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낯선 길

2023.03.10

by 류가영

    낯선 길

    서해에서 남해로. 풍경 사진가 마이클 케나를 따라 물과 바람 속을 걸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 이 거장의 조언대로 순간을 영원처럼 느끼면서.

    동이 트기 전, 전남 무안의 바닷가 양식장을 촬영하는 마이클 케나. 풍경과 피사체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케나는 미니멀한 배경에 자연이나 구조물이 포인트가 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했다.

    새해가 아득해지고 일상이 순조롭게 구르기 시작하자 방랑 욕구가 고개를 든다. 책상 앞에서 진정한 깨달음은 영영 찾아오지 않을 것만 같고,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겠구나 싶은 초조함도 생긴다. 한 달 전, 공근혜갤러리에서 열린 마이클 케나(Michael Kenna)의 50주년 기념 사진전 <철학자의 나무 Ⅱ>를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오직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6×6cm 크기의 세상. 정교한 구도를 앞세운 케나의 사진을 한동안 들여다보며 촘촘한 노력의 순간으로 꿴 지난한 세월을 짐작해봤다. 50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변함없는 세상을 좇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얼마 후 당진의 어느 팽나무 앞에서 마이클 케나를 마주했다. 해가 떠오르기 직전, 그가 눈밭에 엎드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나는 낯선 일상에서 목격하게 될 모든 것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마이클 케나는 1953년 영국 잉글랜드 서부의 위드너스에서 태어났다. 드로잉, 회화, 조각, 사진 등 여러 예술 기법을 탐구한 끝에 숙명으로 받아 든 것은 사진이었다. 20대 초반에 교내 암실에서 흑백사진을 처음 인화한 후 그는 사진가가 됐다. 그 후 행보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지금껏 500회가 넘는 개인전을 포함해 900회가 넘는 전시에 참여했고, 세계적으로 출간된 그의 사진집은 어느덧 90권에 가까워졌다. 2000년과 2022년, 프랑스 정부에서 두 차례 수여한 문화 예술 공로 훈장과 2016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외국인 최초로 수상한 최고 사진가 상 등 세상에 대한 아름다운 시선을 장착한 이 사진가에게 각국은 경의와 사랑을 표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끈끈하다. 12년 전 공근혜갤러리를 통해 그의 국내 첫 개인전(<철학자의 나무 Ⅰ>)이 열린 후 한국 팬층이 두꺼워졌고, 2005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에서 틈틈이 촬영한 작품 55점을 엮은 사진집 <KOREA>(2019)가 공근혜갤러리를 통해 출간됐다. 그 사이 강원도 삼척의 풍경을 담은 그의 ‘솔섬(Pine Trees)’ 연작은 이름조차 없었던 작은 섬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고마운 역할을 하기도 했다. 고요하고 시적인 케나의 흑백사진은 곳곳에서 공명했다. 케나가 한국을 다시 찾은 건 5년 만이다. 5년 전 그와 함께 6일 동안 3,700km를 달리며 사진 작업을 도왔던 친구 남종현 사진가가 이번에도 든든한 지원군으로 나섰다. 케나는 겨울이면 더 적극적인 방랑자가 됐다. 추운 날씨에 작업하기를 즐기는 그는 눈과 안개, 비와 구름을 좋아했다. 여름에는 “빛이 모든 것을 지나치게 사실적으로(Descriptive) 만든다”면서 촬영을 멈추고, 시애틀의 암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독일에서 출간될 사진집 <KOREA(가제)>의 막바지 촬영을 위한 이번 여정에 <보그>의 동행을 허락한 케나는 때마침 한반도에 불어닥친 꽃샘추위를 반겼고, 겨울의 끝을 붙잡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때론 바위틈을 비집거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가시덤불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는데 시선을 오직 파인더에 고정한 채 완벽한 앵글을 좇아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최소한의 장비만 지고 케나는 한결같이 가볍게 걸었다. 