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봐도 지겹지 않고 노후하지 않는 건축” – 정현아 건축가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 미학과 실용, 사회적 책임의 조화로 도시 풍경을 바꾸고 있는 건축가들.

단순, 단아, 단단의 3단 건축가
정현아 디아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가 정현아는 내적 논리보다는 외부 조건에서 맥락을 찾고 이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도시와 역사, 형태와 재료, 구조와 에너지가 짜임을 이루는 것이 건축이라고 정의하며, 이를 관통하는 작업을 하고자 한다. 얼마 전 개관한 갈월동 민주화운동기념관이 그녀의 최신작이다. 요즘은 서울 종묘 옆 오래된 교회의 교육관을 작업 중이다. 춘천국민체육센터의 수영장 설계는 완공까지 2년여 남았다. 이렇듯 다채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지만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기다린다.
건축 사무소 20주년을 축하한다. “진보적이며 지속 가능한 도시 건축 지향”은 2004년 설립 당시부터 지속해온 신념인가?
20년간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이 들면서 바뀌는 면도 있다. 꼭 이래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놨다. 융통성과 맷집이 생겼다. 컨셉 같은 개념을 가지고, 정확하면서도 새로운 실험을 하는 건축이 포커스였는데, 요즘은 현실과 개념은 다를 수 있지 싶다. 현실에서 잘 작동하는 것에 더 관심이 생긴다. 나처럼 개념이 강한 건축가가 있겠지만, 실제 건축물을 이용할 때 사용자에게 어필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제 사회에 좀 더 기여하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 근사한 건물보다는 의미 있는 사회적 건물을 짓는 기회를 기다린다.
자신을 건축가로 규정하길 좋아하지 않고, 두렵다고 말했다.
중견 여성 건축가의 수는 적지만, 지금 건축대학의 남녀 학생 비율은 같다. 여성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여성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가 정현아로 소개하고 싶다. 건축가로서 건축 작품과 괴리되고 싶지는 않다. 건축을 보면 그 사람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모든 예술품은 작가의 캐릭터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으냐는 질문은, 어떤 건축을 하고 싶으냐는 말과 같다. 오래 봐도 지겹지 않고 노후하지 않는 건축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단아하고, 단단해야 한다. ‘3단’이다. 단순하지만 우아함이 있는 그런 건축을 하려면 명쾌해야 한다. 모든 건축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과 건축주의 니즈를 단순한 해법으로 정리해, 단단하면서도 단아하게 표현해야 오래간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첫 건축의 의미와 근래에 완성한 건축은?
모든 프로젝트가 사실 다 첫 프로젝트다. 조건과 요구가 매번 다르기에 늘 새롭다.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것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사실 건축가로서 첫 번째 프로젝트는 평창동 신축 주택이었다. 최근 우연히 평창동에 다섯 번째 집을 완공했다. 이상하게 평창동과 신사동은 인연이 깊다. 14년간 사무실이 신사동 근처였는데, 근처 근린생활시설을 8채 이상 작업했다. 건축가로서 작업하다 보면 계속 인연이 되어 이어지는 공간이 생긴다. 하지만 공식적인 첫 프로젝트로 대전한의원을 꼽은 이유는 첫 작품이 대표작은 아닌 것 같아서다. 대전한의원은 건축주와 합이 잘 맞았다. 건축가가 전문가로서 프로젝트의 키를 잡되 건축주와의 대화 속에서 뭔가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으로 건축주를 닮은 건물을 만들었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무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건축이고, 건축과 사람이 닮아 있을 때 성공적이라고 느낀다.
대전한의원은 평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재료를 동시에 정한 프로젝트라서 흥미롭다. 편애하는 재료가 있나?
어떤 건축가는 같은 재료를 계속 쓰지만, 나는 먼저 정해놓지 않는다. 구조나 건물 형태도 하나를 정하고 다음 것을 결정하기보다는 오랜 고민 끝에 동시에 모든 구성 요소를 짜맞춘다. 한꺼번에 모든 결정이 이루어질 때 짜릿하다. 나는 비교적 재료를 다양하게 쓰는 편인데, 재료뿐 아니라 건축 성격을 모두 달리하고 싶다. 그 안에서 건축가 정현아가 느껴지길 바란다. 연기자가 다양한 역할을 하면서도, 배우의 정체성이 느껴졌으면 하는 마음과 같다.
직관적으로 설계하기보다는 책상에서 오래 뜸을 들여서 천천히 디자인한다.
