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정우성은 정우성이다. 세월의 흐름과 어떠한 곡절에도 훼손되지 않은 거대한 명제다. 〈비트〉나 〈태양은 없다〉를 보면서 성인식을 치렀을 젊은 사진가 세 명이 〈아수라〉의 정우성에게서 포착한 풍경은 현재와 과거, 쇼 비즈니스와 현실의 가치를 넘나든다. 영화를 통해 외양과 정신을 가꾸고, 세상과 사회를 바꾸고, 이를 위해 연대하고자 하는 남자. 그렇게 정우성의 낮과 밤 그리고 시공간을 알 수 없는 어느 시절이 탄생했다. 그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동안, 세 남자의 이야기가 완성됐다.
<아수라>의 정우성
어떤 영화는 축제가 되기도 한다. 정우성, 황정민, 곽도원, 주지훈, 정만식, 믿음직한 배우들이 함께 출연하는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은 관객들에게도, 거나하게 한잔 걸치고 소년이 되어버린 아저씨들처럼 낄낄거리는 이 다섯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다섯 남자들은 제작 발표회는 물론이고 인터넷의 라이브 토크쇼, 급기야 <무한도전>에도 출연해 마음껏, 작정한 듯, 흥겹게 뛰어놀았다. 이들의 격의 없음은 얼마나 영화를 치열하게 찍었는지 방증하는 듯했고, 이들의 존재에서 출발한 기대는 또 다른 기대를 낳고 있다. 가을 초입, <아수라>라는 현상 한가운데서 정우성이 말한다. “기대감을 어떻게 하면 좀 낮출까 고민이 될 정도예요.(웃음) <아수라>는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몰입도가 센 영화예요. 관객들이 버거워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분명 2D 영화인데 감정 전달에 있어서는 4D처럼 느끼는 분들이 있더군요.”
다섯 남자들의 웃음 뒤에는 ‘안남’이라는 가상 도시의 핏빛 카니발이 있었다. 전매특허인 범죄 액션 영화를 들고 세상에 나온 김성수 감독은 제작 발표회에서 말했다. “남자들이 중년이 되면서 더 이상 내 꿈에 다가갈 수 없다는 걸 느끼니까 어떻게든 현재에서 생존하려고 하잖아요. 그 현실이 악이 난무하는 세계라 설정한 겁니다.” 살아남고자 서로 물고 뜯는 인간 군상들, 그렇게 악인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남자들. 한도경은 비정한 세계에서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별 볼 일 없는 악인이자 돌이킬 수 없는 필연의 매개다. 김성수는 “한도경은 더 큰 악, 더 잔혹한 악, 정당함을 가장한 악에 짓눌리다가 폭발하는 역할인데, 신사 같은 정우성이 이 역할을 해줘야 모두가 공유하는 인간 본성의 악함을 표현하기 쉽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한국형 고담 시티 같은 느낌이라고 했더니, 정우성이 덧붙였다. “그런데 거기에 배트맨이 없는 거죠. 조커도 없고.” 절대악보다 더욱 저열한 생존형 악인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은유하는 <아수라>는 이런 세상을 인정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비릿한 비애감으로 가득하다.
거친 남자 영화를 찍어왔지만 이 정도의 파이팅은 흔치 않은 듯한데요.
촬영 현장에서 밑바닥을 드러내고 끝까지 감정을 치열하게 주고받는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에게 신뢰와 애정이 쌓인 것 같아요. 물론 현장에서는 각자의 감정에 몰입해야 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기는 힘들어요. 특히 이번 영화 같은 경우는 감정의 밀도가 높습니다. 그런데 치열함 속에서 동료로서의 존중이 쌓였기에, ‘우리 이렇게 놀자’라고 작정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그 분위기에 자기를 맡길 수 있었어요.
‘밑바닥을 드러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너 왜 그래?’라는 말도 다양한 결로 표현할 수 있어요. 형식적 틀 안에서 분위기 전달을 위한 말로 던질 수도 있고, 침전물 아래 쌓여 있는 감정을 끄집어내기 위해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때도 있죠. 이번에는 감정의 밑바닥에 있는 말 한마디도 그냥 대사처럼 안 들리게 작업을 해야 했다는 점에서 매우 치열했어요.
