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치우 프라다의 아주 특별한 미술관

패션 못지않게 예술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려진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 그동안 그녀가 모은 예술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 밀라노에 오픈했다.

영화관으로 변신할 미술관 공간에서 포즈를 취한 미우치아 프라다와 그녀의 남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이동식 벽으로 야외 영화 감상도 가능하게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영화관으로 변신할 미술관 공간에서 포즈를 취한 미우치아 프라다와 그녀의 남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이동식 벽으로 야외 영화 감상도 가능하게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1월 어느 오후, 나는 밀라노의 버려진 철로 변 부지에 새롭게 짓고 있는 거대한 복합 문화 단지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미우치아 프라다를 만났다. 밀라노의 옛 출입문 너머 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이 단지는 밀라노의 거대한 쇼핑 지구에서 걸어서 갈 만한 거리는 아니다. 이곳에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에 위치한 프라다 플래그십 매장(1세기 전 미우치아의 할아버지 마리오가 가죽 제품 사업을 시작한 곳)의 흑백 대리석 광택을 전혀 볼 수 없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은 양조 공장 부지에 세워진 이 새로운 공간은 대부분 회반죽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그곳은 살짝 손을 본 상태에서 양조장 본래의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문화 단지의 핵심은 미우치아의 친구이자 종종 협업을 하고 있는 건축가 렘 콜하스가 지은 세 채의 완전히 새로운 건물이다. “그건 ‘아름다운 오브제’가 아니에요. 그에게나 우리에겐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패션 디자이너가 아름다움을 피한다고 말하는 건 반어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우치아 프라다(예쁘지 않으나 매력적인 그녀의 디자인은 20여 년 전 번개처럼 멋쟁이들을 강타하면서 그녀의 회사를 세계 럭셔리 시장의 꼭대기에 올려놓았다)가 독특한 신념과 용기로 지켜온 접근 방식이다. “제게 중요한 건 아이디어예요. 아름다움은 부차적이고요”라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것은 오래전 정치학 박사를 받은 부르주아지의 반항적인 딸에게 딱 어울리는 신조다. 그녀는 프라다 재단(Fondazione Prada)이 영구적으로 들어서게 될 그곳을 “보다 빠르고, 보다 신선하고, 보다 즉각적이고, 보다 실험적인 곳”이라고 홍보했다.

우리는 베르가모에 위치한 프라다 본사 그녀의 사무실 회의 탁자 옆에 앉았다.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유리 책상은 전면 유리를 통해 잔디가 깔린 발코니를 지나 실리오 이탈리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근처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는 책과 정기간행물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오브제는 바닥에서 솟아오른 에어컨 관처럼 보이는 물체 쪽으로 열리는 유리 출입문이었다. 사실 이 관은 누군가(가령 미우치아 프라다)를 눈 깜짝할 사이에 책상에서 안뜰로 순간 이동시킬 수 있도록 디자인된, 아티스트 카르스텐 횔러의 맞춤 제작 금속 미끄럼틀이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커다란 ‘미끄럼틀과 사다리’ 게임을 연상시키는 사무실의 주인에게 어울리는 절충적인 방식으로 옷을 입고 나를 맞이했다. 우아한 갈색 프라다 드레스와 그 위에 걸친 네이비 블루 브이넥 스웨터, 아쿠아마린 색상의 돌로 장식된 두껍고 투박한 금색 목걸이, 그리고 하이힐 샌들(그때가 한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종종 반짝이는 콘크리트 홀에 울려 퍼지는 달가닥거리는 소리를 통해 그녀가 사무실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직접 만나본 그녀는 위트 있고, 호기심 넘치고, 수다스럽고, 적갈색 머리에 음모가 가득한 아코디언 같은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여성이었다. “모든 사람이 우리와 작업할 때 마음을 활짝 엽니다. 가장 까다로운 사람들도요. 오히려 아주 까다로운 사람들이 그런 경향이 있어요”라고 그녀는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모든 걸 용서하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 거한 식사가 끝났을 때 이태리 엄마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럴 때면 미우치아는 두 개의 최고 레이블(그녀는 1993년 미우미우를 설립했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기보다 불손한 아웃사이더처럼 보인다. 그것은 럭셔리 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맡기엔 기이한 역할이다. 많은 사람에게 패션은 형태와 컨셉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의미한다. 패션의 목표는 아름다움이지만 그 독창적인 날카로움은 지적인 두뇌 게임에서 비롯된다. 기대에 대한 저항, 옛날식 비유와 새로운 소재의 생산적인 공존. 그녀의 감각은 지적인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다. 공산주의자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녀는 1988년 자신의 첫 기성복 컬렉션을 선보인다. 그것은 “약간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위한 유니폼”으로 알려졌다. 그 옷들은 럭셔리 시장의 전통적인 화려함을 천박하고 과시적이라고 생각했던, 자아실현에 성공한 잘 교육받은 세대의 지지를 받았다. 보통 섹시하다는 건 몸매를 의식하고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럭셔리는 종종 고루한 화려함과 동의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미우치아의 옷들은 자신감과 절제를 내뿜었다. 옅은 핑크색 펜슬 스커트에 화려한 모피를 입는 뻔뻔함 같은.

