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곰리의 ‘산’
75세의 미술가 안토니 곰리가 〈보그〉에 조각의 경이를 전해왔다. 한국에 세계 최초의 안토니 곰리 상설 전시관이 열리는 특별함 덕분이다. 서울에서 두 개의 전시도 이어진다.

거장의 작품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것만큼 호사스러운 행복이 또 있을까?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작품을 1년 내내 감상할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강원도 뮤지엄 산에 건립됐다. 야외에 영구 설치된 그의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건축과 어우러진 경험을 제공하는 미술관은 이곳이 유일하다.


“상설 전시관의 이름은 ‘그라운드(Ground)’입니다. 전시관과 그곳에 설치한 조각 연작 ‘그라운드’까지 하나의 같은 작업이지요. 텅 빈 전시관에 있는 7점의 조각은 인간의 몸을 건축 형식으로 삼아 재현이 아닌 장소로 작동합니다. 각각의 조각은 사고와 감정을 머물게 하는 장소이며, 공감각적 투사를 유도하지요. 하지만 난 이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뭔가 고정된 메시지를 전달할 의도는 없습니다. 예술은 우리 삶의 에너지를 자각하게 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상설 전시관과 이곳에서 선보이는 캐스트 아이언 조각 연작이 똑같은 이름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상설 전시관 개관을 맞아 뮤지엄 산 전관에서 그의 전시 <드로잉 온 스페이스(Drawing on Space)>가 펼쳐지고 있다. 새로 만든 전시관뿐 아니라 기존 전시관 3곳에서도 11월까지 전시가 열리는 것. 조각 7점, 드로잉과 판화 40점, 설치 작품 1점 등 총 48점을 선보이는 국내 최대 규모의 안토니 곰리 개인전이다. 그는 이 전시가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세 가지 작업으로 구성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올빗 필드 II(Orbit Field II)’, ‘리미널 필드(Liminal Field)’ 그리고 지난 40년간 제작한 드로잉이 그것. 이 연작은 ‘그라운드’를 위한 일시적 보완이며, 관람자에게 시간·빛·공간과의 관계를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무대를 제공한다.

“‘그라운드’는 전통적 전시관이 아니라 ‘열린 경험의 장소’입니다. 기존 건축은 땅에서 떠오르는 존재지만, 이곳은 맥락에서 분리되지 않고 지면에 자리 잡은 인공 동굴이지요. 상설 전시관은 호기심 많은 인간은 물론이고 빛, 비, 눈, 바람, 다양한 생명체와 같이 인간을 초월한 자연에도 열려 있습니다. ‘그라운드’는 귀와 눈 같은 일종의 감각기관으로, 우리가 지구적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라운드는 내부 지름 25m, 천고 7.2m, 지름 2.4m의 원형 천창을 갖춘 돔 형태의 공간으로, 뮤지엄 산의 플라워 가든 아래 위치한다. 동그란 천창으로 태양 빛이 들어오며, 이탈리아 로마 판테온 4분의 3 규모에 달하는 웅장함을 지녀 감탄을 자아낸다. 플라톤의 동굴이 떠오르는 이곳에 그의 독창적 캐스트 아이언 조각 ‘그라운드’ 7점이 흩어져 있기에, 관람자는 공간의 울림을 느끼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곳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협업해 만든 전시관이기에 더 뜻깊다. 두 거장이 만들어낸 불꽃 튀는 시너지 효과로 이곳은 우리나라의 새 랜드마크가 되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존경합니다. 우리는 둘 다 로마 판테온을 깊이 애정하죠. 판테온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우리가 현재 시간과 공간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원형적 건축이라는 점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작가 인생 50년 중에서 가장 도전적인 프로젝트가 안도 다다오와의 협업이었다고 말했다.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건축 협업은 오랫동안 꿈꾼 일이었기에, 두 거장의 물리적 거리는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안토니 곰리는 수직과 수평의 건축적 문법을 적용해 신체 형태의 작품을 만들어왔으며, 건축은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대인 대부분은 도시에 살기에 그는 우리의 몸을 하나의 장소라고 정의했다. 더불어 건축이 우리의 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털 없는 동물이고, 뇌를 사용해 끊임없이 피난처를 발명해왔습니다. 지금은 인류 대부분이 도시화된 환경에 살고 있죠. 우리가 세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세계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사회에서 서식지 없이 독립적으로 행동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나머지 전시장 세 곳에도 그의 작가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을 만날 수 있다. 1전시장의 ‘리미널 필드’는 주얼리 작가 데이비드 루푸이에와 함께 만들었다. 2015년부터 3년간 만든 이 연작은 비눗방울처럼 덧없는 형상을 금속으로 재현한 조각이다. 거품의 꼭짓점을 활용해 인간의 공간을 형상화했으며, 전시장에서 움직이는 관람자와 상호작용을 하며 공간 드로잉이 완성된다. 그간 이 작품을 보여줄 완벽한 공간을 기다려왔는데, 뮤지엄 산에서 마침내 보여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안토니 곰리는 전한다.