다섯 분이 극 중에서는 서로 대립각을 세워야 했겠지만, 밖에서는 천진난만해 보였어요. 그 교감의 낙차도 드라마틱한 경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저는 나머지 네 분을 번갈아 만나야 하잖아요. 징그럽죠. 지치죠.(웃음) 계속 손님 접대해야 하는데 카메라 앞에서는 이것들이 나를 죽이려고 덤비고. “힘들지?” “형, 괜찮아요?” 해놓고는 촬영 끝나면 “소주 한 잔해야죠” 하면서 쉴 틈을 안 주고.
게다가 여간 기운 센 배우들이 아니지요.
황정민 형은 귀신 같고, 곽도원은 괴물 같고, 주지훈은 물 같은 친구고, 정만식도 자기 뚝심이 있고. 각기 다른 작품에서 나눌 만한 호흡을 한 작품에서 한 셈인데, 그들을 상대하는 다양한 리액션 때문에 오히려 덜 지쳤을 수도 있어요. 작정하고 치열하게 해야겠다 했는데 그들도 치열하게 받아주니 에너지가 살아났죠.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면 이 일이 부럽기도 해요.
배우라는 직업을 부러워하실 필요는 없는데,(웃음) 배우의 작업은 좀 재미있어요.
예고편의 내레이션으로 만난 목소리 톤과 느낌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기존에 알던 배우 정우성과 가장 멀리 가 있는 느낌이랄까요.
말투라는 건 그 사람이 그 환경에 적응하고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톤 앤 매너거든요. 어쨌든 한도경만큼 제가 이해하지 못한 캐릭터는 처음이었어요. 시나리오를 보는데, 나보고 이걸 어떻게 하라고 지금… 그랬어요.(웃음) 철석같이 함께 하자 해놓곤 이 양반은 왜 이런 애를 주인공으로 설정했을까? 했죠. 누구나 주인공에 대해 관습화된, 정형화된 틀 안에서 기대를 가지듯 나 역시도 그런 주인공을 기다린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반론도 제시하지 않고 ‘그래, 어떤 놈인지 찾아나 보자’ 했죠. 그래서 <아수라> 촬영을 불확실한 한도경을 찾는 여행으로 상정했어요. 도경이를 연기하기 위해 짚고 일어설 만한 지팡이라도 하나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톤과 목소리를 그렇게 설정한 거예요. 사람들이 아는 정우성의 말투와는 다른 스타일로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도전이었어요.
감독이 만든 한도경은 어떤 인물인지 정색하고 물어본 적이 없나요?
감독님도 정우성이 어떻게 한도경이 되는지 관찰하시는 스타일이라. 제작 보고 일지에도 “그 남자의 그림자를 쫓아 여기까지 왔다”라고 쓰셨더군요.
도경이 어떤 놈인지 이제는 좀 알겠나요?
가상의 도시 안에 온갖 부패와 부정을 저지르는 인간 군상들을 모아놓았지만 도경은 현실적인 메타포 안에 있는 그런 인물이에요. 모든 결정이 불확실하고, 판단을 내려도 후회하고, 이게 맞는지 계속 자문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죠.
이 영화가 본인에게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별해지고 싶다는 거예요. 그저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 하나로 선택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작업 과정 중에서 좋은 동료 배우들도 하나씩 붙었고 점점 특별해져야 할 만한 이유가 더해졌기 때문이에요.
<아수라>야말로 촬영 과정에서 진화한 경우겠군요.
그게 감독님의 스타일이에요. ‘이런 그림같이 그리자’ 던져둔 다음에 ‘여기에 어떤 색을 칠할까, 테두리는 무엇으로 하지?’ 하는 식으로 계속 질문과 대답을 찾아요.
그러다 보면 자칫 산으로 가지 않나요?
아니요, 얘기하고자 하는 키워드를 명확하게 갖고 있기 때문이죠. ‘뭐가 더 재미있을까’가 아니라 ‘뭐가 더 맞나’를 찾는 것이니까요. 오히려 날카로워지고 정교해지죠.
혼란에 빠진 악인을 연기하는 재미는 어땠나요?