지난 5월 9일 드디어 공개된 미술관의 모습. 고전주의 조각상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웨스 앤더슨의 감각으로 그야말로 ‘프라다풍’으로 꾸민 카페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84년에 선보인 프라다 륙색을 생각해보라! 최고급 가죽 대신 소박한 검정 나일론으로 기발하게 디자인된 이 가방은 작은 백팩을 일종의 신분의 상징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녀의 스타일이 발전함에 따라 그녀의 의상도 전통적인 럭셔리 색상에 반항했고, 종종 키치한 척하는 패턴에 당시 인기 없던 연두색과 건축 현장의 원뿔에 사용되던 오렌지색을 사용했다. 프라다 브랜드는 다른 브랜드보다 앞서,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엔 자의식 강한 노스탤지어와 기발한 미래주의가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오늘날 그 영향은 레드 카펫에서 힙스터 아지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졌다(이 하우스의 최근 기성복 컬렉션은 디지털 패턴에 60년대 활기를 떠올리게 하는 컬러와 재단을 접목시켰다). 미우치아가 런웨이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대형 스크린에 서 해온 바즈 루어만은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한 플래퍼 드레스 디자인을 그녀에게 맡겼다. 프라다는 여러 예술 스타일이 혼합된 포스트모던한 아이디어를 패션에 적용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많은 선구적인 예술가들이 그녀를 사랑한다. “이제 막 프라다 매장에 갔다 왔어요”라고 사진작가 신디 셔먼은 얼마 전에 말했다. 미우치아의 오랜 친구인 그녀는 컬렉션이 사라지기 전에 한정판 아이템을 사려고 소호 매장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저를 정말  편하게 해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프라다 의상에서 받는 느낌이기도 하다. 아티스트 프란체스코 베졸리(포스트모던한 ‘쁘띠 푸앵(petit point)’ 자수로 유명한 프라다의 절친한 친구)는 그녀를 ‘아주 재미있고’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친구라고 묘사한다. “우리는 늘 예술, 정치, 문화, 사랑, 일, 패션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눕니다. 다행히 우리가 함께 일한다고 해서 우리의 대화 소재가 고갈된 적은 없어요”라고 베졸리는 말한다. 그는 두 사람의 취향이 특별히 닮았다고 말하지 않지만(“그건 오바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오, 나는 대통령과 비슷해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그녀의 다재다능함을 존경한다. “저는 예술가와 예술가 조합이나 디자이너와 디자이너 조합에는 흥미가 없어요. 저는 자신의 분야에서 다른 분야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이런 에너지는 이달 출판되는 멋진 사진집 <프라다스피어(Pradasphere)>에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는 프라다의 전작이 연대순으로 포괄적으로 실려 있다. 디자이너로서, 특별 프로젝트의 기획자로서, 그리고 재단을 통한 새로운 대변자로서 그녀의 활동 말이다. 그녀의 방대한 작업을 보면 그녀가 자신과 비슷한 지적 능력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보다오랫동안 미술관의 매력에 저항해왔다는 게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학창 시절 그녀는 영화, 춤, 무용에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 작품을 많이 볼수록 그녀는 그것에 더욱더 매료되었다.

