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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사회성은 필수일까?

2023.03.16

by 김나랑

    식탁에서 사회성은 필수일까?

    식탁에서 사회성은 필수일까? 뉴욕과 서울의 채식주의 에디터 2인은 신념보다 소셜을 선택했다.

    뉴욕의 사회적 잡식가

    에반 레비(Evan Levy)는 2년 동안 채식주의자였다. 엄마가 오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드러운 소고기를 꺼내 내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만든 브리스킷 진짜 안 먹을 거니?” 뉴욕에 거주하는 34세의 의사 레비에게 어머니가 물었다. 레비는 요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애정과 노동이 들어가는지 알고 있었다. 그게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이라는 것도. “안 먹는다고 하면 엄마에게 모욕을 주는 것 같았어요.”

    레비는 2017년부터 환경과 동물 보호를 이유로 육류를 먹지 않았다. 스테이크와 치킨 윙을 먹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대인 관계를 위해서는 고기를 먹어야 했다. 이를테면 가족과 함께 먹는 집밥, 회사 회식의 화려한 레스토랑 메뉴, 여행지에서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고기 요리를 먹는 것, 친구들과 함께하는 캐주얼한 저녁 같은 것들 말이다. 그래서 레비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만들었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고기를 먹고 혼자일 때는 채식을 한다. 엄마가 만든 브리스킷 역시 야무지게 한 입 즐겼다.

    대부분 육식을 이야기할 때 양극단만 강조한다. 고기를 먹거나, 아예 먹지 않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레비를 비롯해 점점 많은 사람이 중간 지점을 찾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잡식가(Social Omnivore)’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집에서는 채식을 하지만, 친구나 가족과는 종종 고기를 먹는다. 이는 육식을 하지만 때때로 채식을 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애매한 ‘반(半)채식주의자(플렉시테리언 Flexitarian)’ 혹은 ‘육식 소식주의자(리듀스테리언 Reducetarian: 육식만 최소화하려는 사람)’와는 다르다. ‘사회적 잡식가’는 명확한 경계를 가진다. 집에서는 자의로 고기를 구매하지도, 요리하지도 않는다.

    사회적 잡식이 얼마나 보편화되었는지 수치로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이 고기를 덜 먹게 되었다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2020년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5%의 미국인이 지난해에 비해 동물 유래 식품을 덜 먹으려 한다. 2022년 <본 아페티>의 ‘톱 10 레시피’ 대부분이 채식 요리였으며, 이는 사람들이 집에서 점점 고기가 없는 요리를 시도한다는 걸 보여준다. 미국의 채식 기반 음식 판매량 역시 치솟고 있다. 보스턴대학교의 마인드 앤 모럴리티 연구소(Mind and Morality Lab)의 디렉터이자 철학 교수 빅터 쿠마르(Victor Kumar)는 이렇게 전했다. “온라인뿐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사람들이 채식 요리에 대해 많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대부분의 고기는 노동자와 동물을 혹사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시설인 사육장에서 온다. 하지만 쿠마르 교수에 따르면, 인간은 즐거움을 포기하길 힘들어한다. 우리의 결심이 매번 무너지는 이유다. 고기는 맛있을뿐더러 ‘우리 문화와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람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사회적 행사를 위해 고기 먹는 것을 아껴두면, 고기를 먹는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간직할 수 있죠.” 채식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고립되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캔자스시티에 거주하는 40세의 학교 교사 리비 허긴스(Libby Huggins)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쉬운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 진한 맛이 싫었거든요.” 허긴스는 또한 육류 가공 산업이 ‘역겹고’ 공포스럽다고 했다. 그녀의 식습관에는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아버지가 만들어주는 훌륭한 돼지고기 안심 요리라면 기꺼이 ‘한 입 정도’는 먹을 것이며, 남편과 중요한 여행을 할 때는 가끔 고기 요리를 맛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은 건강 문제와 직결된다. 조지아주 로렌스빌에 있는 채식 소울푸드 레스토랑 부지 서더너(The Boujee Southerner)를 운영하는 타라네키아 길버트 로스(Taranekia Gilbert-Ross)는 20대부터 ‘엄청난 위장 문제’를 겪어왔다. 몇몇 의사가 소고기를 먹지 말라는 처방을 내렸고, 42세의 요리사 길버트 로스는 지난해부터 집에서는 채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가족이나 친구 모임에서는 종종 닭 가슴살을 먹는다. 물론 파티 호스트가 비건 요리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식단을 ‘완전한 비건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 ‘사회적 잡식가’들은 자신들의 사고방식을 강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식사법에 대해 어떤 타이틀을 붙이는 것도 피한다. 레비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개인의 선택이죠. 제가 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지는 않아요.” LA 출신의 또 다른 사회적 잡식가 33세의 작가 그레이스 페리(Grace Perry)도 같은 얘기를 한다. “사회적 잡식가라는 것을 정체성의 하나로 내세우지 않고, 친구들보다 윤리적으로 우위라고 생각지도 않죠. 집에서는 고기를 안 먹고, 밖에서는 먹는다 한들 누가 신경이나 쓰나요?”

