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성취와 안식을 위한 곳, 전은경 디렉터의 집
삶의 큰 계획을 세우기보다 매달 최선의 결과물이 담긴 잡지를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해온 매거진 <C>의 전은경 디렉터. 매일의 성취와 집에서의 안식을 확실히 붙들며 행복을 사수했다.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다. 아이코닉한 의자 하나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매거진 <C> 전은경 디렉터의 첫인상이 그랬다. 디자인을 향한 총기와 애정이 느껴지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날렵한 눈썰미로 좋은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발굴해온 커리어를 단숨에 체감할 수 있었다. (전은경은 지난 18년간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약한 후 2023년 매거진 <C>에 디렉터로 합류했다.) 그의 새 부암동 집은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이 모두 내려다보이는 부러운 전망에 엘리베이터까지 갖췄다. 여느 가정집과는 다른 규모와 구조만큼 대충 고르고 배치한 것이 없다는 조명과 의자 하나하나가 눈에 띄었다. <보그 리빙>과의 만남에서 전은경은 분명한 이유를 지닌 물건과 취향, 라이프스타일을 온전히 품은 집이야말로 “확실한 매일의 성취감을 줄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부암동만 지닌 분위기가 있어요. 아파트가 밀집한 동네와는 확연히 다른 환경인 이곳으로 이사한 이유를 먼저 묻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 후 긴 시간 동안 아파트에 살았어요. 야근이나 저녁 약속 때문에 늘 귀가가 늦다 보니 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았어요. 그래도 흠잡을 데 없이 편하고 좋았죠. 변곡점은 팬데믹 기간에 찾아왔어요. 처음으로 집에 대한 무료함을 느꼈고, 집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세우게 됐습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개성 있는 집과 공간을 소개하고 중개하는 부동산을 통해 지금 집에서 100m 떨어진 골목 초입의 단독주택을 소개받았고 무작정 이사를 했어요. 3.5층 규모의 협소한 주택이었지만 마운틴 뷰가 참 아름다운 집이었죠. 채광과 전경이 좋지 않아 우울함이 밀려오는 집과 달리 언제나 기분이 좋아지는 집이었어요. 서촌, 광화문도 가까워서 좋은 미술관과 영화관, 카페가 많다는 것도 만족스러웠고요. 지금 집은 동네 산책을 하며 공사하는 걸 눈여겨보고 있다가 완공된 후 부동산에 올라온 것을 보고 재빠르게 계약해서 살게 됐어요. 우리 부부가 계약하기 전에 집을 보고 간 사람들은 일반적인 구조가 아니어서 덜컥 용기 내기 어려웠던 모양이에요.
4개 층을 오르내리는 수직적 구조의 집을 선뜻 선택하기가 쉽지는 않겠죠.(웃음)
전에 살던 집도 비슷한 구조였어요. 덕분에 많이 단련된 거죠.(웃음) 수직적으로 설계된 집의 장점은 각각의 공간을 명확히 분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층마다 다른 컨셉으로 공간을 디자인하기에도 유리하고요.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공간이 분할되는 구조가 특히 재밌게 느껴졌어요. 본격적으로 인테리어를 하며 각각의 공간에 저만의 이름을 지어주어야겠다고 결심했죠. 예를 들어 침실은 ‘Everyday Resort’, 게스트 룸은 ‘Writer’s Room’으로 부르고, 각기 다른 분위기와 용도로 꾸몄어요.

이 집이 삶과 철학에 꼭 맞는 집이라고 소개했죠. 새로운 집은 어떤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고 있나요?
아파트에서 주택으로 이사하고, 18년 동안 다닌 직장을 그만두면서 삶에 큰 변화가 찾아왔어요. 월간지에서 계간지로 옮겨가며 일상의 속도가 미세하게 달라졌고요. 돌이켜보면 월간 <디자인>에서 좋은 디자인과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은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요? 취재하며 좋은 기회에 제 취향에 부합하는 아이템을 하나둘 사 모으기도 했지만, 정작 그렇게 축적한 취향을 음미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죠. 이사를 계기로 이미 갖고 있는 사물을 중심으로 집을 잘 가꿔보자고 결심한 순간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새로운 취향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어요..

이 집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요소는 무엇인가요?
창밖으로 북악산, 북한산, 인왕산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는 거예요. 얼마 전 등산을 즐기는 편도 아닌데 산을 왜 그렇게 좋아할까 상기해보니 시각적인 것에 예민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계절에 따라 뚜렷하게 변화하는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지루할 틈이 없어요. 좋은 집의 조건으로 ‘한강 뷰’를 강조하지만, 저는 ‘마운틴 뷰’가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아침마다 책상에 앉아 찬찬히 업무를 보면서 틈틈이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요즘 제 삶의 가장 큰 낙이에요. 매일 눈으로 등산을 하는 셈이죠.(웃음)
수집품 중에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 빛을 발하는구나’ 싶은 아이템이 있나요?
너무 어려운 질문이군요. 오랜 시간 좋은 디자인을 취재하며 여러 디자이너와 제품을 접해왔죠. 그런데 그때그때 다른 스타일, 철학, 브랜드를 좋아했어요. 각자의 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사랑할 구석이 넘치게 보였죠. 이 집에 놓인 조명만 하더라도 온갖 스타일이 뒤죽박죽 섞여 있어요. 그것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 신경을 더 많이 썼습니다. 각 아이템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쇼룸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공간을 원했거든요.

은연중에 수집하는 것이 있나요?
매거진 <C>는 각 호마다 하나의 의자를 선정해 깊이 파고들어요. 책을 만들며 그 디자이너와 의자를 깊이 애정하게 되고, 주제에 따라 저도 하나씩 사 모으게 되더군요. 월간 <디자인>에서 새로운 것을 취재할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물건을 대하게 되죠. 이전까지는 디자인을 폭넓게 살폈다면 지금은 깊이 있게 파고들면서 수양하는 것처럼 하나의 디자인을 더 사랑하게 되더라고요.

반대로 이사를 하며 제일 먼저 비운 것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게 ‘배드 디자인’의 표본일 수도 있겠어요.
자잘한 소품이죠. 몇 년 전부터 ‘애매한’ 물건의 소비를 지양하고 있어요. 마음에 드는 식탁을 찾지 못해서 한동안 식탁 없이 생활한 적도 있죠. 적당히 저렴한 것을 구입해 소비하고 버리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싫더라고요. 그런 이유로 보복 소비, 플렉스, 테무템 등의 소비 트렌드와 거리를 두려고 해요. 요즘 골몰하는 ‘물욕 없는 디자인’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책을 써도 좋을 거 같습니다. 누구나 깊은 고찰 없이 물건을 사서 함부로 버리는 것에 불편한 마음을 갖기 마련인데, 그런 시대에 ‘좋은 물건을 알아보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 경험상 안목은 인스타그램에서 멋진 사진 몇 컷 저장한다고 손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직접 눈과 손과 발로 수고한 시간을 통해 천천히 쌓이는 거죠.

당신에게 집은 무엇인가요?
다시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공간이죠. 밖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돌아와 호흡을 고르는 은신처고요.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산을 바라보며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맛있는 커피와 와인을 어떤 곳보다 여유롭게 음미할 수 있죠. 반드시 크고 여유로운 집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을 설계해나간다면 단 한 칸의 방도 충분합니다. (VL)
- 피처 에디터
- 류가영
- 글
- 유승현
- 사진
- 윤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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