얘는 재미없었어요. 어중간하게 나쁜 놈이 더 나쁜 놈들 사이에 끼어 살아나려고 바둥대다 보니 스트레스를 계속 받는 거죠. 도경이는 악한 인물이 아니라 악해지는 인물이에요. 악에 받치는 인물이죠. 사실 촬영할 때는 전혀 못 느꼈는데, 마치고 나니 ‘이 새끼, 정말 불쌍한 새끼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웃음)
영화에서 가장 상징적인 대사 혹은 장면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이런 대사가 있어요. “도경아, 너는 네 문제가 뭔지 아니?” 질문에 “네, 다 알아요. 문제가 많죠…” 문제 많잖아요, 요즘.(웃음)
배우 정우성
모르긴 해도,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현장에서 ‘김지운의 페르소나’ 두 명(송강호, 이병헌)과 함께 촬영하면서도 정우성은 “괜찮다, 나는 김성수의 페르소나니까”라고 당당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15년 만에 만난 김성수와의 작업에 “너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건 이 재회가 별 의미 없다는 게 아니라 그것만큼 중차대한 것이 있다는 책임감처럼 들린다. 어쩔 수 없이 정우성과 김성수 감독은 피차 소중한 존재다.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을 따라다닐 영화 <비트>와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이 직조한 건 ‘허랑방탕한 청춘’이 아니라 ‘시대의 청춘’이었다. 당시 사회를 지배한 세기말의 분위기는 우리 안의 욕망에 충실한, 전에는 보지 못한 청춘의 상을 만들어냈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오늘에 충실한 민과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우기 위해 싸우는 도철은 두 사람이 창조한 실로 아름다운 남자들이었다.
방황하던 청춘은 어느새 ‘형’이 되었다. 고백하자면 혹시 그가 ‘좋은 형’으로 남고자 하는 부채 의식에 악역을 회피하는 게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그가 <감시자들>에서 과묵한 킬러로 나와 떡 벌어진 어깨로 말을 걸 때, 이 ‘거친 남자의 순애보’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곡절에도 이상하리만치 훼손되지 않은 정우성 고유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청춘의 표상으로서의 그것에서 비롯된 것일 터, 그 이미지에 균열이 생길 수 있을 거라는 감정은 몹시 서운하기도, 매우 기대되기도 했다. 그 변화가 인 위적이지 않다는 건 가장 정우성다운 지점이다. 그는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이 되는 해에 특별한 이벤트 없이 그저 지인들에게 다이어리나 돌렸다고 했다. 정우성을 대체할 청춘을 찾는 것이 우리 몫이라면 ‘정우성은 정우성이다’라는, 실체보다 거대한 이미지를 극복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그래서 정우성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포효한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작가는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해야 하는 것을 쓴다”는 에코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작가’ 자리를 ‘배우’로, ‘쓰다’ 대신에 ‘연기하다’로 대치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수라>는 정우성의 합류로 비로소 시작된 영화라고도 볼 수 있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언젠가 감독님이 “진짜 하고 싶은 영화 할래” 하시기에 “그럼 해야죠” 그랬어요. 우리 관계는 굉장히 쿨해요. <비트> 전에 감독님이 다른 영화를 제시했는데, 너무 할리우드 영화 같은 시나리오라 “저는 이런 거 잘 못하겠는데요” 했어요. 보통의 감독들은 그런 경우 평생의 작업에서 저를 제쳐둘 거예요. 그런데 감독님은 바로 다음에 <비트>를 갖고 와서 “이건 너랑 해야 하지 않겠니?” 하셨고, 제가 바로 하겠다고 했죠. <태양은 없다>와 <무사> 때는 “감독님, 그건 저랑 하면 될 것 같아요” 했어요. 코드가 맞으면 바로 결정한 것 같아요. 물론 이후에도 시나리오를 보여주신 적 있는데, “감독님도 그거 하지 마세요”라고 막말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한 관계는 서로의 진심에 대해 의심이 없죠.
네, 의심하지 않아요. 요즘은 천만이라는 숫자가 1년에도 몇 번씩 빵빵 나와요. 영화의 가치가 작품성이나 스코어로 규정지어지기 마련이지만, 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그 안에서만 놀 수는 없어요. ‘한국 영화사 한가운데서 어떤 작품을 만들었다’는 직업인, 장인으로서의 본질에 더 충실할 수밖에 없으니까. 감독님과 작업할 땐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의심을 안 해요. 15년 만에 영화를 함께 하니 감독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얼마나 좋았겠어요. 첫 촬영 때 그러시더군요. “엊그제 촬영했던 것 같아.” 왜 15년 동안 딴짓을 했나 싶어요. 반성 아닌 반성, 서로에 대한 타박이랄까, 앞으로는 좀더 많이 하자, 했죠.