할아버지의 브랜드를 물려받은 직후인 1978년에 미우치아 프라다는 한 무역 박람회에서 파트리치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라는 고집 세고 다혈질인 공장 주인을 만난다. 그는 그녀가 회사를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자마자 백을 뛰어넘어 그녀의 관심을 슈즈와 옷으로 넓히라고 권했다(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디자이너를 고용하겠다고 그녀를 들들 볶았다).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했다. 현재 그들은 장성한 두 아들의 부모이며, 밀라노와 알프스와 시칠리아 해안에 있는 집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초기에 미우치아는 엘리세오 마티아치와 니노 프란키나 같은 아티스트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것만큼이나 그들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1993년 그녀와 베르텔리는 프라다밀라노아르테(PradaMilanoArte)라는 전시 공간을 오픈했다. 그곳에서 마티아치, 프란키나, 그리고 나중에는 데이비드 스미스의 조각을 선보였다. 이 세 아티스트는 특히 그녀가 신뢰하던 사람들이다. 한편 그녀와 베르텔리는 미술사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일종의 자기 주도형 개론 강좌였던 셈이다. “우리는 중간부터 시작했어요. 50년대 무렵부터 말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절대 작품은 수집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하지만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면 자연적으로 사고 싶어집니다.” 그녀는 사과하듯 웃으며 말했다. 80년대말 그녀는 미술사 연구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고전으로 여겨지는 작품을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작품의 뛰어난 점을 알아볼 수 있게 됐다. 1995년 그녀와 베르텔리는 프라다 재단을 설립했다. 목표는 프라다밀라노아르테를 보다 방대한 기관으로 만드는 것.

“당시 아티스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었어요”라고 프라다는 말했다. 그러나 실험적인 새로운 작품을 위해 다른 갤러리들이 문을 열었기 때문에 프라다 재단은 역사적인, 혹은 ‘리서치’ 전시회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 프라다와 베르텔리는 구겐하임 큐레이터이자 아르테 포베라(작품을 직접 보거나 전시하거나 하지 않고 사진·도해·소묘·언어에 의한 묘사 따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예술의 한 형식) 운동의 시작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한 비평가 제르마노 첼란트(현재 아티스틱 디렉터)를 고용했다. “우리는 급진적인 이상을 공유하고 있어요”라고 첼란트는 설명했다. “패션은 변화를 기반으로 하는 언어예요. 그것이 제가 미우치아와 일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프라다 재단이 설립되고 처음 5년 동안은 그곳에 특화된 전시회와 아니시 카푸어, 루이즈 부르주아, 댄 플레빈, 그리고 로리 앤더슨의 설치 작품을 선보였다. 2000년대에는 희귀 영화, 혹은 잊힌 영화에 초점을 맞춘 영화 시리즈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태리 B급 영화의 왕들(Italian Kings of the B’s)‘과 ‘아시아 영화의 비밀스러운 역사(The Secret History of Asian Cinema)’ 같은 것들 말이다. 보다 최근에는 횔러, 토마스 데만트, 나탈리 뒤버그, 존 발데사리의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2011년에 프라다 재단은 베니스 대운하 옆에 있는 18세기 궁에 첫 상설 전시관을 열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미우치아는 이런 프로젝트를 자신의 런웨이 작업과 분리하려고 애썼다. “저는 점점 예술계의 일부가 됐어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 패션 디자이너의 위상을 높이고 싶진 않았습니다”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자부심을 느끼지만, 아티스트들의 도움을 받아 좋은 평을 받고 싶진 않았습니다.” 관심은 점점 커져갔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예술에 대한 인터뷰조차 하지 않았다. “제 본업을 가능한 한 크게 키우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 본업은 점점 쪼그라들었어요.”

