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아메리칸드림, 랄프 로렌

2023.03.17

by VOGUE

패션 화보

아메리칸드림, 랄프 로렌

2023.03.17

by VOGUE

    아메리칸드림, 랄프 로렌

    Trio Greeting 히안드라는 슬리브리스 새틴 드레스에 샌들과 진주 귀고리를, 그레이스는 오프숄더 실크 저지 톱에 실크 스커트, 에나멜 샌들과 빨간색 백을, 아사는 새틴 바시티 재킷, 실크 브라렛, 시폰 바지, 가죽 샌들과 함께 청금석과 크리스털이 섞인 드롭 귀고리를 매치해 각각의 매력을 뽐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지 50년이 지났다.
    하지만 랄프 로렌은 여전히 아메리칸드림을 외치며 미국을 대표한다.

    뉴욕 맨해튼 매디슨가에 있는 고층의 랄프 로렌(Ralph Lauren) 본사는 유리와 철제로 된 거대한 탑이 공격적인 모습으로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얼핏 보기에 랄프 로렌과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인상이다. 하지만 6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리는 순간 그런 생각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런던 본드 스트리트에 있는 랄프 로렌 매장과 똑같이 나무를 덧댄 벽과 분위기 있는 유화, 격자무늬 쿠션으로 장식된 사랑스러운 느낌의 가죽 소파가 있는 낮은 조도의 아늑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니 말이다. 서로 다른 층에서 일하는 여러 디자인 팀을 연결해주는 폭 넓은 마호가니 재질의 계단까지 설치되어 있다.

    넓은 복도를 따라가면 랄프 로렌의 사무실이 있다. 키 큰 물잔을 어디에 놓을지에 대한 고민은커녕 너무 많은 골동품이 꽉 들어차 어디서부터 시선을 두어야 할지조차 결정하기 어려운 곳이다. 빈 공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책이 쌓여 있고, 미술품 액자와 각종 잡지, 상패가 네 면의 벽을 등지고 바닥에 늘어서 있다. 고개를 드니 양피지로 만든 듯한 1950년대 모형 비행기 두 대가 매달렸다. 그 아래에는 빈티지 광택의 검은색 자전거(선물 받은 것으로 한 번도 사용한 적은 없다)가 놓여 있다. 책상에는 조그마한 카우보이 부츠, 깡통 로봇, 장난감 자동차와 헬리콥터 같은 장식품과 나란히 하나같이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가족(아내 리키(Ricky), 아들 앤드류(Andrew)와 데이비드(David), 딸 딜런(Dylan)과 함께 손주 다섯 명)의 사진이 은색 액자에 들어 있다. 빈 공간이라고는 식사용 접시 한 개를 놓을 수 있는 크기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아마 로렌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남겨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언제든 안심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는 ‘Polo Bar’라는 자신의 레스토랑이 있으니까).

    로렌은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하며 내게 다가왔다. 부드럽게 말하지만 카리스마가 있고, 날씬한(매일 아침 90분 동안 개인 트레이너와 운동을 한다) 그는 빛바랜 느낌의 청바지에 셔츠, 타탄 무늬 블레이저와 새것 같은 하얀 운동화 차림이다. 연한 청록색 눈동자가 주름진 구릿빛 피부와 대비되어 한층 더 반짝인다.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2023 S/S 컬렉션(놀랍게도 그가 서부 해안 지역에서 패션쇼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을 선보이고 돌아왔다. 제니퍼 로페즈, 벤 애플렉, 존 레전드, 로라 던, 다이안 키튼(그녀와는 1970년대에 로렌이 영화 <애니 홀> 의상을 제작해준 것을 계기로 친구가 됐다) 등이 참석했다.

    늘 그렇듯 컬렉션에는 관능적인 프레리 드레스에 매치한 카우보이 부츠, 견고한 나바호 스타일의 블랭킷 스커트, 흰색 테니스 반바지에 프레피 스웨터, 랄프 로렌만의 테일러링, 바닥까지 내려오는 굴곡진 이브닝 가운이 자아내는 옛 할리우드의 화려함 등 고전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에 약간의 영국풍이 가미되어 있었다.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성공적인 이유는 바로 제가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상품이죠. 제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 옷도 좋아할 겁니다.” 랄프 로렌은 말한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 역시 중요한 것은 패션이 아니다. 이게 진실이다. 로렌은 항상 라이프스타일, 즉 옷을 입고 ‘살아가는’ 삶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오랜 기간 그가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우리에게 꿈을 꾸라고 권한다. 랄프 로렌의 스웨터를 살 때 우리가 구입하는 건 단지 스웨터 한 벌이 아니다. 잘 다듬어진 턱선과 완벽한 피부를 가질 수 있는 세련되고 고상한 세상을 구입하는 것이다. 누구나 말 한 마리와 스포츠카 한 대를 소유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세상 말이다(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그 모든 것이 대단히 이뤄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 목적으로 그는 늘 디자이너보다 영화감독에 더 가깝게 일해왔다. “저는 칼 라거펠트가 아니에요”라고 그는 인정하면서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고인이 언젠가 자신에게 대표가 되었어야 했다고 말한 일을 덧붙였다. 그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칼을 많이 좋아했어요. 칼은 디자이너였고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저는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저는 자신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쿨한 사람으로 봅니다”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이름에 대한 기억력 때문에 스스로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자신감은 조금도 잃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또 그래서도 안 되고 말이다.