‘어떤 감독과 15년 만에 만나서 다시 함께 촬영한다’는 느낌은 어떤 걸까요?
이 작품만큼은 흥행도 어느 정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 부여에 도취되진 말아야지, 스스로 결심했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감독님도 정우성이라는 배우를 첫 번째로 생각하고, 감독님이 제게도 최고의 감독이라는 겁니다. 여러 방황의 시간 끝에 잘할 수 있는 장르의 영화를 갖고 나오셨으니 명성을 되찾으셨으면 해요. 부끄럽지 않은 결과물이라 자부하지만, 흥행 수치란 게 대중에게는 ‘걸작’ 혹은 ‘명작’이라는 단어와 비례하는게 현실이니까요. 제발 잘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어느 순간 배역의 폭이 좀 넓어진 것 같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작정하고 넓혀야지 한 건 아니에요. 그저 성향인 것 같아요. 음악을 들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한 장르에만 집중하지 않아요. 직업적 철학 안에서 배우로서의 의무나 책임감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게 되지 않았나 해요.
사실 한도경 정도의 악역도 좀 늦게 만난 거 아닌가요?
뭐, 그렇죠. 게다가 형사도 처음이고, 비리 형사도 처음이죠.(웃음) 제 역할이 형사인 줄 몰랐어요. 원래 어떤 배역을 작정하고 찾아다니기보다는 다음에는 어떤 디딤돌을 디딜까 열어두고 선택하는 편이에요. 물론 “경력이 있는데 20년이 넘도록 어떻게 형사 역할을 한 번도 안 했죠?”라고 하면 “그러네요”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늦었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 문제가 아닌 거예요. 또 하면 되고, 앞으로 절대 안 하거나 못할 수도 있고.
이정재와 함께 회사 ‘아티스트 컴퍼니’를 차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죠. 배우에 대한 철학이 묻어나는 이름인데, 어떤 배우가 좋은 아티스트라 생각하나요?
자기를 빨리 발견하는 사람. ‘우성이 형 보고 배우가 되려고 꿈꿨어요’ 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다행히 ‘정우성처럼 되고 싶어요’라는 후배들은 별로 없더라고요.(웃음) 선생한테 배운 연기를 하는 친구들이 저는 가장 안쓰러워 보여요. 참 재미없겠다… 서툴든 시간이 오래 걸리든 자기 건 자기가 찾아야 해요. 자기 방식을 표현해야 더욱 값진 배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자기만의 방식으로 필모그래피를 채웠지만 실패작도 많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훼손되지 않는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하더군요.
운이 좋았다?(웃음) 저는 흥행이나 평가에 대해서 굉장히 뻔뻔하게 귀를 막아요. 욕심만큼 안 되면 당연히 속상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오늘만 살고 죽을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었는지, 무엇을 내 걸로 만들었는지 등의 정확한 의미 부여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다 잘되는 작품만 할 수 있겠어요? 전 세계 어떤 배우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발리우드 배우 빼고.(웃음) 사실 영화인으로서의 직업의식은 상업적인 노출이 많을수록 많이 흔들려요. 그래서 저는 늘 분리시켰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똥개> 찍을 때 오히려 광고는 더 화려하게 차려입고 나가는 식이었죠.
<똥개> 같은 작품을 다시 할 생각은 없나요?
모르겠어요…(웃음) 만약 다시 한다면 그 추리닝은 벗을 것 같아요.(웃음)
그 추리닝보다는 그 흰 팬티가 더 충격이었어요.(웃음) <똥개> 때 정우성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평도 있었지만 ‘그 정우성’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은근히 많았죠. 대중의 이런 시각이 이중적으로 느껴지진 않나요? 그런 걸 여태 의식하지 않고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20~30대의 정우성이 관객들의 양가적인 바람의 균형을 잘 잡았다면 어땠을까 싶긴 해요. 이 캐릭터로 대화를 던졌을 때 관객들이 들을 준비가 되었는지에 관찰도 필요했던 거죠. 물론 여태도 그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웃음) 후배들에게는 그렇게 조언할 수 있겠죠.
왜 그렇게 안 했나요?
