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만든 디저트 같은 드라마 ‘폭군의 셰프’
<폭군의 셰프>(tvN)는 타임 슬립, 퓨전 사극, 로맨틱 코미디, 요리 쇼 등 여러 흥행 요소를 결합한 드라마다. 청와대 셰프가 타임 슬립 해서 조선 시대 중전의 몸에 빙의한다는 <철인왕후>를 연상시키는데, 주인공 셰프를 여성으로 설정해 로맨스 요소를 강화했다. 웹소설 <연산군의 셰프로 살아남기>가 원작이고 <바람의 화원>, <뿌리깊은 나무>, <홍천기>, <밤에 피는 꽃> 등 사극 흥행 경험이 많은 장태유 PD가 연출했다. 배우의 개인기를 십분 활용한 코미디라는 점에서는 그의 전작 중 <별에서 온 그대>와 겹쳐 보인다. 임윤아 특유의 깔끔한 코미디 연기가 <폭군의 셰프> 초반 시선을 잡아끈다.

<폭군의 셰프>는 주인공 연지영(임윤아)이 프랑스 요리 대회에서 우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부상으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일할 기회를 얻은 지영은 기쁜 마음으로 귀국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그런 지영에게 프랑스로 건너가 있던 조선 시대 요리책 <망운록>을 가져다줄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지영이 개기일식 도중 비행기 안에서 <망운록> 첫 문장을 읽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연모하는 그대가 언제인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의 곁에 돌아오기를”이라는 문장이 주문이 된 듯 연지영은 조선 시대 폭군 연희군(이채민) 앞에 뚝 떨어진다.
자신이 사극 촬영장에 불시착해서 ‘극한의 컨셉충’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지영과 그런 지영이 요망한 ‘귀녀’라고 여기는 연희군 사이에서 한동안 옥신각신이 벌어진다. 연지영은 영화 <공조>와 <엑시트>, 드라마 <킹더랜드> 등에서 임윤아가 연기한 현실감이 느껴지는 밝고 씩씩한 캐릭터의 연장선에 있다. 다만 연지영은 요리사로 일하며 갈고닦은 눈치, 순발력, 리더십, 자신감이 더해져 한결 성숙하다. 500년 전 남성이자 절대 권력인 임금과 선명하게 대조되면서 비등하게 충돌할 수 있는 캐릭터다. 임윤아는 편안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로 타임 슬립 판타지 로코의 허술한 구멍을 자연스럽게 메운다.

연희군은 연산군을 모티브로 한 가상의 임금이다. 지영이 당도한 시점은 연희군이 도성 인근에 사냥터를 만든다며 주민들을 몰아내고, 간신 임송재(오의식)를 앞세워 대대적인 채홍을 실시하면서 민심이 흉흉해진 때다. 지영은 저명한 사학자의 딸이고, 연희군 시대 궁중 요리를 공부해서 그 시대를 잘 안다. 한자도 곧잘 읽는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 상황과 인물들을 빠르게 파악한다. 그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펼치는 처세술은 사극 팬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어머니를 살해한 정적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폭정을 펼치던 연희군이 지영으로 인해 변화하는 과정도 기대된다. 이채민은 권위적이고 잔인하지만 지영 앞에서만은 장난기가 동하고 마는 연희군의 모습을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임윤아와의 어울림도 좋다.
간신의 대명사 임숭재에서 따온 임송재, 장녹수를 모티브로 한 강목주(강한나), 제안대군을 변형한 제산대군(최귀화), 영화 <왕의 남자>에도 등장했던 광대 공길(이주안) 등 여러 인물의 암투와 모략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으니, <폭군의 셰프>는 비장한 정치극와 멜로드라마의 성격도 띠게 될 것이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매력은 요리다. 연희군은 역사에 미식가로 기록된 인물이고, 연지영은 요리에 자부심이 넘치는 실력 있는 셰프다. 첫 만남부터 아웅다웅하던 그들은 음식을 통해 가까워진다. 연희군은 지영이 밥을 떠먹여주는 순간 죽은 어머니를 떠올린다. 결국 그는 달아나려는 지영을 잡아다가 대령숙수로 임명하고는 매일 다른 요리를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천일 야화’가 아니라 ‘천일 야식’이다. 아직 고추가 도입되기 전이라 지영이 해준 매운 요리에 사람들이 곤혹스러워한다거나, 지영이 질긴 고기를 한지로 싸서 수비드하면서 원리를 해설하는 장면처럼 대놓고 요리 쇼 시청자들을 유혹하는 대목이 이 드라마에는 많다. 또한 지영이 궁중 숙수가 꿈인 절대 후각의 소유자 길금(윤서아)과 맺는 관계, 텃세 부리는 수라간 숙수들을 휘어잡는 과정에서는 직업물의 매력도 느낄 수 있다.


<폭군의 셰프>는 잘 만든 디저트 모둠 같은 드라마다. 영양가를 떠나 눈과 혀가 즐겁고 자꾸만 손이 가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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