히 살았다고 인정은 해줄 거예요. 아흔 넘어서까지 일하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 노라노의 말에 진태옥이 거들었다. “라거펠트도, 이세이 미야케랑 발렌티노도 죽었지. 이제 우리 둘만 남았어요, 선생님.”
1950~1960년대 양장 시대부터 1970년대 기성복 시대, 수입 브랜드가 국내에 쏟아져 들어온 1990년대, 2000년대 이후 K-패션이 글로벌 무대로 진출하기까지, 노라노와 진태옥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길고도 긴 길을 걸어왔다. 이들의 삶이 곧 한국 패션사와 다름없다. 노라노는 1956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서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선보였고,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 시스터즈의 나팔바지를 비롯해 1950~1960년대를 대표하는 거의 모든 연극, 영화, 쇼 의상을 디자인한 인물이다. 1970년대 후반 뉴욕에 진출한 사건은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잘한 일’이었다.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옷이 메이시스(Macy’s) 백화점의 15개 윈도에 쫙 깔렸죠. 한국에서 30년 동안 옷을 만들었으니 그 정도는 내가 열심히 해서 얻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는데, 교만이었죠. 미국 출신 디자이너도 그렇게 윈도 전체를 차지한 적은 없었다고들 하니까.” 이번 <보그> 촬영을 위해 노라노가 꺼내 입은 독특한 스트라이프 패턴의 아이보리색 실크 드레스는(원래 바탕색은 흰색에 가까웠다) 프린트를 잘 맞춰 재단하고 봉제하여 스트라이프 라인을 매끄럽게 맞추고, 허리 뒤쪽에 고무줄을 넣어 편의성을 높인 섬세한 디자인으로 1984년 뉴욕 컬렉션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은 아카이브 의상이다. “오늘 선생님께서 이 옷을 골라 입고 오신 걸 보고 ‘역시 고수’라고 느꼈어요. 다른 옷은 기억에 없는데, 저도 이 옷은 기억할 정도로 디자이너라면 모두가 감탄한 당대의 디자인이죠.” 진태옥이 연신 감탄했다.
여성복에 이어 아동복(베베 프랑소와즈)과 남성복(프랑소와즈 옴므)으로 영역을 넓히며 1980년대에 서울 올림픽 선수단과 아시아나항공 등의 상징적인 유니폼을 디자인한 진태옥은 1989년 서울패션협회(SFA) 창단 멤버로 국내 패션사의 핵심적인 존재가 됐다. “요지 야마모토, 다카다 겐조, 레이 가와쿠보, 이세이 미야케 등 일본 디자이너들은 세계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했지만 여전히 국내 패션계는 황무지나 다름없었어요. 코트라(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에서 한국 실크를 알리라는 미션을 주면서 우리를 파리로 보내줬는데 우리 수준이 한심하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절망했는지 몰라요. 그때 파리에서 선보인 전시에 노라노 선생님도 오셨는데 우리를 커피숍으로 부르시더니 ‘너희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요.(웃음) 선생님 기억하시죠?” 노라노는 머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으나 그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 당시의 진태옥은 도전 정신을 불태웠다. 그 후 내가 태어난 해인 1993년, 한국 패션 디자이너 중 최초로 참가했던 파리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에서 호평받은 진태옥은 자신의 패션을 ‘백자(달항아리)의 아름다움’으로 소개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진태옥을 대표하는 하얀색, 그녀의 시그니처 아이템인 화이트 셔츠를 모두 관통하는 디자이너로서의 정체성이 전 세계에 공표된 순간이었다. 두 여인의 굵직한 활약상만 나열했는데도 이야기는 벌써 2시간째 이어지고 있었다. 가장 감동적인 것은 이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집요하게 꿈꿨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꿈 같은 거 없어도 돼”라는 셀러브리티의 무심한 한마디가 청년들의 열띤 호응을 이끌어낸 적 있다. 하지만 정말 그게 멋진 삶일까? 나는 한 달 후 세상에 나올 내 딸이 마음껏 꿈꾸기를 바란다. 이왕이면 순수하고 최대한 대범하게. 노라노와 진태옥은 파리에서의 경험이 특히 행복했다고 입을 모은다. 본격적으로 유럽에 진출하기 전인 1971년, 유효기간 3개월의 단수 여권을 발급받아 파리로 향했던 진태옥에게 파리의 모든 것은 노라노에 버금가는 충격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에는 여행 가방이란 개념이 없었어요. 이태원에서 산 이민 가방을 끌고 지도를 보면서 다녔죠. 파리에 샤를 드골 공항도, 몽파르나스도 아직 없었을 때랍니다. 지도를 보고 찾아간 크리스챤 디올 매장이 실존하는 것을 보고 너무 감격스러워서 밍크를 하나 샀죠. 건물 꼭대기마다 보이는 다락방도 얼마나 신비로워 보였는지, 저 다락방에서 1년을 보내면 어떤 꿈이든 다 이룰 것 같더군요.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탄 버스가 시동을 걸자마자 눈물이 쏟아졌어요. 