규정지어지는 것이 워낙 싫기도 했고, 욕심이 많아서일 수도 있고. 또 뱉은 말에 대한 약속의 의미도 굉장히 크게 생각했어요. <똥개>의 첫 버전은 가족적인 영화였어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그런데 시나리오가 확 바뀐 거예요. 그렇다고 도망가기도, 약한 모습 보이기도 싫으니까 한번 해봅시다, 한 거죠. 하지만 전 철민이를 연기할 때 재미있었어요. 한 번도 아버지와 그런 교감을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김갑수 선생님과의 연기가 참 좋았어요.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많은 걸 겪었어요. 영화계의 분위기가 그런 것처럼, 배우 정우성이라는 존재도 변화하지 않았을까요?
시대가 어떤 고민과 기쁨을 느끼고 있는지 체감하며 사는 건 배우에게 굉장히 중요해요. 하지만 늘 내가 중심일 수는 없어요. 이를테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한 거거든요. 오히려 지금 극장 가기가 편해졌어요. 어린 친구들이 즉각적으로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극장에서 영화 보는 건 제게 중요해요. 그때는 영화가 마냥 좋았고, 지금은 건전한 질투를 느끼고 싶거든요. 물론 애들이 없는 시간에 갑니다만.(웃음)
인간 정우성
노총각인 나의 ‘남자 (사람) 친구’는 “우성이 형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우성은 한국의 남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전통적으로 멋진 남자’로서, 그 존재만으로도 카운슬러 노릇을 해왔다. 남자들이 선망하는 그의 매력은 단순하다. 이젠 빛 바랜 미덕, 이를테면 헝그리 정신, 악바리 정신, 의리, 우정 등등. 하지만 ‘지금 정우성’의 진짜 미덕은 ‘댄디’인 것 같다. 책 <댄디, 오늘을 살다>에 표현된 것처럼, 특유의 우아함으로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정신의 귀족이 되는 법을 만들어내는 남자. 우아하다는 ‘심혈을 기울여 선택하다’는 동사의 뉘앙스를 띤 형용사이며, 우아한 삶은 수트 스타일이 아니라 행동하는 삶이다.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외양과 정신을 가꾸는 일, 나아가 세상과 사회를 바꾸고 이를 위해 연대하는 인간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댄디의 필요조건이라면, 적어도 그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몇 달 전 정우성은 <비정상회담>에 출연해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전 세계 11명뿐인 친선대사 중 유일한 한국 배우다. 홍보대사로 1년 동안 꾸준히 활동한 후 비로소 친선 대사 자격을 얻었고, 접근이 엄금된 내전 지역에 가기도 한다. 그는 SNS에 <아수라> 소식과 비슷한 비율로 지지 서명 독려 메시지를 남긴다.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는 건 배우로서의 인지는 포기할 수 있다는 결심이 있어야 가능해요. 하지만 전 사회 참여를 제안하고 싶어요.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겠지만요.” 넥타이를 매거나 지팡이를 짚는 방식에도 인생에 대한 남자의 소신이 담겨 있다고 했다. 낙관론과 비관론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종교처럼 활개치는 요즘, 재미만 추구하는 분위기는 (무게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를 깨뜨린다. 진지함은 인간으로서 지키며 살아야 할 최소의 것을 잊지 않게 하는 덕목이다. 남자의 얼굴은 자서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평소 젊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얻는 편인가요, 나이 든 분들에게 배우는 편인가요?
저는 사람을 나이로 구분하지 않아요. 누구든 하나의 인격체이자 현장에서는 동료이기 때문에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려고 하죠. 나이가 아니라 시대가 어떤 한 인격체를 만들어가는 거예요. 만약에 그들에게 장점이 있다면 시대가 그렇게 발전시켰을 테고 단점이 있으면 그들에게 그걸 강요한 거겠죠.
20대에는 어땠던 것 같은가요?
어릴 때는 지금보다 뭔가를 규정하기가 더 쉬웠던 것 같은데, 너무 싫더라고요. 그래서 존중받고 싶었고요. 어쩌면 내가 선택한 일이고, 그 길에서 저 자신을 보호하려는 의식을 발동한 것일 수 있어요. 왜 굳이 나를?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안다고? 왜 한두 번 보고 형이랍시고 갑자기 말을 막하지? 이런 것에 대한 반항심이 컸죠.
