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멋쟁이
패션 괴짜들로 가득한 패션 위크에서 진짜 멋쟁이를 찾기란 힘들어졌다.
이제 그들을 만나려면 갤러리로 가야 한다. 상상 초월의 재력에 세련된 감각까지 겸비한 예술계 멋쟁이들 속으로!
지난 11월 말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저택들이 즐비한 평창동 어느 골목에 경찰차가 요란한 불빛과 함께 멈춰 섰다. 가나아트센터 창고에서 열린 파티가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한 독립 매거진이 어느 사진가의 전시 오프닝을 위해 마련한 파티 음악이 고요한 주택가를 덮친 것. 철문 밖엔 제복 차림의 경찰들이 어슬렁거렸지만 지하 파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칵테일을 손에 든 채 몸을 흔들며 작품을 감상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예술 파티 풍경. 자타공인 서울 힙스터들이 죄다 모인 그곳을 지켜보던 이들 중에는 스웨덴에서 온 디자이너도 있었다. 아크네 스튜디오와 뉴욕의 디자인 회사 ‘바론&바론’에서 일하며 전 세계 온갖 쿨한 파티를 신물 나게 경험해본 그가 서울에서의 파티를 즐긴 소감은? “모두 옷을 너무 잘 입고 있어! 예술 파티가 아니라, 패션 파티 아니야?”
지금까지 옷 잘 입는 걸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들은 이른바 패션 피플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지 그들에게 필적할 만한 멋쟁이들이 출현했다. 패션 피플들이 보기에 ‘괘씸한’ 그 무리는 예술계에 몸담고 있거나 그 언저리에 머무는 이들이다. 패션 피플에 대항해 ‘아트 피플’이라 불러야 할까? 어느새 자기만의 스타일로 무장한 채 패션 피플들을 위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해외 아트 페어부터 독립 갤러리의 오프닝 파티, 또 한가한 삼청동의 갤러리까지. 신세대 아티스트들은 발렌티노 스니커즈를 신고 작업실에 들어서는가 하면, 큐레이터들은 셀린 펌프스를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갤러리를 오간다. 여기에 버킨 백과 에르메스로 무장한 수집가들까지.
이 새로운 흐름의 시작은 런던과 뉴욕, 마이애미 등의 아트페어에서 감지됐다(민첩한 해외 매체들은 이들을 주목한 지 오래다). 지난 몇 년간 영국 <보그>는 런던 프리츠 아트 페어를 찾은 멋쟁이들을 촬영했다. 덕분에 우리는 남편과 함께 포즈를 취한 피비 파일로와 프라다 코트를 입은 라프 시몬스를 구경할 수 있었다. 또 <WWD>
앤디 워홀과 놀던 시절부터 예술계와 패션계를 넘나든 칼럼니스트 글렌 오브라이언은 꽤 오래전 이런 품평을 미국판 <GQ>
그건 뉴욕과 런던, 마이애미에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연말에 줄이어 열린 서울의 몇몇 갤러리들의 전시 오프닝 파티에서 만난 예술계 사람들의 옷차림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11월 말 북촌의 갤러리에서 열린 주목받는 신인 작가의 오프닝 파티를 찾은 어느 디자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듯한 최고급 이탤리언 수트 차림의 갤러리 대표가 샤넬과 에르메스 백을 들고 전시장을 찾은 ‘따님’들에게 작가를 소개하느라 바쁘더군요. 그 곁에선 주인공 아티스트와 함께 유학한 친구들이 라프 시몬스의 아디다스 스니커즈에 릭 오웬스 무스탕을 걸친 채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죠.” 이튿날 열린 경복궁 반대편인 서촌의 갤러리에서 열린 가구 작가의 전시 오프닝도 마찬가지. 그곳에 초대된 모 화장품 브랜드 VMD는 이렇게 묘사했다. “더는 ‘예술’ 한답시고 넝마를 두른 채 작가주의를 온몸으로 외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질 좋은 블랙 코트에 로저 비비에 펌프스를 신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으니까요. 사실 수백에서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가구를 살 수 있는 컬렉터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물론 갑자기 예술계 사람들이 놀라운 패션 센스를 가지게 된 것은 아닐 거라고 어느 패션 홍보 담당자는 전한다. 12월 중순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를 축하하는 파티에 다녀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 유학을 통해 패션 감각을 터득한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친구들, 갤러리 직원들 덕분에 패션 지수가 자연스럽게 올라간 것 같아요. 게다가 이제 예술은 궁극적인 쇼핑의 대상이 됐어요. 제프 쿤스를 사려는 사람들에게 지방시 핸드백과 셀린 구두는 별다를 것도 없으니까요.” 아울러 예술을 바라보며 연마된 뛰어난 미학은 패션 센스로 연결된 것이다.
물론 모든 예술계 사람들이 패션에 목을 매는 건 아니다. 특히 서울의 젊은 아티스트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에 더 목말라 하고, 또 제대로 된 전시 공간을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문래동 커먼센터와 통인동 시청각 등 독립 갤러리에 모이는 젊은 아티스트들과 팬들에겐 멋 내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아닐 수 있다. 88만원 세대의 아티스트들에게 패션이란 먼 나라의 이야기. 그렇기에 이 멋쟁이 예술계 인물들은 일부 부유한 컬렉터, 유명 갤러리나 아티스트에 국한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처럼 빼입고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인증 셀카’를 찍은 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이 현상이 잠깐 머물다 떠날 유행은 아닌 듯하다. 이런 풍경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다면, 2월 리움에서 열릴 양혜규 전시, 대림 미술관에서 가을에 열릴 패션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 전시에 꼭 들러보기를! 한껏 멋 부린 아트 공작새들로 전시장이 가득할 테니까.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스탭
- ILLUSTRATION / JO YOUNG SOO
추천기사
-
Beauty
All of My Favorite Beauty
2023.03.27by VOGUE PROMOTION, 박채원
-
패션 뉴스
RM, 보테가 베네타의 새로운 ‘패밀리’
2023.03.30by 권민지
-
셀러브리티 스타일
드레스 입을 땐, 제니퍼 애니스톤처럼!
2023.03.30by 안건호
-
셀러브리티 스타일
헤일리 비버가 특히 아끼는 ‘기본 스니커즈’ 5켤레
2023.03.29by 안건호
-
패션 아이템
셀럽들이 장미가 핀 신발을 찾는 이유는?
2023.03.29by 윤승현
-
셀러브리티 스타일
봄나들이 패션을 위한 가장 안전한 선택
2023.03.29by 이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