    나 스스로도 엄격한 채식주의와 사회적 육식 사이에서 10년을 우왕좌왕했다. 내가 육식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업무 때문이다. 1년에 한두 번은 폴란드인 할머니가 채식이라고 주장하는 육즙 가득한 피에로기, 닭고기 보르시를 먹는다. 남자 친구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는 독일식 자우어브라텐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먹는다. 엄마가 만든 베샤멜 소스로 가득 덮은 비프 라자냐는 내 채식 인생의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나를 먹이기 위해 쏟은 노력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지인들도 같이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인 식습관을 접어두곤 했다. 나를 위해 요리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 앞으로 초대받지 못할 테니까.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널리 알리는 것보다 친구와 가족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지내는 데 더 관심이 있다. 개인적 선호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적 잡식가는 육류를 소비하더라도 ‘도덕적 이상을 완전히 저버린 것’처럼 느끼지 않도록 자신만의 견고한 프레임워크도 갖췄다. 채식주의자가 되기 위해 바로 육류를 끊어버리고 자책하는 것은 결국 스트레스로 이어져 육류 폭식을 불러올 수도 있다.

    사회적 잡식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가볍게 받아들이길 바란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 지칭한다는 것은 다소 민망하고 너무 간단히 규정짓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잡식이라는 움직임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만들 수도 있다. 공장 사육 중지 혹은 근본적인 변화를 원하는가. 혼자 도덕적으로 사는 것은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함께해야 한다. Ali Francis <본 아페티> 에디터

    서울의 미역국

    ‘새벽이’라는 돼지가 있다. 국내 최초 ‘공개 구조(Open Rescue)’ 돼지다. 동물 해방 조직 ‘DxE 코리아’가 새벽이를 돼지 농장에서 구조해 생추어리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생추어리는 절박한 상태의 동물이 머무는 안식처다.) 누군가는 이 소식에 “돼지 서리다” “삼겹살 먹고 싶다”고 조롱했다. 새벽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 하는 소릴까. 돼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꼬리를 무는 습관이 있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송곳니가 뽑히고 꼬리가 잘린다. 마취는 없다. 거세도 마찬가지다. 돼지 농장 대부분이 상상 이상으로 더럽고 좁고 악취가 진동한다. 지옥에서 구조된 새벽이는 입소 1주년에 으깬 감자 위에 토마토를 올린 전을 선물 받았고, 설날에는 야채 만두를 먹었다. 여가 시간엔 진흙 목욕과 일광욕을 즐긴다. 새벽이 인스타그램에서 볼 수 있다.

    새벽이를 보며 2017년에 개봉한 영화 <옥자>가 생각났다. 내가 채식을 시작한 것도 이쯤이다. 봉준호 감독은 <옥자> 후반부에 나오는 도살장 시퀀스가 실제로 본 것보다 20~30배 더 충격적이라고 인터뷰했다. 그때부터 동물 사육에 관한 다큐멘터리와 책을 찾아봤다. 욕지기가 나와 보기를 자주 멈춰야 했다. 지옥이 이럴까? ‘이제부터 채식’이라고 다짐 안 했는데도 삼겹살집에서 회식을 하던 어느 날 몸이 반응했다. 구역질이 나 입에 넣을 수 없었다. 육식은 환경에도 나쁘다. 육식을 위해 얼마나 물이 낭비되고 탄소가 배출되는지 알면 놀랄 거다. 새까맣게 탄 아마존 사진을 본 적 있는가. 자연 발화가 아니라 소를 방목하기 위해 벌목꾼들이 불을 놓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친환경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은 아니라서 동물권이나 지구 환경을 위해 채식을 시작하지 않았다. 고기를 보면 이것이 어떻게 식탁까지 왔는지 눈에 그려져 메스꺼웠을 뿐이다.

    내가 채식을 한다고 하면 “어느 정도?”라고 묻곤 한다. 해산물까지는 먹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인지, 우유와 달걀을 먹는 락토 오보인지. 나는 비건을 향해 조금씩 가는 중이라고 답한다. 비건, 비거니즘이란 용어는 1944년 영국의 소규모 채식주의자 단체가 만들었다. 그들은 비거니즘을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식품, 의류 또는 기타 목적을 위한 모든 형태의 동물 착취와 학대를 배제하고자 하는 실천 가능한 철학, 생활 방식, 더 나아가 인간, 동물, 환경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대안의 개발과 사용을 추구하는 것. 식이적 관점에서는 동물에게서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유래된 모든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 아직까지 가죽 재킷을 사고 싶은 나로서는 진정한 비건은 멀어 보인다. 비건이 되려고 원하는 것을 억지로 참지도 않는다. 삼겹살이 메스꺼워지다 이젠 우유도 거부하게 된 것처럼, 조금씩 비건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레스토랑에서 상대가 내가 어느 정도 채식주의자인지 묻는다면 분명 배려해서일 거다. 그때마다 나는 “시키고 싶은 것 시키세요. 저는 골라 먹으면 됩니다”라고 답한다. 유난 떨고 싶지 않기에 먼저 채식주의자라고 말한 적도 없다. 한 동료는 6년 만에 내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 친구와 족발집에 가서 그는 족발을 먹고, 나는 서비스로 나온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는다. 어수선한 삼겹살 회식에서 내가 고기 대신 된장찌개만 퍼 먹는지 동료가 눈치채기 어렵다. 게다가 요즘 레스토랑은 비건 옵션을 갖춘 곳이 늘어났다. 회사 건물에 입점한 카페에서 ‘대체 우유(두유나 오트밀크)를 넣은 라테’를 주문하자 직원은 난감해하기보다 사과했다. “재고 관리 때문에 여러 종류를 구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당연히 괜찮다면서 라테를 주문했다. 물론 죄송할 일도 아니다. 친구들과 김치찜을 먹기로 했다면, 나는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찜보다는 달걀말이가 낫다는 생각에 달걀말이를 먹는다. 사회형 채식주의자랄까.