태안의 해변가에서 케나의 백팩을 들고 뒤따르던 남종현이 건넨 말은 그에 대한 첫 번째 단서였다. “많은 사람이 케나가 어떤 장비를 쓰는지 궁금해하는데 너무 조촐해서 처음에는 저도 놀랐어요.” 케나의 장비는 한눈에도 소박해 보였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그와 함께해온 핫셀블라드(Hasselblad) 중형 필름 카메라와 여행용 삼각대, 목에 건 노출계와 렌즈와 필터 몇 개가 담긴 백팩이 전부였다. 렌즈 어댑터가 없거나 갯벌에 들어가야 하는데 적당한 장화가 없을 때 케나는 변명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 “워낙 단순하게 살아서 말이죠(웃음).”
    작업 과정도 단순했다. 서해에서 남해로 이어진 3일간의 여정에서 우리는 15개 장소를 오갔다. 해와 물때에 맞춰 도착한 장소에서 적절한 위치를 선점하고, 셔터를 누르는 순간을 제외하면 케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리는 데 썼다. 케나는 흑백사진뿐 아니라 장노출 사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장노출이란 셔터를 눌러 조리개를 열고 렌즈를 빛에 길게 노출해 촬영하는 사진 기법이다. ‘찰’에서 ‘칵’이 되기까지 1분, 10분, 심지어 몇 시간까지 늘리고 늘리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장노출 사진에는 시간의 변화가 고스란히 축적된다. 금세 부서지는 파도라 해도, 장노출 사진에는 1분 전의 파도와, 지금의 파도와, 1분 후의 파도까지, 전부 부드럽게 이어져서 담긴다. 케나에게 장노출 사진을 고수해온 이유를 묻자 그가 말했다. “자연의 미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흥미로워요. 장노출로 구름과 물, 심지어 나무와 가지의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거든요. 고요해 보이는 풍경도 끈질기게 들여다보면 힘차게 일렁이고 역동하고 있답니다. 눈이나 마음으로는 시간의 축적물을 담아낼 수 없잖아요. 찰나의 순간만 목격할 뿐이죠.” 첫째 날 저녁, 노을과 함께 여무는 해변가를 제각각의 카메라로 담는 사람들 사이에서 케나는 가장 오랜 시간 우뚝 서 있었다. 물론 그의 인내심이 워낙 훌륭한 편이기는 하다. 예술가가 되기 전, 그는 7년 동안 신학교(세인트 조셉 칼리지)에 다니며 절제와 순종으로 점철된 생활을 했다. “끈기와 집중력을 길렀죠. 거기서 배우는 것들이 온통 명상, 묵념, 수련 같은 것이었으니까요(웃음).” 나는 사진가로서 케나가 무엇을 기다리는지 궁금했다.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때임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도.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삶은 끝없는 의심의 연속이다’라는 말을 믿어요. 내가 무엇을 포착했는지 혹은 무엇을 담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는지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 작업을 사랑해요. 단지 한정적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진을 얼마나 찍을 수 있는지에 따라 움직일 뿐이고요. 제가 하는 일은 선별(Selection)이 아닌 선택(Option)에 가깝지요.” 케나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철저하게 기록용으로. “스마트폰 사진은 너무 쉬워요. 느리고, 예측 불가능하고, 어려운 길이 좀 더 제 취향에 맞아요.” 답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꾸준히 한길을 걸어오며 그는 적어도 “내가 뭘 하는지 나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철학적인 이야기를 마저 했다. “언제나 안갯속을 걷는 느낌이에요. 항상 새롭죠. 똑같은 나무를 찍더라도 결코 전과 같지 않아요. 나도 변하고, 나무도 변하고, 그를 둘러싼 자연과 세상도 계속 변하는데 사진가로 살면서 그걸 즐길 줄 알게 됐어요.”