설계 조건이 프로젝트마다 다르다. 어떤 경우는 땅이 특이하고, 어떤 경우는 땅은 평범한데 건축주 요구가 까다롭고, 법규가 특별한 경우도 있어서 해법 전략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체로 여러 문제를 입력해놓고 뜸 들이면서 동시에 해결하는 편이다. 그렇게 흐릿한 스케치를 여러 장 겹치면서 조금씩 결과를 만들어간다. 영감을 얻어 어느 날 갑자기 스케치가 나오지는 않는다.
건축 비엔날레 개최나 포럼 같은 건축 담론 형성에 관심이 많다. 대중이 건축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건축은 문화다. 우리는 문화 예술을 향유해야 하고, 담론이 형성되면 문화는 더 풍요로워진다. 영화나 소설을 이야기하듯 건축이나 도시 환경에 대해 얘기하면서 누리길 바란다. 그래서 이번 <보그> 기사가 건축가와 독자의 다리 역할을 해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좋아하는 건축과 건축가에 대해 논하고, 각자의 취향을 발견하길 바란다. 누구나 좋아하는 카페가 있듯 좋아하는 건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찾아가는 문화가 조성되면 좋겠다.
새로운 프로토타입을 제안하고 싶어 새 프로젝트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건축적 사고의 스펙트럼이 넓어졌
나?
모든 프로젝트가 다 새로운 컨디션에서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짜릿한 순간이 있었다. 건축주와의 궁합이나 공감대도 그렇고, 협력 업체와 시공자와의 소통에서도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지기에 늘 노력해야 한다. 클라이맥스는 완공이 아니다. 골조를 해체한 순간, 마감재가 아무것도 붙지 않은 구조체만 있는 그 순간이 절정이다. 특별한 순간은 과정 중에 찾아오거나 오지 않는데, 보통 순수한 골조 상태에서 마감재가 붙기 전에 경험할 수 있다. 건물 자체가 주는 짜릿함도 있지만 공간 사이즈와 자리 잡은 포석을 통해 완공 전에도 내 눈에는 결과가 이미 보인다. 상상한 완공이 구체화되어 큰 가닥이 잡힌 상태를 처음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설렌다.

대표작인 독수리학교와 민주화운동기념관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싶다.
땅을 보자마자 스케치를 떠올리는 건축가도 있겠지만 나는 고민하는 편이다. 건축가로서 맡았던 첫 프로젝트가 독수리학교 리모델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신관까지 지었다. 독수리학교는 대안학교라서 부지가 척박했다. 학생들이 쉬거나 운동을 하는 외부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발코니를 통해 서로 바라볼 수 있게 했고, 마당이나 선큰과 같이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시설을 많이 만들고자 했다. 관계는 서로 바라봐야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기념관에서도 보존 건물을 관람객이 어떻게 바라보게 할지, 새 건물과 오래된 건물이 어떻게 응시하게 할지 고민했다. 민주화운동기념관은 영화 <1987>에 나온 남영동 대공분실의 기념관이다. 대공분실은 보존해야 하는 역사적 장소이기에, 그 부지를 민주화운동기념관으로 만들면서 별동으로 기념관을 신축한 것이다. 워낙 중요한 사건 현장에 지었기에 주인공처럼 기념관 건물을 멋지게 하기보다는 자세를 낮추고 역사의 현장을 겸허하게 바라보는 프레임으로 설계했다. 얼마 전 오픈해 예약제로 운영 중이다. 사회적 상처가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기에 건축가로서도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초기에는 사무실 운영에 급급했고, 프로젝트의 기회가 대지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한편에선 사회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무감이 있었다. 사실 주택이라도 창문과 발코니가 있으니 행인을 신경 써야 하고, 타인도 30년 이상 그 건물을 봐야 하니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또한 건물을 짓는 것 자체가 엄청난 쓰레기를 만든다.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나머지 자재를 버려야 한다. 첫 프로젝트부터 땅을 파자마자 엄청난 쓰레기가 나오는 것을 보며 내가 지구에 나쁜 짓을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건물을 지으니 상응하는 좋은 건축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건축가의 사회적 책임은 다른 예술가에 비해 크다. 건축은 여러 사람이 같이 짓는 일이고, 인건비도 사회와 결부되며, 완공 이후에는 오랫동안 도시와 함께한다. 건축가는 건축을 통해 자기표현을 하지만, 예술가라기보다는 의사와 비슷하다. 아픈 곳을 치유하는 의사처럼 문제를 해결하고 보이는 물건을 만든다. 그래서 건축가는 오랜 수련이 필요하다. 생명을 다루는 것만큼 건축은 중요하다. 인명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고, 잘못 지으면 평생 사용자가 고생한다. 아름다움까지 동반해야 하는 작업이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글
- 이소영(미술 전문 칼럼니스트)
- 사진
- 김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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