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에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비엔나에서 시간은 혼재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한 장식 옆에 사진 대안 공간이 들어서고, 19세기 예술 혁명의 건축 유산에서 21세기 미술학도들이 커피를 마신다. 올드 앤 뉴가 공존하는 비엔나에서 불변은 우아한 겨울뿐.

11월 말 눈 내리는 비엔나. 입김을 불며 호텔 자허(Hotel Sacher) 로비에 도착했다. 바로크와 아르누보풍 가구, 붉은색 실크 벽지와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샹들리에 아래에서 로로피아나나 브루넬로 쿠치넬리를 입을 법한 콰이어트 럭셔리 부류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는 적어도 이 호텔에서만큼은 패딩을 꺼내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객실에 들어서니 19세기 귀족의 침실이 강림한 듯한 네오클래식 인테리어 사이로 전통 회화가 걸려 있고,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조용히 탁자를 비춘다. 3단 트레이의 애프터눈 티가 준비되어 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백발의 신사가 흰색 장미를 한 아름 안고 웃는다. 가시만 제거한 채 잎사귀를 그대로 살린 튼튼한 줄기의 장미가 꽃병에 자르르 펼쳐진다. 나는 이 분위기에 젖어버려 휴대폰으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 아다지에토를 튼다. 창문을 여니 그가 지휘자로 섰던 빈 국립 오페라극장이 보인다. 이 기분은 짐을 풀 때 조금 깨지긴 했다. 부츠와 슬리퍼 말고 구두도 가져올걸. 붉은 대리석의 조식 레스토랑에선 긴 테이블보가 슬리퍼를 감춰주길. 다행히 막스마라 마누엘라 코트를 챙겨 왔다. 여행할 때면 짐을 최소한으로 하자는 주의지만, 마지막까지 망설인 한 벌이 있어 다행이다.


이 도시는 우아해지기로 마음먹은 순간 한껏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나는 마차를 예약했다.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마칠 때쯤 유리창 너머로 마부와 두 마리의 윤기 나는 말이 기다리고 있다. 말발굽의 경쾌한 소리에 맞춰 몸이 흔들리고 차창으로 오페라극장, 시청, 빈 국립대학 등 화려한 건축물이 스쳐 지나간다.
겨울이라 일찍 해가 지는 오후 5시. 호텔로 돌아오니 입구에 줄이 길다. 자허 호텔 내 카페에 입장하기 위해 추위를 불사한 이들이다. 열에 아홉은 파티시에 프란츠 자허(Franz Sacher)가 1832년에 만든, 초콜릿과 살구 잼이 겹겹이 쌓인 자허 토르테(Sacher-Torte)를 주문할 것이다. 눈이 떠지는 진한 맛이다. 그의 아들이 1876년 가문의 이름을 따서 자허 호텔을 열었고, 늘 프렌치 불독과 다녀서 불독 여사로도 불렸던 안나 자허가 이곳을 소셜 메카로 만들었다. 왕궁이 갑갑한 왕세자부터 존 F. 케네디 같은 정치인과 연예인 등이 비엔나에 올 때면 머물렀고, 존 레논과 오노 요코가 1969년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1층에는 관련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호텔 매니저 빅토리아 레히너(Viktoria Lechner)는 유명 인사들의 사인을 수놓은 실크도 펼쳐 보인다. “이런 오브제가 너무 많아서 다 개켜놨다니까요.”

다음 날 아침에는 기운을 얻고 싶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튼다. 누구는 유난이라 하겠지만, 이 곡을 들으며 도나우강을 산책한 뒤 오후에는 비엔나 로컬, 그러니까 비에니스(Viennese)인 가이드 제바스티안(Sebastian)을 만날 거다. 그는 화려한 바로크 양식이 즐비한 1구가 아니라 ‘리틀 파리’로 불리는 9구로 초대했다. 예부터 프랑스인이 많이 거주해 파리 스타일의 아기자기한 카페가 많은 곳이다. “쇤브룬 궁전처럼 유명 관광지도 좋지만, 이곳의 리히텐슈타인 정원 궁전(Gartenpalais Liechtenstein)처럼 한적하게 관람할 수 있는 숨은 명소를 추천해요.” 부호였던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때때로 머물던 세컨드 하우스다. “그들의 놀라운 사치품만 봐도 하루가 다 갈 거예요.” 우리는 추위를 녹이려고 작은 카페의 문을 연다. 하긴 춥든 덥든 쾌청하든 비에니스는 카페에 들르지만 말이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이었던 비엔나는 예술가, 철학자, 작가와 시민들이 카페에 머물며 교류하고 창작하고 쉬었으며, 그 패턴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비에니스는 하루에 카페를 얼마나 자주 가나요?”라고 물었다. 그가 웃으며 말한다. “커피 하우스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죠. 작가 페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는 집이 아니라 카페에서 우편물을 받을 만큼 오래 머물렀어요. 저도 크게 다르지 않고요.” 내가 비엔나에서 들른 카페에는 철해놓은 신문이 입구에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신문을 보거나 체스를 두고 오후의 당 충전을 하고 있었다. 물론 구스타프 클림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등이 들렀다는 유명한 카페에는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 있는데, 그곳 말고도 어느 동네 카페든 특유의 사랑방 분위기에 매료될 것이다.