 

프라다 재단이 문을 연 후 예술과 패션은 점점 더, 그리고 때론 우쭐거리며 충돌해왔다. 유명한 콜라보레이션들이 있다. 루이 비통과 작업한 무라카미 다카하시와 쿠사마 야요이, 지미 추와 롭 프루잇 등등. 지난가을 루이 비통 재단은 파리 불로뉴 숲에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한 아트센터와 전시관을 열었다. 그곳은 LVMH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지원을 받은 복합 문화 단지다. 럭셔리 재벌인 케어링 그룹의 프랑수아 피노가 문을 연 베니스의 유사한 공간인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의 뒤를 이은 셈이다. 예술은 패션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었다. 계절마다 변덕스럽게 바뀌는 패션에 영원히 변치 않는 기교의 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이런 경쟁이 미우치아를 짜증 나게 했다. 한 가지 예로 그녀는 경쟁적인 것으로 유명하다(“우리를 제외하고 마치 모든 사람이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라고 그녀는 불평을 했다). 또 다른 예로 그녀는 예술이 런웨이를 고상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이 되기 시작했다고 걱정했다. 그녀는 대중적인 접근성을 추구하면서 실수를 범하기 전에 먼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심사숙고했다. “고급문화는 너무 자주 소외됩니다”라고 그녀는 설명했다. 그녀는 전위적인 까다로운 실험주의를 유지하는 한편, 프라다 재단을 위한 보다 규모가 크고 보다 다채로운 공간을 만들면 박물관의 일반 관객들을 불러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플라스틱 에스프레소 잔을 멍하니 저으며 그녀는 말했다. “저는 제가 가진 도구를 사용했어요. 처음엔 패션을, 그다음엔 예술을 사용했지요. 저는 모든 것이 새로운 컨셉을 찾아내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전날 밤 안토니오 포가차로 거리에 있는 동굴 같은 홀에서 프라다는 새로움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선보였다. 2015년 가을 남성복 컬렉션 말이다. 런웨이는 방 여섯 개 사이의 회로를 통해 연결됐고, 각각의 방 가장자리에는 벤치가 놓였다(나는 이태리 <보그> 편집장 프랑카 소짜니 맞은편에 앉았다. 내 옆에는 모델이자 사교계 인사인 포피 델레빈이 앉아있었다.) 방 벽은 대리석의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검정. 반짝이는 알루미늄 사이에 세팅된 고전적인 모티브는 우주 공간을 연상시켰다. 약간의 여성복이 맛보기로 포함된 이번 컬렉션은 전통주의와 미래적 취향의 섬뜩한 혼합을 반복했다. 스니커즈와 옥스퍼드화를 결합한 듯한 슈즈와 반짝이는 셔츠는 전형적인 이태리 남성복의 스펙트럼을 관통했다. 밀라노 스타일의 빨강과 파랑 격자무늬로 디자인된 여성용 울 코트가 등장하기도 했다.새로운 문맥으로 대담하게 설정된 클라이맥스 의상이었다.

포가차로 거리의 이 공간 역시 최근까지 프라다 재단이 전시회를 열던 장소였다. 몇 년 전 미우치아는 임시 전시관으로는 점점 커져가는 재단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는 남편에게 물었어요. ‘미국, 중국, 러시아에 문을 여는 건 어떨까?’ 그러자 그는 대답했어요. ‘당신이 정말 그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밀라노에 만들자. 밀라노는 당신의 도시잖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저는 좋다고 했어요.” 전형적인 프라다식의 가벼운 약속이 대형 프로젝트로 바뀌었다. 미우치아와 남편은 가끔 아카이브 저장소로 사용되던 오래된 양조장을 용도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콜하스에게 의지했다. “저는 그의 사고방식을 좋아해요. 그는 기존에 있던 것을 거부합니다. 디자인할 때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타 건축가이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싫어합니다.”

