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베니스에서 예술로 재탄생한 콘데 나스트 70년의 역사

2023.03.13

by 안건호

    베니스에서 예술로 재탄생한 콘데 나스트 70년의 역사

    프랑수아 앙리 피노, 안나 윈투어 그리고 프랑수아 피노. 사진 Antonio De Masi

    “이 아카이브 자체가 곧 문화적 아이콘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있죠.” 지난 2021년, 70년에 걸쳐 축적된 콘데 나스트의 아카이브 사진을 구매한 뒤 이를 기리기 위한 전시 <크로노라마(Chronorama)>를 연 프랑수아 앙리 피노는 이렇게 말했다.

    피노 컬렉션 소유의 그라시 궁전(Palazzo Grassi)에서 열리고 생 로랑이 후원하는 <크로노라마>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문화적 아이콘으로 거듭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모두의 미래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포토그래퍼이자 큐레이터 마티외 외메리가 큐레이팅을 담당한 이번 전시는 1910년부터 1979년까지 <보그>, <베니티 페어>, <하우스 & 가든>, <GQ>, <마드모아젤>, <글래머>를 포함한 콘데 나스트 매거진의 아카이브 작품 400여 점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전시는 1900년대 초중반 <보그>의 커버 아트를 담당하며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의 황금기를 이끈 헬렌 드라이덴, 조지 울프 플랭크와 에두아르도 가르시아 베니토의 작품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것은 에드워드 스타이켄, 베레니스 애보트, 세실 비튼, 리 밀러, 안드레 케르테스, 호르스트 P. 호르스트, 다이안 아버스, 어빙 펜, 헬무트 뉴튼, 데이비드 베일리에 이르기까지 패션 사진사에 큰 족적을 남긴 포토그래퍼의 작품이다. 이들의 사진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문화적, 사회적 진화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과도 같다.

    안나 윈투어는 물론 콘데 나스트 포토그래피 디렉터 이반 쇼, 외메리, 프랑수아 피노와 그의 아들 프랑수아 앙리 피노가 전시의 프리 오픈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전시된 수백여 점의 작품 중 최고를 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진 하나하나에 에디터, 포토그래퍼의 노고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작품을 몇 점 나열해보자면, 가장 먼저 1911년 포토그래퍼 폴 톰슨이 포착한 여성 인권 운동가이자 외과의였던 메리 에드워즈 워커 박사가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최초로 ‘바지 입기’를 시도한 여성 중 한 명이고, 바지를 입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기도 했다. 스트라우스 페이튼이 1921년 촬영한 사진에 담긴 찰리 채플린의 ‘진짜 얼굴’도 빼놓을 수 없다. 이사베이가 담은 그림을 그리는 장 콕토의 모습, 스테피 브란들이 초현실적으로 표현한 조각가 르네 신테니스, 그리고 조지 호이닝겐 후에네의 렌즈로 바라본 조세핀 베이커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었다.

    전시에서는 스트라빈스키, <보그>의 포토그래퍼로 활동하기도 한 리 밀러, 그레타 가르보, 조안 크로포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문화적 아이콘의 색다른 면면을 만나볼 수 있다. 무엇보다 <크로노라마>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거장 어빙 펜의 포트레이트. 1933년 8월 <보그>가 촬영한 첫 번째 ‘커버 걸’이자 혼혈, 양성애자이기도 했던 토토 쿠프만은 물론 칼 라거펠트, 코코 샤넬, 듀크 엘링턴, 아서 애시, 베루슈카와 카트린 드뇌브처럼 1950~1970년대를 지배한 인물들의 한순간이 담긴 사진을 만나볼 수 있다.

    옛 거장뿐 아니라, 현시대를 이끌고 있는 예술가 4인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은 에릭 N. 맥, 줄리아 앙드레아니, 다니엘 스피바코프와 타라 크라이낙. 콘데 나스트의 역사를 집대성한 대규모 회고전에 참가한 이들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동시대적 상상력을 불어넣는다. 크라이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전시 현장 역시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전했다.

    400여 점의 작품을 모두 둘러보고 난 뒤, 프리 오픈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강렬한 여운에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게스트 명단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보테가 베네타를 이끄는 마티유 블라지, 다니엘 델 코어, 에트로의 수장 마르코 드 빈센조, 사라 바타글리아, GCDS의 설립자 줄리아노 칼차와 아티코의 디자이너이자 인플루언서로도 활동하는 듀오 질다 암브로시오와 조르지아 토르디니, 그리고 영화감독 프란체스코 라가치 등이 윈투어, 앙리 피노와 함께했다.

    프리 오픈을 마무리할 무렵 윈투어가 마이크를 쥐었다. “에디터들은 항상 솔직하고, 미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지만 20세기의 문화적 흐름이 축약된 이번 전시를 보니, 저 역시 옛 생각이 떠오르는군요. 어빙 펜은 본인만의 엄격한 기준에 따라 현장에 어시스턴트, 에디터, 모델 등 극소수의 인원만 두고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항상 자그마한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헬무트 뉴튼은 실로 독창적인 관점을 지녔죠. 그때는 젊은 에디터가 100달러만 들고 무작정 떠난 여행에서도 독자와 동료 에디터를 모두 놀라게 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가능하던 시절입니다.”

    그녀는 본인이 콘데 나스트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 있었던 일화 역시 소개했다. “제가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것은 엄청난 논란을 만들어낸 사진이었어요. 전시 작품 중 헬무트 뉴튼의 1975년 작 ‘Story of Ohhh…’는 당시 독자들에게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수천 명의 구독 취소로 이어졌죠. 콘데 나스트의 전설적인 편집부 디렉터, 알렉산더 리버만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것을 불태울 사진은 어떤 것일까?’”.

    피노 컬렉션의 그라시 궁전에서 한때 <보그>의 페이지는 물론 온 세상을 불태우던 사진이 되살아났다.

    <크로노라마>는 2023년 3월 12일부터 2024년 1월 7일까지 그라시 궁전에서 관람 가능합니다.

    <크로노라마> 프리 오픈 만찬 테이블. 사진 Antonio De Masi
    <크로노라마> 프리 오픈 만찬을 즐기는 모습. 사진 Antonio De Masi
    Luke Leitch
    출처
    www.vogue.com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