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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팬츠를 복제했다, 삶의 질이 상승했다

2023.03.03

by 이숙명

    애착 팬츠를 복제했다, 삶의 질이 상승했다

    작년에 재봉틀을 샀다. 집을 지은 직후였다. 외국에서 말도 안 통하는 인부들과 1년 반 동안 공사 때문에 지지고 볶았더니 진이 빠지고 성격도 나빠졌다. 새집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채워야 한다. 커튼 가게, 소파 가게, 침구 가게와 일일이 소통할 생각을 하니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그래서 재봉틀을 사버렸다. 첫 재봉틀은 개봉 5분 만에 고장이 났다. 새 물건이 신기하다고 이것저것 만지다가 기어 벨트를 터뜨린 듯하다. 그 정도로 지식이 없었다. 그 후 1년이 지났다. 화풀이하듯 산 재봉틀이지만 있으니 좋다. 잘 쓴다. 그걸로 오늘 바지를 만들었다.

    늘 꿈은 꾸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너덜너덜해지도록 입는 편이다. 옷장이 넘쳐도 손이 가는 옷은 몇 가지뿐이다. 그 옷들이 미어질 때면 내 마음도 미어진다. 25년 된 리넨 셔츠, 20년 된 새틴 바이커 재킷, 15년 된 실크 바지가 그랬다. 몇 년 전 외국으로 이사할 때 뉴욕이니 파리니 여행하며 사 모은 온갖 럭셔리 아이템은 버렸지만 친구한테 얻은 샘플, 구제 시장에서 발견한 한국 원로 디자이너의 옷, 1990년대 반짝 유행하다 사라진 브랜드 옷인 그것들은 트렁크에 고이 챙겼다. 요즘은 닳아서 못 입는 옷은 거의 없다. 한순간 기분에 샀다가 태그도 안 떼고 버리는 옷이 더 많다. 옷이 닳지를 않으니 섬유산업이 이렇게나 발전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즐겨 입는 옷은 당연히, 아직도, 닳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실리콘밸리 괴짜들처럼 같은 옷을 수십 벌 사뒀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첫눈에 백년해로할 상대를 알아보고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Getty Images

    아끼는 옷이 닳을 때의 심정은 화장품이 바닥을 드러낼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물건을 알뜰하게 썼다거나 좋은 소비를 했다는 자기만족은 공통이고 대체할 게 없다는 불안은 차이다. 그즈음엔 ‘이게 망가지면 난 뭘 입고 사나’라는 걱정에 비슷한 물건을 찾을 때까지 아껴 입기를 작정한다. 하지만 비슷한 물건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모르겠으나 다른 무언가의 대체제로 선택한 물건은 당연히 성에 차지 않는다. 주머니 크기가 1제곱센티미터 달라서, 목선이 3밀리미터 낮아서, 눈에도 안 보이는 솔기 처리 방식이 거슬려서, 원단이 묘하게 두껍고 뻣뻣하고 광택이 나서, 손이 가지 않는다. 새 옷 열 벌이 헌 옷 한 벌 몫을 해내지 못한다. 슬슬 짜증이 난다. 내가 스무 살도 아니고 스타일 갖고 실험할 때냐. 그러다 보니 솜씨 좋은 재단사를 알아두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계속 복제해서 죽을 때까지 그것만 입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그럴 때도 되었다. 불혹은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다. 10만원짜리 원본을 복제하느라 100만원이 든대도, 100만원짜리 기성복이 그 원본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아깝지도 않다. 다만 내가 있는 곳은 좋은 재단사를 찾기 어려운 곳이라 내가 재단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나는 오늘, 바지를 만들었다. 마음에 드는 원단을 구한 김에 언젠가 좋은 재단사를 찾으면 패턴으로 쓰려고 보관해둔 엉덩이 터진 실크 바지를 꺼내서 본을 뜨고 재봉을 했다.

    요즘은 온갖 분야 고수들이 제2의 박막례 할머니와 김유라 PD를 꿈꾸는 자식들 등쌀에 유튜브를 한다. 덕분에 세탁 장인, 재봉 장인, 수선 장인의 노하우와 인생 이야기를 공짜로 들을 수 있다. 그분들 인생 이야기에는 단골과의 인연이 빠지지 않는다. 어느 날은 장인이 오랜 단골 신사의 바지를 수선하는 영상을 보았다. 바지의 주인은 다리가 짧고 배가 나온 체형인 듯했다. 그는 최근에 살이 쪄서 허리를 늘리고 미어진 허벅지를 수선해야 했다. 바지는 꽤 고급이거나 연식이 오래된 것이었다. 솔기 부분이 오버로크가 아니라 쌈솔로 처리되어 있었다. 품을 많이 들였다는 뜻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거 뜯고 다시 박느니 새로 한 벌 만드는 게 나아요. 더 빠르고 돈도 되고. 수선비 3만원 받고 할 일이 아니야. 단골이니까 해주는 거지.” 나는 재봉틀을 조금 다뤄보았기에 장인의 말이 엄살이 아님을 안다. 한편으로 그런 퉁을 들으면서 옷을 맡긴 고객의 심정도 안다. 요즘은 인연을 고르듯 신중하게 옷을 고르는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어쩌다 어렵게, 인연인 줄도 모르고 만났으나 최고의 인연이 되어버린 옷들은 오래 곁에 두고 싶다. 그것들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아껴주고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준다. 나는 다리 짧고 배 나온 어느 신사가 자신의 애착 바지를 찾아낸 것이 기쁘고, 그것을 수선해줄 사람을 찾아낸 것이 부럽다. 요즘은 옷을 지어 입고 고쳐 입는 사람이 없으니 좋은 양장점이 있는 동네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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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당신에게도 닳는 게 아까운 옷이 한두 벌은 있을 것이다. 파리의 백화점에서 산 캐시미어 코트일 수도 있고, H&M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장바구니에 쓸어 담은 옥스퍼드 셔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내 눈과 몸이 모두 좋아하는 운명 같은 옷은 한번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럴 땐 쇼핑도 대안이 되지 못한다. 모든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가져본 옷을 다시 만들었다. 내 생활은 다시 안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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