    때론 “내 친구도 10년 채식을 하다가 이젠 그때 못 먹은 곱창을 몰아서 먹는다”고 조롱하는 이도 있다. 당신이 고기를 먹든 안 먹든 내가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하지만 이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비건에 대한 ‘잘난 척, 유난’이란 비난은 아마도 ‘환경과 건강을 위해서 채식하세요, 몰라서 그래요’라고 가르치려 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회에 자연스럽게 융화되는 편을 선택하는 채식주의자가 늘고 있다. 일명 ‘사회형 채식주의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 기사에 함께 글이 실린 <본 아페티> 에디터는 ‘사회적 잡식가’란 용어를 썼다. 나도 당분간은 이 기조를 유지할 것이다. 고향에 내려갔을 때 엄마는 미역국을 두 가지 버전(소고기 미역국과 간장 미역국)으로 끓였다. 더 이상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1년에 몇 번 안 되는 가족이 모이는 날에 난 소고기 미역국을 먹을 수도 있다. 물론 즐겁지 않겠지만 말이다.

    엄마에게 별식처럼 대체 육류를 제안할 수도 있겠다. 비건 식재료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 중이다. 마트나 온라인 몰에 비건 코너가 따로 있다. 채식을 한 후 고기를 먹고 싶은 적은 없지만, 만두는 그리웠다. 그렇기에 콩고기로 만든 만두를 산다. 콩을 ‘고기 맛’에 가깝게 하기 위한 많은 화학 성분을 생각하면 께름칙하지만 더 나쁜 것도 먹으니까. 녹두로 만든 식물성 액체 달걀 ‘저스트 에그’도 자주 사 먹는다. 이 노란 액체로 만든 오믈렛은 일반 달걀로 한 것보다 부드러워 좋아한다. 이제 생선 없는 생선, 고기 없는 고기 등 아예 실험실에서 온 식재료도 나올 것이다. 지난해에 소나 닭의 세포를 추출해 배양한 고기가 미국 FDA 승인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이 배양육을 먹을지는 모르겠다. <식사에 대한 생각>을 쓴 음식 칼럼니스트 비 윌슨의 말처럼 “식사와 관련해서 인간은 늘 네오포비아(Neophobia,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와 네오필리아(Neophilia, 새로운 것을 향한 사랑)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니까. 너무 새로우면 거부감이 든다. 게다가 나는 고기 맛을 원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흔히 채식을 하면 고기가 먹고 싶은데 참는다고 오해한다. 나는 버섯에서 나는 고기 비슷한 향도 불편할 때가 있다.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채식주의자는 건강한 채식을 위해 공부도 많이 한다. 장내 미생물을 살리는 식단을 추구하는 마이크로바이옴, 물에 불린 현미를 씹어 먹는 생채식처럼 건강을 위한 제안이 넘쳐난다. 식물성 재료로 만드는 창의적인 요리법도 책과 유튜브 영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비건이 추구하는 윤리적 목표를 저해할 수도 있다. 비 윌슨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가공식품과 지방, 육류, 설탕을 많이 먹는 시기에서 슈퍼푸드 집착 단계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이들은 작은 혼합 씨앗 한 봉지에 상상 이상의 돈을 지불하려 하고, 조와 귀리 같은 과거의 여러 주요 식품이 값비싼 건강식품으로 재탄생한다.” 아보카도 때문에 물이 마르고, 퀴노아 대란으로 농민이 말라가는 뉴스가 슬프다. 건강한 채식을 위해 그때그때 집착하는 유행 식품에서 해방돼야 한다.

    언제나 균형이 중요하다. 음식은 취향, 신념, 몸 상태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이다. 콩고기 버거를 먹든, 불린 현미를 도시락으로 싸갖고 다니든, 육식파든 모두 존중한다. 다만 어떤 방식이든 지나치면 나와 주변 사람, 세상에 해를 끼친다. 식탁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밥상에 고기밖에 없다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 것, 비싼 수입 슈퍼푸드에 집착하지 말 것, 나 때문에 누군가 두 번 노동하지 않게 할 것. 엄마, 이제 미역국은 한 종류만 끓이세요. 아, 제가 할게요. 김나랑 <보그> 피처 디렉터 (VK)

    일러스트레이션
    Enikö E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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