떠나는 게 너무 서럽더라고요. ‘반드시 다시 오고 말리라’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토록 간절하면 이루어지나 봐요.” 미술 공부를 위해 1956년 파리에 당도했던 노라노 역시 크리스챤 디올의 패션쇼를 기웃거리며 디자이너로서 포부를 다졌다. “그때 크리스챤 디올이 자기 빌딩 1층에서 패션쇼를 열더라고요. ‘나는 언제 내 빌딩에서 패션쇼를 열어보나’ 했는데 정확히 30년 뒤 그 꿈을 이뤘죠. 진태옥 씨 말대로 뭐든 정말로 원하면 결국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얼마나 크게 이루느냐의 차이만 있는 거지. 혼자 살아가는 세상처럼 보여도 내 노력을 지켜보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은 있거든. 그런 사람들이 아주 중요한 순간에 길을 내주면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는 거예요. 저도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요. 젊은 사람들에게 제가 늘 하는 이야기랍니다.”

1950년대부터 이어진 한국 패션사를 노라노와 진태옥에게서 직접 전해 듣는 그 시간이 단연 커리어 최고의 날이었다고 고백한 서영희는 촬영 후 다음과 같은 후일담을 전해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했어요. 지금의 저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서요. 하지만 울 수는 없으니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얼른 마이크를 넘겼지요.” 나는 그런 서영희에게 흘러가듯 ‘마음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뭉클했다(나에겐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으나 그저 ‘좋다’ ‘잘한다’는 뜻의 서영희식 표현일지도 모른다). 열심과 진심이 통한 것 같아 행복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국립무용단의 공연 <미인>을 주제로 한 <보그> 화보 촬영 현장에서 처음으로 서영희를 마주한 날도 떠오른다. 다들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시작한 현장, 그녀가 난데없이 모두를 한자리로 불러 모으더니 각자의 이름과 역할을 소개하며 서로에게 박수를 건네도록 부추겼다. 누군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존재가 단지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 꽃으로 만개할 수 있다는 유명한 문장처럼, 협업에 가담한 모든 손길을 존중하는 리더십이 현장을 얼마나 매끄럽게 만드는지 직접 목격한 나는 그 후로도 종종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패션에 대한 애정과 일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때때로 부끄럽기도 했다. 패션을 통해 수많은 커리어 우먼에게 자유를 선물했고(“나는 옷을 하면서 우리나라 여성이 깨어나길 바랐어요.” 노라노의 증언이다) 심지어 한 나라를 일으킨 노라노와 진태옥에 비해 일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은 너무 얄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 기사를 통해 누군가의 노력이 비로소 의미 있게 조명되는 순간은 보람 있고, 머릿속의 아이디어에 동참해준 사람들과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과정은 즐겁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노라노가 100년에 가까운 삶으로 증명해낸 인류애는 본받고 싶은 직업 정신이었다. “한때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나라에 그리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고 고민했던 적이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하고 왔으면 하다못해 농사일이라도 거들어야 하는데 옷 장사 한답시고 비싼 옷이나 만들고요. 그래서 1970년대에 한국 섬유산업을 일으키자는 다짐을 했고, 리옹에서 실크를 만들던 지인과 ‘메이드 인 코리아’ 버전의 크레이프 드 신을 개발해 뉴욕에도 수출하게 된 거예요.” 그와 비슷한 마음으로 진태옥은 정욱준을 비롯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후배 디자이너를 만날 때마다 “런웨이 모델 30명 중 5명은 꼭 톱 모델을 기용하라”고 당부한다. “국력이 바탕이 돼야 하니까요. 그 위에 방탄소년단도 나올 수 있는 거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오리지널리티다. 그리고 그다음은? “죽을힘을 다해 노력해야지. 난 아직도 성공한 사람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비교하고 반성하게 돼요. 최근에는 임윤찬의 연주를 보는데 ‘나도 쟤처럼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뭘 더 배울 수 있을지 언제나 기대해요. 머지않아 열리는 선생님 전시에서도 분명 배울 게 있을 거예요.”