처음에 콜하스는 주저했다. 그는 재활용된 산업 공간에 아트 갤러리를 여는 것은 진부하다고 걱정했다. “미우치아와 베르텔리에게 그런 진부한 공간을 하나 더 만들지는 말자고 얘기했어요”라고 그는 말했다. 그들은 오래된 양조장의 내부를 제거하거나(전통적인 미술관 이사회가 좋아하는 것처럼), 그것을 역사적인 오브제로 복원하는(이태리의 보존주의가 선호하는) 대신 건물 한 채를 교체하고, 일곱 채는 보존하고, 두 채를 추가하는 식으로 약간씩 변화를 주면서 미우치아가 “옛것과 새것 사이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을 창조했다. 그들이 그것에 대한 얘기를 끝냈을 때 콜하스는 재단 이사회의 일원이 됐다. “저는 이곳에서 다른 방향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봤어요. 유연성을 강조하기보다 다양한 환경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 말이에요”라고 그는 말했다. “건물 자체의 맥락이 있었지만 밀라노라는 맥락도 있었어요. 밀라노는 흥미로운 도시입니다. 1890년대 것도 있고 현재것도 있으니까요.”

라르고 이사르코에 새로 지어지고 있는 프라다 재단 단지의 건설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거대한 철강 고래의 배 속을 돌아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콘크리트 보강용 강철봉과 온돌코일을 설치 중인 일꾼들이 있었다. 그리고 겨울비로 인해 진흙이 모든 표면을 덮고 있었다. 콜하스가 디자인한 세 채의 새로운 건물은 형태, 소재, 분위기 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단기 전시회들이 열릴 유리와 알루미늄 거품을 입힌 전시장(그곳은 섬세한 작품을 위해 냉난방이 조절되는 공간이다), 날개처럼 바깥으로 열리는 벽으로 이뤄진 영화관, 그리고 자연 채광이 되는 갤러리 여섯 곳이 들어선 콘크리트 타워가 있다. 이 갤러리들은 그 형태가 직사각형인 동시에 삼각형이다. 이 건물에 있는 어떤 전시실도 비슷하지 않다.

0515-VO-WELL51-01

새롭게 오픈한 미술관에서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한 미우치아 프라다. “패션 하우스로서 프라다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다른 많은 것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요.”

우리가 현장 사무소에서 100분의 1로 축소한 모형을 살펴보고 있을 때 “그곳은 예술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예술이 도전받게 될 장소입니다”라고 콜하스의 건축 회사인 OMA의 수석 건축가 페데리코 폼피뇰리(Federico Pompignoli)가 설명했다. 그는 복합 단지를 연결하는 모든 인도가 표시된 바닥 평면도를 펼쳤다. 구불구불한 선이 꼬인 듯 보였다. 서로 다른 건물에서 열리는 전시회를 통일함으로써 미우치아와 동료들은 이 공간에 대한 방문객들의 경험을 지속적으로 바꾸길 원했다. 그들은 패션쇼를 위한 임시 캣워크를 추가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가장 힘든 도전은 절충주의와 규모에서 비롯된다고 그는 말했다. “당면 과제는 건물들이 데르비시(극도의 금욕 생활을 서약한 이슬람교 집단이 예배 때 추는 춤)처럼 함께 춤추게 만드는 거예요”라고 그는 말했다. 이 복합 단지는 도회적인 환경에서 힌트를 얻었다. 근처의 마구 뻗은 철로들은 VIP 옥상정원에 영감을 줬다. 단기 전시 갤러리의 유리창은 영화관까지 탁 트인 풍경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관의 벽이 밖으로 열리면 입구 통로에 서 있는 관객들은 복합 단지를 관통할 수 있을 것이다. “저의 희망 중 하나는 여러분이 재단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곳이 각기 다른 전시의 무작위적인 연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대화하는 세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라고 미우치아는 말했다. “그것이 정신분열증적으로 느껴진다면 그렇게 보이도록 의도됐기 때문입니다.”