    현재 랄프 로렌 코퍼레이션의 가치는 74억 달러 이상이다. 비록 2015년에 CEO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로렌은 여전히 이사회 의장과 CCO(Chief Creative Officer) 직함을 유지하며 랄프 로렌 컬렉션, 폴로 랄프 로렌, 퍼플 라벨, 더블알엘 등 모든 것을 총괄한다. 세계적으로 1,246곳의 랄프 로렌 직영과 기타 매장을 비롯해 레스토랑 다섯 곳과 수많은 커피숍이 존재한다. “모두 제 것이고, 제가 이룬 결과물입니다. 성실하게 제 취향대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정말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남들이 짐작하고 있을 만한 그런 모든 감정에 실제로 제가 취해 있진 않아요. 항상 열심히 일해왔고, 이뤄낸 것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83세의 랄프 로렌이 아직 보지 못한 것 혹은 하지 못한 것은 거의 없다. 그의 어린 시절 영화 여주인공이었던 오드리 헵번이 그에게 CFDA 평생공로상을 수여하기도 했고, 캐리 그랜트와 경마장에서 어울렸으며,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조언도 했다. “저는 부유하지 않았어요.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확실히 부자는 아니었죠. 모든 사람이 그렇듯 저도 좋은 삶을 꿈꿨어요. 집과 경주용 자동차를 갖고 싶었죠. 소년 시절의 꿈을 저는 현실로 바꿔놓았습니다.”

    1939년생인 그의 원래 이름은 랄프 리프시츠(Ralph Lifshitz, 16세에 로렌 바콜의 이름을 따 ‘로렌’으로 개명했다)였다. 현재 벨라루스에 속한 핀스크 출신의 유대인 이민 가정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가였지만 그보다는 다른 집을 페인트칠해주고 그 수입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자라면서 존 F. 케네디를 비롯해 제게 특별하게 여겨지던 인물들을 사랑했어요. 그들은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우등생이 아니었고 패션에 특별히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패션 스쿨에 다닌 적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좀처럼 다른 디자이너 혹은 그들이 뭘 하는지 살피지 않는다). 다만 이브 생 로랑에 관한 신문 기사를 읽은 일은 기억한다. “그를 존경했어요. 그가 20대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죠. 꼭 그의 옷이 좋았다기보다 위대함이 마음에 들었어요. 마법을 부릴 줄 알았죠.” 성공은 로렌이 늘 인식하던 것이다. 브롱크스에서 성장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는 늘 마음속 깊이 성공을 갈망했다.

    로렌은 영화에 열정적이었다. 스티브 맥퀸, 폴 뉴먼 같은 유명 스타에게 관심을 가졌다. “늘 제 옷을 입게 될 배우들을 좋아했죠.” 그래서 랄프 로렌에게는 ‘사람들이 살고 싶고 속하고 싶은 낙관적인 세상을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라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Mr. Legend 캐주얼한 봄버 재킷과 화이트 팬츠에 선글라스로 힘을 준 미스터 로렌.

    아메리칸드림의 주 전파자로서 50년 넘게 경력을 쌓아왔지만, 로렌 또한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한 인물이기도 하다. 넥타이를 디자인해 팔던 열정적인 젊은이 로렌이 그가 만든 넥타이 폭을 좁게 만드는 조건의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주문을 거절한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다른 스타트업 디자이너 같았다면 환호하며 “폭을 어느 정도 줄일까요?”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로렌은 달랐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는 그때 일을 회상하며 “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라고 말하고는 걸어 나왔어요”라고 말한다. “6개월 뒤 백화점 측에서 다시 저를 찾아와 ‘선생님의 넥타이를 구매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죠.” 그 작은 넥타이 컬렉션은 첫해에 50만 달러에 달하는 매출을 올렸다. “그러자 백화점 측이 ‘또 뭘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더군요. 그때 저는 아직 풋내기였지만 넥타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더 좋은 것을 들고 나타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래서 저는 셔츠를 만들었고, 그다음에는 여성복을 만들게 된 겁니다. 유행을 따르진 않았지만 새로운 스타일이었어요. 새로운 것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블루밍데일스에 ‘매장 하나를 주세요. 제가 직접 운영하고 싶어요’라고 요청했죠.” 그렇게 1969년에 블루밍데일스 백화점에 자신의 매장을 열었다.

