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보그 연애소설] 김초엽의 ‘총체적 사랑의 감각’

2026.02.10

[보그 연애소설] 김초엽의 ‘총체적 사랑의 감각’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총체적 사랑의 감각

Pexels

은재가 처음에 그 모임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좀 희한하다고만 생각했다. 보통 이별한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구질구질하고 애잔하고 불행하고 세상이 다시 한번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들 특유의 감정이 요동치는 비참한 눈빛 아닌가. 그런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결의에 찬, 다소 절망하고는 있지만 그보다 뚜렷한 의지가 빛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로 애인에게 다시 애걸복걸하거나 매력을 키워 정면 승부를 건다거나 다른 사람으로 아픔을 잊거나 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들의 전략이야말로 희한했다. 이들은 애인을 직접 ‘복구’하려고 모여들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건가요? 그래서 폐쇄된 서비스를 복원하려는 거고요?

-아이참,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조사 좀 하고 오시면 안 되나? 우리가 쓴 글이 인터넷에 널려 있는데. 아, 맞다. 이상한 댓글 달려서 블로그 닫아두긴 했는데···

은재는 꿰맬 보(補) 자를 쓰는 로맨스 에이전트 ‘보’가 유행하던 때를 기억했다. 처음에 ‘보’는 로맨스에 도사린 여러 함정, 예를 들면 숨겨둔 폭력 성향이나 기만, 로맨스 스캠과 같은 악성 사용자를 거르는 탁월한 알고리즘에 힘입어 사업을 확장했다. 그런데 지금 이곳, 폐쇄된 서비스 ‘보’를 복원하려는 사람들의 말은 달랐다.

-‘보’의 매력은, 상대와 나를 더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데 있어요. 로맨스 에이전트 ‘보’는 상대가 홍콩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우아, 저도 그런 영화 완전 좋아해요!”라고 말해보라는 식으로 조언하지 않는다. ‘보’는 사용자와 상대를 치밀하게 분석해서 두 사람의 화학작용이 절묘하게 일어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상대가 만약 영화를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조금은 반대쪽에 있는 사람에게 끌리고, 약간 빈정거리는 걸 좋아한다고 해보자. 에이전트 ‘보’는 사용자의 비꼬는 말투와 취향을 반영해 슬쩍 조언을 건넨다. “으음, 그거 재미는 있었는데. 근데 혹시 폭력적인 거 좋아해요? 쓸데없이 피 튀고 그런 거?” 상대의 미간이 찌푸려질 것이다.

‘뭐야, 좀 무례한 사람이네?’

하지만 ‘보’는 상대가 약간의 무례함과 선을 넘는 태도에 열렬히 끌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그 몹쓸 규제 때문에 ‘보’가 없어졌을 때, 저희는 눈물을 머금고 잠시 헤어지기로 했어요. 대화가 즐겁지 않은 거예요. 스파크가 튀지도 않고요. ‘보’는 우리 사이에 쌓인 시간과 추억을 이해하고, 변화하는 우리의 상황과 성격까지 반영해서 이 관계를 돌봐줬거든요. 딱 일주일 더 지내봤지만 상대가 더는 제가 사랑하던 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걸 알아버렸어요.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저는 언젠가 윤성 씨를 다시 만날 거예요. 그게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죠. 자가 복원에 성공한다면 그날이 그 사람과 재회하는 날이겠죠?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요···

은재는 ‘윤성 씨’가 아닌 ‘윤성 씨’와 ‘보’가 합쳐진 존재를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그런데도 윤성 씨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건 또 어떤 느낌인지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진실하게 사랑해봤고, 그래서 직관적으로 그것이 여전히 사랑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린 이걸 총체적 사랑이라고 불러요. 사실 우리 몸에는 자신의 세포보다 미생물이 훨씬 더 많다는 거 알아요? 체내 미생물은 건강과 성격뿐 아니라 성적 기호까지도 바꾼대요. 그러니까 윤성 씨는 어차피 윤성 씨와 미생물의 총합인 거죠. 하지만 제가 그 사실을 끔찍하게 생각해서 ‘으악, 난 당신의 대장 미생물까지 사랑하는 게 아니야. 제균 작업을 하고 와야 당신을 순수한 윤성 씨로 인정해주겠어!’라고 하면 이상하지 않겠어요? ‘보’도 그런 존재인 거죠. 저에게는 ‘보’가 없는 윤성 씨가 오히려 윤성 씨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그러니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돌려받기 위해, ‘보’를 복원해내는 수밖에요. VK

김초엽 은 포항공과대학교에서 화학 학사,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인문사회학부 특임교수로 임용됐다. 2017년 <관내분실>과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으로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대상 및 가작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등단했다.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SF 소설을 쓰며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 소설집 <방금 떠나온 세계>와 <행성어 서점> 등을 집필했다. 2025년 4년 만에 세 번째 소설집 <양면의 조개껍데기>를 출간했다.

“우리 연애할래요?”

김나랑

김나랑

피처 디렉터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고 매번 배웁니다. 집에 가면 요가를 수련하고 책을 읽고 아무도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더보기
류가영

류가영

피처 에디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이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본능적인 패션 감각을 타고난 화가, 소설가, 영화감독, 셰프에게 매력을 느낍니다.

더보기
피처 디렉터
김나랑
피처 에디터
류가영
김초엽
사진
Pexels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