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엔잡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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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엔잡러

2018-04-12T09:58:52+00:00 2018.04.12|

주도적 삶을 살고 싶어서 N개의 직업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위인전이 아닌, 자서전을 쓰고 있는 이들, ‘엔잡러’다.

홀터넥 보디수트는 막스마라(Max Mara).

요즘 뉴스에서 가장 많이 들은 신조어를 꼽자면, ‘워라밸’과 ‘소확행’이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일상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수확하는 삶.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비슷한 선망과 고민에 빠지곤 한다. 매년 연말마다 구입해서 보는 <트렌드 코리아 2018>은 “한국의 젊은 세대는 미래에서 현재로,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행복은 강도에서 빈도로” 가치관을 옮기는 중이라고 언급했다. 먼 미래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직장, 직업의 선택 또한 같은 맥락이다.

흔히 따질 때 좋은 직장의 조건은 급여, 복지, 근무시간, 조직 문화, 회사 규모 등이다. 그중에서 워라밸과 소확행의 삶을 지향하는 이들은 복지나 근무시간을 우선순위에 둘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가’를 맨 위에 두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이들을 오랜 기간 취재해왔다. 한번은 ‘홍대 앞에서 자신의 브랜드를 키워가는 청년’이란 주제로 자기 분야에서 ‘주인장(대표)’으로 활동하며 여러 직업을 동시에 갖는 ‘엔잡러(N잡러)’들을 만났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퇴근 후에 여러 프로젝트를 하며 갈증을 해소해온 홍진아(35세)도 그중 한 명이다. 그녀는 ‘관심 있는 것이 많은데 왜 한 가지 직업으로만 나를 설명해야 하지?’라는 의문에서 엔잡러가 됐다.

엔잡러라니. 5년 전만 해도 생소한 이 단어는 이제 꽤 익숙한 ‘직함’이다. 엔잡러는 여러 수를 의미하는 알파벳 ‘N’과 일을 의미하는 ‘Job’, 하는 사람을 뜻하는 ‘~er’의 합성어로 두 개 이상의 직업과 소속을 지닌 사람이자 그런 형태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투잡족은? 생계를 위해 일하는 투잡족과 달리 본인의 자아실현을 위해 여러 개의 직업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둘을 구별해서 부르곤 한다. 홍진아는 비영리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진저티프로젝트와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그룹인 빠티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활동한다. 엔잡러가 된 뒤 그녀는 해보고 싶었던 ‘시도’를 하며 일에 있어 재능과 재미를 찾았다. “엔잡은 일이 몇 개냐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 일을 내 서사를 중심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 내게 시간과 일의 주도권이 얼마나 생기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해요.” 엔잡러는 여러 직장과 직업을 갖는 게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평사원이 업무의 주도권을 갖기란 쉽지 않다. 해당 일에 대한 노하우와 조직에서 경력을 쌓아야만 가능하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0년간 매일 정확한 시간에 한곳으로 출근하던 세대가 있다. 베이비 부머 세대인 아버지는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몸담으셨다. 그의 직업관은 한 조직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과 연륜을 쌓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지가 중요했을 것이다. 나는 다르다. ‘가족 부양의 의무’, ‘미래에 대한 담보’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좋아하는 일인지 같은 자아실현이 우선순위다. 그렇기에 하나의 생계형 직업만 가질 수 없다.

내가 만난 또 다른 엔잡러 이희준(31세)은 전통시장 도슨트, 참기름 소믈리에, 어반플레이 콘텐츠 디렉터 등으로 활동한다. 국내에서 유일한 작업이라며 사명감이 대단하다. “현재의 업에서 인적 네트워크와 사회적 가치, 삶의 지혜를 얻고 있어요. 향후에도 가치 있는 여러 일을 병행하며 살고 싶어요.”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저자인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는 ”학습하는 모방 단계를 넘어 그 일이 나만의 동기와 사명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봐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엔잡러가 쉬운 길은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만난 이들은 엔잡러가 될지에 대해 오랜 시간을 들여 자기 검증을 거친 상태였다. ‘그 조직에 내가 맞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앞서 ‘나는 어떤 일을 하는 게 맞는지,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인가’ 등 자기 통찰의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그 후에 누구는 하나의 직업을 유지할 수 있고, 누구는 하고 싶은 바를 병행하기 위해 본업을 줄이는 선택을 해야 한다. 여러 일을 병행하기에 체력과 시간 안배에도 자신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근로조건을 스스로 작성할 수 있는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서야 한다. 홍진아의 경우, 진저티프로젝트와 빠티에서 동시에 스카우트를 받은 후 협의를 통해 일주일 중 2일은 전자에서, 3일은 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물론 쉽지 않지만, 엔잡러의 기본 가치인 주도적인 삶을 위해선 수반되어야 하는 조건. 만약 기존 직업이 엔잡러의 삶을 방해한다면 그것을 포기하거나 바꿀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만 엔잡러의 삶은 시간과 일을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수입, 휴가, 여타 보상 등에 대해서는 양보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강상중 교수가 ‘멀티 인재’에 대해 말한 적 있다. “주체적으로 활동을 조정하고 배치하고 책임지며, 변하는 환경에 맞춰 유연하고 즉각적으로 내 프로그래밍을 바꿔 행동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인재.” 이는 엔잡러를 수식하는 말이기도 하다. 엔잡러는 누군가의 위인전을 뒤척이는 것이 아니라 자서전을 차분히 기록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일에 대한 자율성과 독립성이 주어지는 삶을 점점 더 강렬히 원할 것이다. 그즈음엔 너와 나도 엔잡러가 되어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