비엔나의 고풍스러운 우아함이 인상적이라고 했더니, 그는 비엔나야말로 ‘올드 앤 뉴’라고 회답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도 멋지지만 구시대에 반기를 든 젊은 세대의 전복과 예술운동이 ‘뉴’를 구축해왔다는 것. 그가 예를 든 비엔나 분리파(Vienna Secession)의 흔적을 찾아 나서기로 한다. 보수적인 미술계에 반기를 들며 구스타프 클림트, 콜로만 모저(Koloman Moser),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 등이 1897년 비엔나 분리파를 결성했다. 이들은 모든 생활 영역이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작은 그릇부터 가구, 건축까지 모두. 내가 가장 매료된 건축가는 “아름다움의 전제 조건은 쓸모”라고 말한 오토 바그너(Otto Wagner)다. 비엔나에는 그의 건축물을 찾아다니는 사설 투어도 많다. 1906년 완공한 우정저축은행은 당시 외면받던 자재인 알루미늄, 유리, 강철을 사용해 모더니즘 건축을 완성했다. 은행 창구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예술대학과 카페 익스체인지(Café Exchange)가 있다. 오토 바그너의 하이라이트인 천창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미술학도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나도 슬쩍 합류해본다.

비엔나 분리파의 첫 전시회는 대성공이었고, 이 자금을 바탕으로 멤버였던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가 전시장을 설계했다. 황금 모자를 쓴 듯한 비엔나 분리파 전시관에서 한 층 내려가니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가 벽을 따라 펼쳐진다. 그림 아래엔 벤치 소파만 놓여 있고, 나머지는 텅 비었다. 관람객 한 명이 꿈쩍 않고 앉아 있다. 이 순간 여기는 ‘클림트 명상실’이다. 오후에는 레오폴트 미술관(Leopold Museum)의 비엔나 분리파 특별전을 이어 관람한다. 에곤 실레가 그린 비엔나 분리파 포스터가 눈에 익어 짚어보니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전시로 내한한 작품이다. 그때와는 다른 느낌인 이유는 이곳이 비엔나여서일까.


다음 날, 동시대를 보낸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뮤지엄을 찾는다. 그가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 50년 가까이 머물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비롯해 각종 이론을 정립한 곳이다. 내원한 환자들이 기다리던 대기실에 조용히 앉아본다. 옆방에는 프로이트가 상담하던 커다란 책장과 늘 몸에 지니던 바쉐론 콘스탄틴 회중시계가 놓여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정신세계는 저런 고풍스러운 기념품을 갖고 싶다는 욕구로 뻗어나간다. 냉장고 자석이나 스노우볼이 아니라.

그런 내게 비엔나 관광청의 마티아스 슈니들(Matthias Schwindl)은 경매 하우스 도로테움(Dorotheum)을 추천했다. 300여 년 전 설립된 이곳은 비엔나를 필두로 파리, 런던, 브뤼셀, 프라하 등 유럽에 지점을 두고 있다. 내 예산이 미미해 부담스러웠지만, 실제로 이곳을 캐주얼하게 찾는 관광객이 꽤 많아 보인다. 19세기 회화부터 컨템퍼러리 아트, 앤티크 소품, 보석, 시계, 도예, 악보, 우표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하는 데다, 현장에서 보고 바로 구매할 수 있는 구역이 있다. 한국에서 온라인 경매에 참여할 수도 있다. 19세기 초 만들어진 소서 세트가 500유로라고 쓰여 있다. 품목마다 가격표가 바로 보여서 편리하다. 내향인으로서 일일이 물어보기는 어려우니까. 이곳에서 20여 년간 근무한 도리스 크럼플(Doris Krumpl)은 갈수록 큰 가구보다 작은 소품에 관심이 커진다고 말한다. “점차 개인화되고 이동이 잦아지기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죠.” 오후에는 지난 3월에 개관한 포토 아르제날 빈(Foto Arsenal Wien)에 들른다. 사진 영상 매체를 젊은 시선으로 소개하는 곳이다. 응용미술을 다루는 MAK 뮤지엄에서 헬무트 랭 전시도 본다. (비엔나는 트램과 지하철이 잘되어 있어 다행이다.) 디자이너가 은퇴하면서 아카이브를 전 세계 뮤지엄에 기증했는데, 그중 일부가 여기에 있다. 19세기 찻잔에서 21세기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까지, 비엔나에 있으니 하루에도 올드 앤 뉴를 자주 오간다.

식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페스코테리언인 나는 전통 음식 슈니첼 대신 채식 전문 레스토랑을 찾아다녔는데, 비엔나는 채식에 진심이었다. 티안 비스트로(Tian Bistro)의 채소 코스도 가볍게 즐기기 좋고, 미쉐린 3스타인 슈타이레렉(Steirereck)의 디너 역시 예약이 힘든 것 빼면 완벽하다. 그곳에서 메뉴마다 다른 마리아주를 선보이는 오스트리안 화이트 와인의 다양한 성격에 빠져들면서 창을 내다본다. 공원 슈타트파르크에 눈이 오고 있다. 오늘밤, 이 도시의 올드 앤 뉴에 공평하게 눈이 쌓일 것이다. VK
- 피처 디렉터
- 김나랑
- 포토
- COURTESY OF WIENTOURISMUS, PAUL BAUER, CHRISTIAN STEMPER, PETER RIGAUD, JULIUS HIRTZBERGER, HOTEL SAC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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