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드라마는 끝내 인생이 된다, ‘은중과 상연’
“아 근데 사건이 없어. 그냥 여자애 둘이 지지고 볶다가 절교했다, 그게 다예요.”

<은중과 상연>(넷플릭스) 1화. 극 중 드라마 작가이자 화자 류은중(김고은)은 천상연(박지현)과의 관계를 드라마로 써보라는 PD의 말에 이렇게 예고한다. 말마따나 <은중과 상연>은 13화 동안 여자 둘이 지지고 볶다가 절교하고 남은 2화에서 화해하는 얘기다. 하지만 그 ‘지지고 볶는’ 과정의 정서적 파장은 장르물의 ‘사건’ 못지않게 강렬하다.
<은중과 상연>은 여성 이성애자들의 우정에 담긴 복잡미묘한 성질을 집요하게 관찰한다. 가볍게 손이 가는 드라마는 아니지만 일단 보고 나면 여운이 오래가고, 작은 복선이 곳곳에 숨어 있어 여러 번 다시 관람하고 싶어진다. 덕분에 공개 2주 차 화제성이 첫 주보다 74.1% 증가했다.

주인공 은중과 상연은 초등생 시절 처음 만났다. 우유 배달하는 어머니(장혜진)를 따라 고급 아파트에 영업하러 간 은중은 그 집 자녀가 쓸 방에 ‘너는 참 좋겠다’라고 적은 스티커를 붙이고 나온다. 그 부러움의 대상이 상연이다. 상연은 이삿날부터 자신의 어머니(서정연)에게 오빠와 방을 바꿔달라고 조른다. 욕심이 많은 아이다. 우유 배달하는 싱글맘의 딸 류은중과 화장실 2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전직 장관의 손녀 천상연은 곧 같은 반이 된다. 은중은 예쁘고 똑똑하고 인기 많고 뭐든 잘하는 상연에게 반해버린다. 정작 상연은 자신에게 결핍된 공감 능력을 지닌 은중이 부럽다.
어린 시절 은중과 상연 사이에는 3명의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교사인 상연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부재를 부끄러워하던 은중을 위로해줌으로써 은중의 은사가 되었다. 정작 상연은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 대신 가출한 자신에게 공짜로 밥을 먹여준 은중의 어머니에게서 따뜻함을 느낀다. 상연의 오빠 천상학(김재원)은 은중의 첫사랑이다. 상연은 자신에게는 말도 없고 웃지도 않는 오빠가 은중에게만 밝은 게 거슬린다.


은중과 상연이 10대부터 서로에게 품은 감정은 비슷한 듯 다르다. 은중은 상연을 동경한다. 청소년기에 책, 영화, 음악 등 문화적 자극에 처음 눈뜨게 해준 인물은 각별한 의미로 남는 법이다. 은중에게는 상연 남매가 그런 존재였다. 극 중 언젠가 은중은 “상연이 옆에 있으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평범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러나 은중은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고 자기만의 길을 찾는, 말하자면 자아가 단단한 사람이다. 반면 상연은 은중을 질투한다. 상연은 자신이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에 관심이 큰 사람이고, 은중은 그의 결핍감을 자극하는 존재다. 상연은 높은 자존심과 낮은 자존감의 충돌 때문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물이고, 공유하는 추억과 인물이 많은 은중은 그가 유일하게 기댈 곳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이 차이가 은중과 상연의 오랜 애증을 만들어낸다.
10대 시절 잠시 친하게 지내던 은중과 상연은 천상학의 돌연한 죽음 후 왕래가 끊긴다. 은중은 대학에 가서 첫사랑과 이름이 같은 김상학(김건우)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잠적했던 상연이 갑자기 은중 앞에 나타난다. 은중과 상연, 그리고 김상학은 자주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연인 사이에 상연이 낀 형국이다. 그러나 죽은 천상학의 비밀, 은중과의 공백기에 상연이 겪은 일들, 상연에게 김상학이 어떤 의미인지 등이 드러나면서 시청자들은 상연을 미워하기가 어려워진다. 훗날의 비정한 모습에 비하면 이때의 상연은 나름대로 페어플레이를 하면서 은중에게 의리를 지키려 노력한다. 결정적으로 박지현의 눈을 떼기 힘든 매력, 섬세한 연기가 상연을 연민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김고은이 이미 ‘믿고 보는 배우’이고 이번에도 그 명성에 제대로 값했다면, 박지현은 의외의 존재감으로 발견의 기쁨을 준다.


대학 시절 파국을 맞은 은중, 상연, 상학은 사회인이 되어 영화판에서 다시 만난다. 은중과 상연은 공동 프로듀서가 되어 경쟁하고, 상학이 촬영감독으로 합류하면서 삼각관계가 재현된다. 영어덜트 시절까지의 노스탤지어에 비해 이 대목부터 드라마는 차가워진다. <은중과 상연>은 수십 년에 걸친 두 여성의 미묘한 우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2017)와 비교된다. 그런데 문화, 예술에 대한 주인공들의 애정과 그것이 인물들에게 미치는 영향, 끝내 그것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의 특징, 계급 선망과 결핍, 성공 의지가 있는 여성 사회인이 처한 환경과 행동 방식, 영화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담긴 <은중과 상연> 후반부에서 이 드라마의 고유한 매력과 창작자들의 진가가 드러난다. 송혜진 작가는 <인어공주>(2004), <아내가 결혼했다>(2008), <협녀, 칼의 기억>(2015), <해어화>(2016), <달콤한 나의 도시>(2008),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2018) 등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오래 활동했다. 조영민 PD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와 <사랑의 이해>(2022~2023)에서 예술, 계급 등 외부적 요인과 애정의 상호작용을 예리하면서도 운치 있게 연출한 바 있다.

<은중과 상연> 서두와 결말은 조력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 모든 우여곡절을 겪고 수년간 갈라섰던 은중 앞에 말기암 환자인 상연이 나타나 스위스 조력사 여행에 따라가달라고 한다. 은중은 상연을 밀어내지만 화려한 성공이 무색하게 여전히 혼자인 상연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은중과 상연은 수많은 시청자들의 소감처럼 ‘호구와 쌍년’이었을까?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어거지도 쓰고 그러는 거야”라는 은중 어머니의 말을 수긍해야 할까? 현재 시점 은중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그저 김고은이 샤넬 앰배서더라서 결정된 장식일까, 아니면 은중에게 다른 소중한 존재가 있다는 의미일까? 어쨌든 드라마는 두 여자의 우정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결국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아무리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지만 아직도 대중은 찬찬히 음미하며 행간을 더듬고 싶은 영상물에 ‘소설 같다’는 표현을 쓴다. 이 드라마가 그런 평을 듣고 있다. 그 행간에서, 대중은 저마다의 사색을 얻을 것이다. 섬세한 심리와 긴 서사를 지닌 이 같은 인물을 연기하는 건 모든 배우의 바람이겠으나, 이번에는 그것이 김고은과 박지현이라 다행이었다.

<은중과 상연>은 <폭싹 속았수다>와 더불어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에서의 K-콘텐츠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활용할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여자 둘이 지지고 볶는 15부작 드라마가 성공할 수 있다면, 흥행 공식과 어긋난다는 이유로 우리가 외면해온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계속 발굴해봐도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은중과 상연>을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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