나는 과연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내 일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는 잘못된 목표 설정이다. 두 장인의 귀띔에 따르면 눈앞의 일을 즐기는 것 말고 다른 곳에는 머리와 마음을 쓰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롭다. “저를 보세요. 완전히 건달이랍니다. 목적의식이 없죠. 출세를 해야겠다, 인정받고 싶다, 그런 정상적인 걸 목표로 삼은 적 없어요.(웃음) 돈도 관심이 없고요. 결과는 아무래도 좋아요. 잘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할 수 없어요. 신나니까 하는 거죠. 내가 100살까지 살고 90대까지 일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건달 정신 때문이에요. 안 풀려서 가슴 아프고, 지레 걱정하고, 그런 게 일절 없었죠.” 맞는 말이다. 걱정은 끝이 없다. ‘이제야 일이 좀 익숙해지기 시작했는데, 출산 후 감을 잃지 않고 무사히 복귀할 수 있을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게 생각보다 너무 힘겨우면 어쩌지?’ 그런 고민에 휩싸인 채 이 기사를 쓰는 지금을 즐기는 건 불가능하다. 진태옥이 덧붙였다. “저도 건달이랍니다. 선생님과는 결이 다를 뿐이지. 이렇게 오래 살고 오래 일한다는 게 건달이라는 증거가 아니면 뭐겠어요? 큰 욕심 갖지 말고, 단순해야 해요.” 노라노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한마디로 우린 ‘해피 고잉’이에요. 후회하면 건달이 아니지.”

‘해야 한다’는 단순한 책임감이 지닌 힘은 얼마나 미약한지, 그걸 유일한 동력으로 삼게 되면 반드시 한계를 만나게 된다는 걸 나도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노라노와 진태옥이 새로운 시대가 원하는 옷을 디자인하고, 서영희가 그들의 예술을 동시대 사람들이 호응할 만한 시선과 감각으로 소개하는 것, 마지막으로 내가 이 시대 청춘을 대표하여 세 여인의 대화를 경청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지만 각자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운 마음이다. 순간을 즐기며 무탈하게 구순을 넘긴 노라노와 진태옥처럼, 출산까지 한 달 남은 타이밍에 이번 기회를 대면한 나 역시 설렘과 열의를 부채질하며 이 기사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육아휴직에 돌입하기 직전이어서인지 일하는 순간순간이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꿈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들과의 대화에는 늘 그렇듯 귀한 배움이 있고, 그런 만남을 통해 내 삶은 전보다 확연히 풍성해진다. 새 옷을 사는 것만으로 행복하던 시절에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기쁨이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여성과 교류하는 서영희 역시 그런 순간을 만끽하며 지금껏 일해왔다. “다른 분야 사람들을 만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죠. 그런 순간이 참 즐겁고 소중합니다.” 일하는 마음과 태도에 관하여 서영희는 자신의 딸에게 ‘건달이 되라’고 말해줄 것이라고 했다. “하고 싶은 건 꼭 해보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 나 역시 3월이면 태어나는 딸에게 언젠가 그 말을 건넬 것이다.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나 어쩐지 주저하게 되고, 열심을 다하고는 있지만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 조금 침울해하는 딸에게, 아이가 오직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순간, 이날의 모든 이야기는 되살아나고, 과거의 이야기는 다시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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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원 "태도가 곧 정체성이라고 여겨요"
2026.02.25by 손은영, 김나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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