    다양한 색채가 흑백의 명암으로 함축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디테일을 부각하기 위해 케나는 컬러 필터를 활용했다. (남종현 사진가의 부연에 따르면 케나는 레드 필터와 ND 필터를 포함해 총 5개 필터를 번갈아 사용한다.) 특히 구름 사이의 경계, 원근감에 따라 달라지는 바다의 푸른 빛깔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붉은 필터를 애용했다. 덕분에 포착된 다채로운 명도의 회색빛이 사진에 깊이와 여운을 더했다. 아름다운 일출과 노을이 흑백 세상에서도 명징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케나의 사진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날 저녁으로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며 우린 영화 <기생충>(2019)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어떤 사람들은 1년 뒤 개봉한 흑백판을 더 좋아했다고 이야기하자 케나가 호응했다. “확실히 현대인이 지금보다 더 자주 흑백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어요. 자기만의 해석과 시선을 갖고요. 흑백의 세상은 단순하고, 명백하고, 훨씬 조용해서 많은 것을 상상할 여지가 생기죠.”
    물론 나이 들며 생기는 제약은 많아졌다. 몇 해 전 관절 수술을 겪은 후로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일은 까다로워졌고 작은 자극으로도 피로는 쉽게 쌓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요한 식물처럼. 사진을 찍으며 묵묵히 풍경을 응시할 때 그는 풍경과 한 몸을 이뤘고, 가장 꾸준히 좋아해온 피사체인 나무를 대할 때는 한층 깊이 몰입했다. 이번에도 케나는 새로운 나무를 많이 만날 수 있어 즐거워했다. 서해안고속도로 변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소나무부터 바닷가의 거대한 바위틈에 뿌리 내린 소나무까지, 진실하게 교감한 촬영을 마친 뒤에는 어김없이 나무로 다가가 말을 건네거나, 쓰다듬거나, 하이 파이브를 하기도 했다. 작업을 끝낸 게 아니라 친구와 헤어지는 듯이. 그에게 왜 그리 나무가 좋으냐고 물었다. “하늘과 땅으로. 조심스럽게 양쪽으로 뻗어가는 나무가 왠지 미스터리한 존재로 느껴져요. 어릴 때부터 나무와 함께 성장하면서 그 신비한 아름다움을 친근하게 느끼게 된 것 같아요.” 좁은 집에서 대가족과 부대껴 사느라 케나와 형제자매들은 자연스럽게 집 밖에 나가 노는 일이 잦았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만의 나무를 점찍고, 그 곁에서 공부를 하거나 놀며 나무와 친구처럼 자랐다. 물론 그가 나무 사진만 찍어온 것은 아니다. 맨 처음 매그넘 소속 사진가로 커리어를 시작한 케나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 DHL, BMW, 롤스로이스, 돔 페리뇽, 하네다 공항, HSBC 등과 협업하며 상업 사진가로 이름을 알렸다. 흥미로운 개인 작업도 더 있다. ‘Concentration Camps(강제수용소)’(1988-2000) 연작과 누드 사진 시리즈 ‘Rafu’(2008-2018) 연작, 충북 보은의 법주사와 경북 영천의 만불사 등이 포함된 ‘Buddhas’(2003-2019) 연작도 그의 나무 사진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큰딸 올리비아가 살고 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의 나무를 찍은 ‘Olivia’s Tree’ 시리즈를 비롯해 최근까지도 케나는 나무 사진에 가장 올곧은 마음을 쏟고 있다. 마지막으로 케나가 머무는 곳은 항상 나무의 곁이었다.
    케나의 호흡과 자취를 따르는 동안 계속 쌓여가는 질문과 위대한 예술가의 작업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 사이에서 분투하며 나는 이번 방랑의 동행자인 사진가 남종현과 허재영에게 많은 것을 물어야 했다. 위대한 선배에게서 각자가 ‘리스펙’하는 지점은 달랐으나 케나의 인화 실력에 있어서 만큼은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엄지를 추켜세웠다. 케나의 장비와 촬영 기법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고, 약 10년 전쯤 국내 사진가들 사이에서 케나의 한국 로케이션 리스트가 떠돌기도 했으나 케나는 자신만의 인화 기술로 여전히 독보적인 위치에 서 있다. 케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프로세싱(필름을 빛에 노출하고, 현상하고, 정착시키고, 약품으로 수세하고, 건조해 촬영한 이미지를 가시화하는 것)이 과학이라면, 인화는 예술의 영역입니다. 매우 본능적이고 주관적으로 치러지는 과정이고, 창의력도 필요하죠.” 어느 순간 포토샵이 대신하게 된 일을 케나는 여전히 손수 매만진다. 어떤 부분을 얼마나 밝히고 어둡게 할지, 무엇을 생략할지, 경계를 어느 정도로 모호하게 만들지 스스로 답을 구하고 찾으면서. 프로세싱한 뒤 수년이 지나 인화할 때도 있다. “시간이 지나며 필름에 얽힌 현장감과 자의식이 수그러들고, 사진과의 새로운 관계가 피어나는데 그것 역시 흥미로운 과정이에요. 사진을 찍을 때 정답처럼 스친 광경은 잊게 되고, 예상치 못한 창작물을 만들게 되거든요.”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에 가까운 사진 한 장을 얻기까지 그는 열린 마음으로, 그저 순간의 선택에 충실할 뿐이었다. 케나는 정말이지 순간을 끔찍이 여겼다. 과거와 미래를 염려하는 대신 언제나 지금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사진가로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물었을 때 주저 없이 “바로 지금”이라고 말한 것처럼. “살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사는지 잊을 때가 많지요. 하지만 과거를 후회할 필요도, 미래를 손꼽아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지금 여기에 우리가 필요한 건 전부 다 있지 않나요?”
    그는 <보그>와의 만남을 진심으로 즐거워했고, 일본 친구로부터 배웠다는 이시하라 유지로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나중에 써먹을 수 있도록 한국어 노래를 가르쳐달라고도 했다.) 지난 2월호에 쓴 기사에서 나는 그가 사진을 통한 구도(求道)의 끝에 무엇을 찾았는지 묻고 싶다고 썼다. 케나가 오랜 방랑을 통해 체득한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옳은 시간에, 옳은 장소에, 옳은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 (VK)

      포토그래퍼
      MICHAEL KENNA, 허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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