    그의 고전주의로 인해 로렌이 얼마나 선구적 인물이었는지 과소평가하기 쉽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절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은 관심 밖의 일이었죠. 어떤 것이 성공할지는 알지 못했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람도 원할 거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전부 본능이었죠.” 그는 미국(1971년 베벌리힐스)에서 단독 매장을 연 최초의 미국인 디자이너였으며, 다른 미국 디자이너에 비해 훨씬 먼저 유럽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다양성과 포용성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랄프 로렌의 모델들은 늘 다양한 연령대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었다(이런 개념은 최근에 와서야 산업 전반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는 1983년에 가정용품을 출시한 첫 번째 패션 디자이너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혁신적 움직임이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제 말은, 그러니까 제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집이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을지는 안다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여러 곳에 집이 있다.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뉴욕 베드퍼드의 저택에서 시간을 보낸다(58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을 묻자 다 알고 있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리키에게 물어보셔야 할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콜로라도에는 1만6,000에이커(약 2,000만 평)에 달하는 목장이 있으며, 자메이카에도 휴가를 즐기기 위한 집 한 채가 있다. 그리고 취미로 매우 많은 스포츠카를 수집한다(비록 수억 달러의 가치로 평가받는 훌륭한 투자이기는 하나 스스로 ‘나쁜 취미’라고 고백한다).

    로렌은 자신의 명성과 관련해 이제는 좀 더 조용한 삶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저를 바라보는 게 좋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죠. 물론 식당에 초대받는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좀 더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습니다.” 확실히 성공은 로렌에서 부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많은 것을 되갚기도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암 퇴치를 위해 헌신하는 여러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그의 회사는 할렘에서부터 런던 로열 마스든 병원(Royal Marsden Hospital)에 이르기까지 유방암 치료와 연구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고, 소외 지역에서 교육과 변호에 대한 접근성 증대를 위한 각종 활동을 후원하는 중이다.

    로렌이 속도를 늦추는 것에 관심이 없음은 분명하다. 그는 일주일에 5일을 사무실에 출근해 늘 그래왔듯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운 것들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로렌은 표현한다. 컬렉션이든 식당이든 매장이든 상관없다. “그만두고 싶지 않기 때문에 계속하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해요. 일은 저를 기분 좋게 만들죠.” 당연한 수순으로 우리의 대화는 후계 문제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는 모호한 대답만 들려줄 뿐이다. “제게는 훌륭한 인재가 많아요. 그들 중 몇 명은 여기서 30년 혹은 40년 동안 함께 있었어요. 제가 각별히 신경 써주는 만큼 그들도 매우 충직하죠. 하지만 사실 저는 제가 이곳에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 이 브랜드가 어떤 모습일지, 20년 혹은 30년 후 어떻게 변할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저는 영원함을 위해 디자인합니다. ‘패션’을 위한 게 아닙니다. 옷은 시간이 갈수록 더 나아져요. 새로움 혹은 오래됨의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영원함과 옷을 더 좋게 만드는 착용 방식입니다. 즉 옷이 아니라 어떻게 입느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는 옷과 자동차도 지속되는 것들을 좋아하고, 지속되는 삶을 좋아합니다. 인생이 짧다는 것도 물론 압니다. 그래서 제가 가진 것을 즐기고 있어요. 그리고 제 삶을 즐기며 살아왔습니다.”

    떠나기 전에 나는 그가 랄프 로렌이 아니었다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로렌은 웃으며 “아마 내 건물의 관리인이었을 겁니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라고 그는 고백했다. “정말로요. 매일 아침 그 사람이 ‘안녕하세요, 로렌 씨’라고 말할 때마다 저는 ‘내가 이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걸요. 그렇지 않나요? 저는 천재가 아니잖아요. 그 인물도 가족과 삶, 고민이 있고, 또 행복한 사람이에요. 다만 저는 제 삶에서 하고 싶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뿐이에요. 저는 훌륭한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냐고요? 그럼요. 만족하냐고요? 그럼요, 만족스럽습니다.” 로렌은 잠시 말을 끊었다 다시 입을 열었다. “후회는 전혀 없어요. 저는 매우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VK)

    포토그래퍼
    Sharif Hamza
    스타일리스트
    Dena Giannini
    Sarah Harris
    모델
    Annemary Aderibigbe, Amar Akway, Assa Baradji, Grace Elizabeth, Hiandra Martinez, Jade Nguyen, Irina Shayk, Mariam de Vinzelle
    헤어
    Guido
    메이크업
    Diane Kendal
    디지털 아트워크
    Artworks
    제작
    Tightrope Prod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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