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작은 일에 분노하는가
외국에서 은행에 갔다. 현지 휴대폰과 유심에 문제가 생겨 온라인 뱅킹이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90분 동안의 상담 끝에, 직원은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90분 중 1시간 정도는 국제전화 국가 코드라는 게 뭔지 모르는 직원이 나의 한국 전화번호를 자국 번호로 착각해 ‘이게 왜 입력이 안 될까’ 어리둥절해하며 보낸 시간이었다. 나머지 30분은 해당 은행이 한국 전화번호를 계좌 개설에 이용할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해놓고 왜 작은 지점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도록 막아두었는지 알아내는 데 소요되었다. 나의 인내심은 서서히 말라갔다. “처음부터 내 사정을 설명했는데 그 이유 때문에 거절할 거라면 왜 90분이나 시간을 끌었고, 저 직원은 이게 당신 회사 서비스가 아니라는 거짓말을 왜 한 거예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진 순간 모든 손님의 시선이 쏠렸다. 아, 또 화를 다스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비겁하게 덧붙였다. “당신들이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한 거 잘 알겠고, 그건 감사해요. 이건 당신들이 어쩔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겠어요. 이렇게 화를 내서 미안한데 내 심정도 이해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신네 회사는 문제가 있어요!” 그러자 3명의 은행원이 두 손을 모으고 한껏 공손한 표정으로 연신 사과를 했다. 그 사과에 통쾌함이라도 느꼈나 하면, 오히려 반대다. 이런 유의 분노는 사태 해결에 도움도 안 되고, 남의 기분을 잡치고, 나의 체면도 망치는 짓이다. 그러고 나면 남는 건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도망치듯 은행을 나온 나는 며칠째 메시지에 응답하지 않는 카센터를 찾았다. 내가 방문 사유를 설명하자 직원은 “아… 그거…” 하고는 출장 서비스 스케줄을 잡아주었다. “아… 그거…”라니, 내 메시지를 다 봐놓고 ‘읽씹’을 했다는 거지?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간신히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내뱉은 뒤 재빨리 얼굴을 돌려 상대를 외면했다. 수리 기사가 약속 시간을 두 번 미루고 30분 지각까지 하자 그날의 세 번째 위기가 닥쳤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웃었다.
그러고도 위기는 계속되었다. 마침 지금은 세금 신고 기간이고, 일부 금융 어플은 ARS 인증만 허용해서 재외 국민이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내가 이용하는 한국의 통신사는 고객의 유심 정보를 해킹당했다는데, 유심 보호 서비스를 신청할 수도 없고, 혹여 번호 이동에 실패해 한국 번호를 날려버리면 온라인 난민이 될 수밖에 없는 재외 한국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검색에 긴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컴퓨터와 휴대폰을 붙들고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끝내 비명을 지르며 책상을 내리쳤다.
“이 망할 놈의 세상아!”
그렇다. 나는 작은 일에 분노한다. 이것들은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세계의 존망이 걸린 일도 아니다. 어차피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는 조급함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나마 통제 가능한 사소한 영역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럴 때 나는 집요하고 성급해진다. 제 위치에 놓여 있어야 할 것들, 약속된 서비스, 상대가 제 역할을 다했다면 원활하게 해결되었을 일들이 삐걱거리고 뒤틀리고 무너져서 일상의 예측 가능성이 훼손될 때, 우리의 무력감, 좌절감, 답답함은 쉽게 분노로 이어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일단 이성의 벽에 균열이 생기면 그 사이로 뭐가 더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꾹꾹 눌러 담아두었던 세계와 인간, 자기 인생 따위에 대한 환멸, 좌절, 혐오, 스트레스가 사소한 일을 기화로 불쑥 튀어나와서 상황에 비해 과도한 반응을 해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본다. 드라마 <성난 사람들>(넷플릭스)에서 운전을 하다가 시비가 붙은 아시아계 미국인 주인공들이 서로에게 파탄 난 가정, 사업 실패, 성장기 스트레스까지 모조리 쏟아부으며 죽기 살기로 싸우는 모습과 비슷하다. 나도 모르게 분노에 휩싸여서 그 사람들처럼 독하게 굴다가 어딘가에 영상으로 박제되어 ‘OOO 진상녀’라고 남은 평생 욕을 먹게 될까 봐 두렵다.
나는 무의미한 분노를, 부족한 인내심을, 그로 인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바로잡고 싶다. 하지만 쉽지 않다. 나보다 참을성 좋고 긍정적인 친구들에게 상담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호인이라도 서비스 센터와 통화한 후 침대에 전화기를 집어 던지거나 친밀한 타인에게 짜증을 퍼붓고 후회한 경험 정도는 갖고 있었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분노를 ‘일시적 광기’라고 표현했다. 그는 기원전 4년경 출생했다. 그때 이미 ‘일시적 광기’가 철학의 테마였다니, 인간은 어쩌면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세네카는 ‘분노에 대한 최고의 치료는 시간을 끄는 것이다’라는 조언을 남겼다. 좋은 말씀이다. 마음 챙김(Mindfulness)의 대가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도 비슷하다. 분노가 올라올 때는 호흡에 집중하면서 내 안의 분노를 발견·인정·위로하라는 것이다. 바로 말하지 말고, 상대 탓만 하지 말고,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고도 한다. 역시나 좋은 말씀이다. 그런데 2,000년 전 철학자와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선승께서도 개인 정보가 털리고, 금융 서비스 인증 절차에 하루 열다섯 번 실패하고, 자기 회사가 대대적으로 보도 자료를 내서 홍보한 서비스를 전혀 숙지하지 못한 은행원과 90분 동안 뜬구름 잡는 상담을 해본 경험이 있을까는 의문이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 이렇게 썼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중략)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들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시인은 권력자들과 거대한 불의에 저항하는 대신 사소한 것에만 옹졸하게 반항하는 자신을 자조한다. 나는 이 시에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이, 나의 욱하는 성미에 대한 주제넘은 합리화처럼 느껴진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아득하게 큰 문제들에 대한 분노가 작은 분노의 원인이라는 건 비겁한 변명 혹은 자의식 과잉이 아닐까. 하지만 이 시의 결말에는 양심의 가책 없이 공감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 정말 얼마큼 적으냐……’
나는 아직 이 사소한 것들을 향한 일시적 광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기업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감정 노동자에게 전가하지 않고, 온라인 서비스가 언제든 편리하고 안전하고 원활할 것이란 기대를 버리고, 인간의 무능은 죄가 아님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의 감정을 제외하고 내가 항상 통제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기대 자체가 착각임을 기억하려 한다.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그래도 다시 화가 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작은 일들에, 나의 야경꾼, 나의 이발쟁이, 나의 설렁탕집 주인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분노한다. 그 분노 때문에 1만원, 10만원, 100만원을 잃고, 시간을 잃고, 위신을 잃고, 사람을 잃고, 나라는 인간에 대한 애정도 조금씩 잃는다. 이 존재의 ‘적음’을 나는, 어쩌면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 포토
- Unsplash, Pexels
추천기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