5월 9일 새 재단 건물이 문을 연 순간, 재단의 과거 명성에 어울리는 작품이 공개됐다. 영화관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다른 영화의 어떤 부분에 빚졌는지를 다룬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처음 상영했다((예를 들어 펠리니의 <8과 1/2>의 타원형 구조물은 그가 참고한 많은 영감 중 하나였다). 표를 사지 않은 대중에게 개방될 박물관 앞쪽의 카페와 바는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이 20세기 중반 이태리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인테리어를 디자인했다. 그 외에 리셉션 구역과 함께 위층엔 도서관과 교육 센터도 자리 잡았다. 오래됐지만 24K 도금으로 새롭게 표면을 가공한 혼티드 하우스(유령의 집)는 한 번에 소규모 그룹 한 팀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최고의 전시회도 열릴 것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 중 하나와 이곳에 특화된 로버트 고버의 설치 작품 같은 것 말이다. 가장 중요한 개관 전시는 역사적인 전시회가 되었다. 전위적인 느낌의 박물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반전이다. 하지만 미래에 열릴 전시는 보다 젊은 떠오르는 아티스트들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수십 년간 이태리에 이런 수준의 박물관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기관의 설립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라고 베졸리는 말했다. “그것은 검정 코트도 없는 숙녀에게 14캐럿짜리 핑크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것과 비슷해요. 신념을 잃어버리고, 실업률이 엄청나고, 최근 몇 달 사이 서서히 믿음을 되찾기 시작한 나라에서 이 박물관은 이태리를 향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500년 전에 보다 일상적이었던 행위들을 떠올리게 하는 제스처입니다.”

재단의 새로운 건물을 방문하고 몇 시간 후에 나는 미우치아의 쉴 새 없는 지적 작업의 최신판을 보기 위해 포가차로 거리로 돌아갔다. 그것은 그녀가 신인 소설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획한 문학 낭독회였다. 세트는 남성복 컬렉션 무대 그대로였고, 관객 중 많은 사람도 그대로였다. 델레빈과 그녀의 연인은 눈을 크게 뜨고 다른 패션 스타들과 함께 계속 별자리가 바뀌는 우주 공간을 배회하고 있었다. 또다시 하이힐 샌들을 신은 미우치아는 즐거운 듯 보였다. 나는 이것(문학잡지 낭독회가 진행되는 내내 패션 피플을 모아서 조용히 앉아 있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장난스러운 아이디어라는 것을 깨달았다. 미우치아가 <프라다 저널(Prada Journal, 프라다 하우스의 아이웨어 라인과 느슨하게 제휴를 맺고 있는 문학잡지)>을 위해 개최한 두 번째 행사다. 심사위원단(인도 시인이자 소설가인 티샤니 도시와 아일랜드 작가인 칼럼 매캔이 포함된)은 전 세계에서 응모한 작품 중에서 수상작을 선정했다. 여기서 뽑힌 작가들은 안경을 낀 남자 배우들(안셀 엘고트, 마일스 텔러, 필리포 티미)의 축하를 받았다. 행사의 사회자인 데인 드한이 임시로 마련된 받침대 위에 서서 올해의 작가들을 소개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에 서 회화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미국인 애나벨 그래프가 <이 세상 끝에서 열린 졸업 무도회>라는 판타지 리얼리즘 소설로 수상했다. 다른 수상자들은 미겔 페란도, 알레한드로 모렐론, 그리고 야영지 접수 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이태리인 비올라 벨리나 등이다. 밤이 깊어가면서 그들의 작품을 반대편 받침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 서로 번갈아가며 낭독했다.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라고 나중에 그래프는 말했다. 그녀는 다른 모든 작가처럼 프라다를 입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이 상황이 꼭 10대 영화 같다고 농담을 했어요. 프라다에서 꽃단장을 한 다음 오늘 저녁 안셀이 제 소설을 낭독했으니까요.” 그 시각 높은 샌들을 신은 미우치아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그녀 주변 여기저기에서 작가들은 패션 피플들과 얘기를 나누고, 패션피플들은 배우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저는 항상 60년대나 20년대가 부러웠어요. 아이디어와 사람들과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한데 모여 무언가를 창조하던 시대 말이에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것이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거예요. 제가 찾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모든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저 자신을 포함해서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