2전시장에서는 1984년부터 2024년까지, 그가 지난 40년 동안 카본, 목탄 등으로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심지어 피로 그린 작품도 있다. 과거의 주요 조각 작품과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한 드로잉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다. 그에게 그림과 조각은 각각 어떤 의미일까. “조각은 물질적 사유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이나 벽 없이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으며, 세상을 묘사하기보다는 직접 변화시킬 수 있죠. 조각은 상상력을 물질화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드로잉은 물질적 사고의 첫걸음이며, 매일의 경험이 뿌리 내리는 수단으로서 나에겐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매일 그림을 그립니다.”


곰리의 대표 조각은 스스로의 몸을 캐스팅해 작가 자신과 같은 신체 사이즈를 캐스트 아이언으로 만든 작품이다. 자신의 몸에 석고를 바른 후 굳혀 틀을 만들고 이에 금속 재료를 부어 완성하는 방식인데, 인간이 경험하는 몸의 느낌을 관람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사용한 것이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들지 않는데, 납으로 만든 몸의 껍데기에서 시작해 그 안의 빈 공간을 실체화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작가의 몸을 본뜬 몰드를 사용하지 않고 디지털 스캔을 활용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차이를 인식해 픽셀을 물질화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전시에 선보인 ‘그라운드’와 ‘리미널 필드’ 연작도 모두 작가의 신체 사이즈 크기의 작품이며, 이런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말부터는 내 몸을 본뜨는 것보다 스캔이 더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방법 같아서 이를 적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도구를 활용해 그것이 지닌 가능성과 한계를 성찰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예술은 진화의 징후이자 촉매입니다. 나는 디지털 도구를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재료로 받아들였어요. 산업혁명 이후 디지털 혁명이 도래했고, 두 흐름이 지금 우리의 공간을 결정짓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사회를 성찰하고 예술로 끌어들이고 싶습니다.”

