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오는 주먹을 끝까지 응시하는 사람들의 세계, ‘아이 엠 복서’
‘복싱 서바이벌 쇼’라니, 누구나 선뜻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는 아니다. 복싱 인구 자체가 적을 뿐 아니라 1:1 체급제 종목이라는 한계 때문에 이를 응용해서 다양한 게임을 만들어내기도 어려울 것 같고, 스포츠 채널이 아닌 tvN이라면 격투기의 잔혹성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청자도 많을 듯하다. 그런데 첫 2주를 지켜본바, 이런 기우는 잊어도 좋겠다. <아이 엠 복서>(tvN)는 여러모로 넷플릭스 <피지컬: 100> 시리즈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데, 그만큼 스펙터클하면서 그보다 순정한 매력이 있는 고퀄리티 스포츠 예능이다.

<아이 엠 복서>의 구심점은 단연 마동석이다. 그는 배우,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자신을 독보적인 액션 스타로 각인시킨 브랜딩의 귀재다. 한편으로 그는 액션 연기에서 자주 복싱을 응용하고 현실에서 복싱 체육관을 보유한 복싱 애호가다. 또 체력과 유흥이라는 스포츠 예능의 두 축을 아우르는 가장 아이코닉한 스타이자, 복싱 쇼의 호스트로서 부인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인물이다. 쇼 초반부터 그는 절대 권력을 발휘한다. 첫 게임이 1:1 복싱 대전이었는데, 호스트인 그가 경기 시작과 종료, 성패를 결정했다. 그 과정에서 마동석은 수선스러운 해설 대신 신중하고 매서운 눈빛, 과묵한 태도로 쇼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박빙의 승부에서는 “이 선수들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이유로 무승부를 선언하기도 한다. 복싱에 미친 남자, 진지한 프로모터, 자신의 명성을 복싱 중흥에 활용하고 싶어 하는 슈퍼스타. 마동석의 이번 캐릭터는 단연코 그가 영화와 드라마에서 맡은 어떤 배역보다 섹시하다. 그것이 쇼의 훌륭한 무게중심이 되어준다.
쇼의 첫 게임은 왜 ‘복싱’인가라는 질문에 완벽한 답을 제시했다. 참가자 90인은 프로와 아마추어 복싱 챔피언부터 각종 격투기 선수, 생활 체육인까지 다양한 경력을 아우른다. 하지만 대개가 복싱 기본기를 익힌 상태여서 이 스포츠가 모든 격투기의 근본이라는 인상을 준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땅에 (복싱 관련) 단체가 너무 많다. 프로 복서라고 스파링을 해보면 MMA 아마추어만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종합 격투기 선수 설영호의 인터뷰는 소속, 체급, 연령 등의 제한을 해제하고 최강자를 가리겠다는 쇼의 명분을 부연한다. 그 설영호가 전 복싱 라이트급 한국 챔피언 권오곤에게 패한 것은 역설적으로 이것이 복서가 주인공인 ‘복싱 쇼’라는 것을 증명한다.

1차전 1:1 대결은 시간제한을 두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경기 시간을 단축시켜 쇼의 긴장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호스트와 제작진의 재량으로 슬로우 스타터 타입의 선수에게는 탐색을 끝내고 제 실력을 발휘할 때까지 시간을 더 주어서 시청자들이 복싱의 다양한 매력을 체감할 수 있게 했다. 스포츠 예능의 모델이 된 <피지컬: 100>과 비교하자면, <피지컬: 100>이 참가자의 진을 빼는 장기전으로 인체에 경이를 느끼게 한다면 이쪽은 짧은 경기 시간, 실전 격투로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면서 각 참가자의 전략, 스피드, 파워, 투지를 가독성 있게 전시한다. 1차전은 그 자체로 엔터테이닝하거니와, 복싱 문외한들에게 이 종목의 관전 포인트를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훌륭한 쇼케이스가 되어주었다.
1:1 격투만으로는 블록버스터 예능을 구성하기에 단조롭고, 저중량 선수들이 들러리로 전락해 쇼의 추진력이 떨어진다. 2차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제작진의 숙고가 드러난다. 펀치 스코어로 대전 팀 결정권을 나눠주는 2차전 사전 경기는 복싱이라는 테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시청자들이 체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선수들의 능력치를 제시해서 몰입감을 높이는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2차전 본경기는 팀전으로, 60kg 샌드백 100개씩을 구조물에 걸어두고 자기 팀에 할당된 모든 샌드백을 먼저 떨어뜨리는 쪽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샌드백이 매달린 후크 끝에 요철을 두는 간단한 설계로 팀내 저중량 선수와 고중량 선수의 역할 배분이 게임을 좌우하게 만들었다. 역시 복싱이라는 테마를 유지하면서 다양한 전략이 개입할 여지를 주어 시청자의 간접 참여를 유도한 것이다. 이쯤 되면 참가자들의 퍼포먼스뿐 아니라 제작진이 복싱을 어디까지 응용할 수 있느냐가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된다.
<아이 엠 복서>의 또 다른 매력은 참가자들의 다양한 서사다. ‘한국 복싱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데, 프로 복서도 라운드당 대전비가 10만원에 불과하다는데, 이 사람들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의문을 곱씹다 보면 선수들의 퍼포먼스가 한결 진지하고 숭고해 보인다. 여타 스포츠 예능에서 경험할 수 없는 절실함이 느껴진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복싱을 시작한 다문화 가정 자녀, 한때 국내 챔피언이었으나 은퇴한 복서,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끝없이 진정성을 의심받는 장혁, 줄리엔 강, 윤형빈 등의 사연이 응원을 유도한다. 전국체육대회 복싱 금메달리스트 국승준처럼 의외의 꽃미남이 눈길을 끌기도 한다. 말하자면 <아이 엠 복서>는 정통 격투기, 예능, 전략 게임, 투지 넘치는 인간 드라마의 매력을 두루 느낄 수 있는 블록버스터 버라이어티 쇼다.

무엇보다 이 쇼는 정면으로 날아드는 주먹을 끝까지 응시하면서 다음 동작을 계산하는, 고도로 훈련된 진정한 싸움꾼들의 무대다. 아름답고 통쾌하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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