예의가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비슷한 맥락인가요?
누군가를 하나의 인격체로 발견하고 대하는 게 결국 예의인 것 같아요. 규정화된 사회 통념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카테고리로 구분 지을 수 없잖아요. 각각 개개인이 큰 개성을 가지고, 가능성도 다르죠.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절이 아닌가 싶어요.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다고 무조건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죠. 나이가 사람을 만들지 않더라고요.
촬영 모습을 보니 한결 젊어진 듯 보여요. 풍기는 뉘앙스가 달라졌다고나 할까요.
철이 안 들어서 그래요.(웃음) 인생이 계획적이지 못하고 자유분방하니까. 물론 누구에게나 인생의 굴곡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것 같아요.
한동안 길을 잃은 듯한 느낌도 있었어요. 나름대로 잘 극복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제 안에 어린 우성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걔한테 가끔 혼잣말로 얘기할 때도 있어요. 걔를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걔는 뭐, 평생 그렇게 어린 우성이일 것 같아요. 나이 든 나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동심을 가진 나를 계속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지운 감독도 그랬어요. 자신의 유년 시절에 스스로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고. 하지만 방금 얘기한 ‘어린 우성이’는 ‘어렸던 우성이’와는 다른 친구인 거죠?
‘어렸던 우성이’에 대한 아련한 연민이 있을 수는 있겠죠. 너무 불우했던 아이니까요. 많이 외로워했던 꼬마니까요. 철거촌에서 혼자 외로워하고, 추워하고, 방과 후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수제비를 끓여 먹고, 라면을 끓여 먹고, 방 안에 멍하니 앉아서, 공부는 지지리도 안 해요.(웃음) 그렇게 엄마나 누나나 형이 들어올 때까지 방구석에 앉아 있었죠. 고요에도 소음이 있어요. 진공상태의 소음. 그 소음을 듣는 거죠. 그런데 그런 기억이 저는 좋거든요.
그런 기억이 배우로 활동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나요? 나이가 들수록 ‘순수하다’ ‘순진하다’는 게 칭찬이 아님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물론 그 안에 마냥 머물러 있으면 많이 다치죠.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을 대하는 본질에 있어서는 순진한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나요? 순진한 사람에게는 일에 대한 규칙과 원칙이 있어요. 그런 순진함을 잘 성장시키면, 사회가 건강해지는 거 아닐까요? 내가 순진한 만큼 남도 순진한 걸 인정하면 서로 그렇게 상처 주고 아파할 일은 없죠. 사실 사회에서 폭력이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도 굉장히 연약한 자아를 가진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성숙하지 못한 어떤 행위가 우리가 봤을 땐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지?’로 읽히는 거죠.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어떤 배우보다 강해 보였어요. 여전한가요?
전 좋은 게 좋아요. 나쁜 거 보기 싫어요. 응징하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좋은 배우가 되는 것, 같은 이야기인가요?
모든 직업에는 인성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탁월한 실력이 있으면 그 인성을 감싸주기도 하지만, 실력이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인성이라도 좋아야 해. 제가 후자를 선택한 것 같습니다.(웃음)
착한 사람, 좋은 사람, 진지한 사람처럼 진지한 영화, 예술, 토론도 점점 환영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나요?
진지함이란 어떻게 보면 이 시대의 희생양이에요. 시대가 사람들의 진지함을 배척했기 때문에 그 후손을 통해 그렇게 표출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진지한 논쟁과 논의가 사회를 얼마나 건강하고 유쾌하게 만드는지 기성세대가 제시해야 해요. 진지함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댓글로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 발산하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일 용기가 없으니까. 아이들을 그렇게 만든 건 우리 세대의 문제예요. 그러니까 정치를 잘해야 해요.(웃음)
<아수라>는 너무나 지독해서 괴물이 된 어른으로 가득 찬 세상인 셈이죠. 어떤 어른이 되고 싶었나요?
몇 년 전 꿈이 뭐냐는 질문에 “좋은 선배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할 말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거든요. 들어줄 줄 아는 선배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 꿈은 아직 변하지 않았어요.
- 에디터
- 윤혜정 (글), 송선민 (프리랜스 패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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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OO YONG GYUN (《아수라》의 정우성), YOO YOUNG KYU(배우 정우성), SHIN SUN HYE(인간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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