작업을 하기 위해 그는 전통 조각 기법과 현대의 첨단 기술을 결합하며, 기술은 진화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고 여긴다. 2017년에는 천체물리학자와 VR 작품을 만들었으며, 보이지 않는 가상 공간과 가상 작품을 만드는 디지털 시대이기에 실물 조각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는 미래의 예술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갖고 있을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구의 근본 시스템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첨단 기술을 조화롭게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을 얼마나 빠르게 받을 수 있는가입니다. 우리도 동물입니다. 인간의 지각은 몸에 의존하며, 그 몸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질과 에너지의 끊임없는 순환 속에 존재하지요. 우리가 고유의 ‘동물성’을 잊고 사이버 공간의 환영에 몰입하게 될 수도 있기에 가상 세계가 위험한 거죠.”
그는 영국 게이츠헤드의 랜드마크인 54m 대형 조각 ‘북쪽의 천사(Angel of the North)’(1998), 크로스비 해변에 영구 설치한 100개의 주철 조각 ‘또 다른 장소(Another Place)’(1997) 같은 야외 공공 미술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뮤지엄 산의 상설 전시도 공공 미술 성격을 띤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예술은 예술일 뿐 ‘공공 미술’이라는 용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예술은 공유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예술이 상품화되고 제도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며, 이전에는 누구도 예술이 사유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예술은 삶을 스스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예술은 우리의 경험을 탐사하고, 인식을 제고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강요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우리를 초대하는 것이죠.” 그는 겸손하게도 아직 예술이 뭔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예술을 지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한국과 인연이 깊다. 김대중평화센터와 함께 195km를 사이에 두고 남북이 마주 보는 2점의 날개 달린 조각 ‘폴스 아파트(Poles Apart)’를 설치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구상한 적도 있었다. 조각 1점은 서울중앙우체국 옥상에, 다른 1점은 평양의 다리 위에 설치하는 근사한 구상이었지만, 여러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현재 신안에서 진행 중인 ‘엘리멘탈(Elemental)’은 38개의 사각 공간 프레임이 교차하며 구성된 구조물을 비금도 해변에 설치하는 엄청난 스케일이다. 썰물 때는 관람자가 조각 안팎을 자유롭게 걸을 수 있다. 각 프레임은 사람의 몸과 비슷한 스케일을 지니고 있지만, 처음 마주할 때는 매우 추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산 정상에서 이 작품을 내려다보는 순간, 자신이 ‘몸 안’에 있었고 ‘몸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그의 작품이 세계적인 영향력이 있지만 이렇듯 늘 진행이 수월한 것만은 아니었다. ‘필드’ 작품을 사라예보의 폐허가 된 공간에 설치하려던 시도는 외교부의 반대에 의해 거절당했고, 남북을 마주 보는 조각 프로젝트도 여전히 실현하지 못했다. “예술에 대한 정치적 간섭에 비판적 입장입니다. 예술은 갤러리나 개인의 컬렉션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에 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각 작품 1점을 거리, 산, 해변, 건물 위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뀔 수 있어요.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과 장소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지난 50여 년간 신체와 공간의 탐구, 인간 존재를 고민해왔다. 그가 진정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계기는 3점의 조각 ‘땅, 바다 그리고 공기 I(Land, Sea and Air I)’(1977~1979)을 만들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물질이 정신이 되는 지점을 만들어낸 단순한 작품이었는데, 그는 아직도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생명의 기본 요소를 존중하는 것이 곧 지구와 대기의 본질적 연결을 성찰하는 길임을 깨달았다.

또한 1970년대 인도와 스리랑카 여행에서 불교를 발견한 것이 그의 삶과 예술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계기로 독실하던 가톨릭에서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불교 신자도 아니다. 불교는 존재 자체를 탐구할 수 있는 도구를 그에게 주었고, 이제는 어떤 조직화된 종교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로 우리를 이끄는 모든 길을 존중하게 됐다.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실천 철학이며, 내면을 성찰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요즘도 명상 수행을 즐기는 이유다.
8월에는 화이트 큐브 서울과 타데우스 로팍 서울 갤러리에서 동시에 개인전 <불가분적 관계(Inextricable)>를 가진다. 안토니 곰리의 전시를 세 곳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다. 도시가 만들어내는 자유와 제약,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예술을 통해 어떻게 탐구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려 한다. 우리가 도시의 그물망에 얼마나 얽혀 있는지를 성찰하며, 그 속에서 예술이 자유와 억압의 경계를 탐색할 수 있는지를 묻는 전시가 될 것이다.
“인간과 도시는 이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인간이 만든 도시가 다시 인간의 신체, 지각, 삶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전시에 소개된 작업은 이런 상호 구성적 관계를 진단하고 성찰하려는 시도예요.” 거장에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앞으로 장소에 뿌리를 둔 작품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각이 할 수 있는 본질적 역할을 더 분명히 수행하고 싶다는 것. 세상의 존재에 상상력을 더하고 싶다는 거장의 열정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소영(미술 전문 칼럼니스트)
- 사진
- STEPHEN WHITE & CO., LONDON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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