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정의 面
청순하기보다 청명하고, 박식하면서도 겸손한, 미소를 짓기보다는 자주 박장대소하며 270도의 시야로 360도를 배려하는 인물, 고현정. 우리가 그녀의 이런 면은 알고 있었나? 〈보그〉의 뷰파인더로 들어온 고현정의 얼굴과 다면적 온기에 대하여.
뷰티인에게 고현정은 용 같은 존재다. 존재한다지만 눈에 띄지 않고 수많은 전설을 남겼으되 진위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 <고현정의 결> <현정의 곁,> 등 담백한 책으로 자신을 밝히고 있지만 여전히 그녀는 대중에게 멀게 느껴진다. 막연한 환상과 동경 그리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 고현정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누구보다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의 뷰티 브랜드 ‘코이’의 세 번째 신제품 론칭을 앞두고 <보그>와 만난 그녀는 자청하여 즐겨 보던 사진집과 화집을 건네고, 기획안과 시안을 열 번도 더 곱씹어 읽는다. 달변만큼 경청에 능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편들어주고 싶은 ‘언니’가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면면. 아니, 생각해보면 새로울 것도 없다. 고현정과 나는 원래 모르는 사이가 아닌가? 유명한 사람이니 그녀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잘 몰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곤 하는 습관.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면을 대하는 우리의 ‘꼴’이로구나.
“백화점 1층 화장품은 다 써본다”, “강력한 리프팅 시술을 받고 있다더라”등 고현정 뷰티에는 소문이 너무 많다. ‘카더라’만 많고 확인이 되지 않으니 마치 용이 남긴 전설 같다.
내 불명이 여의주다.
농담인가?
진짜다.
용이 여의주 물었으니 게임 끝난 건가?
하하! 여하튼 나는 사람 고현정이고 소문에 대해서는 6년 전에 펴낸 책에서 모두 밝혔다. 특별한 거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소문이 소문을 낳고 해명은 또 다른 소문을 낳는 게 너무 억울하지 않나? 나라면 검색해서 댓글이라도 달고 다닐 거다.
집에 컴퓨터가 없다. 그리고 검색은 고현정 뷰티가 아니라 고현정까지만 해본다. 연관검색어가 뭐 그다지… 하하!
또 뭐 이리 호탕한가.
뭐, 어쩌겠나, 웃어야지.
컴퓨터가 없으면 ‘코이’의 디렉터로서 보고는 어떻게 받나?
예전에는 손으로 쓴 것을 인편에 주고받기도 했고 지금은 휴대폰 메신저, 아니면 손으로 쓴 글을 사진으로 찍어 보낸다.
직원들이 당황하겠는걸!
새로워한다. 너무 오가닉하지 않나?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
비주얼 작업을 함께 준비하며 세 번 놀랐다. 나에게 책을 모아 취향을 알려준 배우는 처음이고, 내 시안에 직접 코멘트를 달아준 사람도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오픈 마인드로 얼굴에 크림과 금칠을 범벅하고 급기야 물감으로 그림까지 그리게 하는 배우는 처음이다. 결정도 빠르고 추진력도 엄청나다. 원래 이렇게 적극적인가?
혼자 하는 일이 아니지 않나. 사람들이랑 얽힌 일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아주 사적인 부분은 대부분 게으르다. 대표적인 것이 피부다.
느린 것이 피부에 득이 됐다고?
의식하지 않았다가도 타칭 ‘피부 미녀’라 불리면 그걸 잃고 싶지 않아 애를 쓰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만의 속도를 유지하기로 했다. 가볍게 세안한 날은 몸에 바르다 남은 베이비 오일로 얼굴을 쓱 훔쳐 끝내기도 하고, 엔자임 파우더로 각질 제거까지 한 날은 크림을 덧발라 보습을 좀더 해주는 식으로 피부에 여유를 주고 있다.
혹시 타고나서 가능한 일은 아닐까?
사람들은 많이 바르고 계속해서 케어해줘야 피부가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그게 절대적 진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볼까? 세간에 ‘광’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돌기 시작한 건 드라마 <봄날> 이후부터였다. 내가 맡았던 역할, 서‘ 정은’의 얼굴에서 은은한 윤기가 났는데 당시 브라운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글로우였던 터라, 조명 감독님이 “뭐라도 좀 두들겨라”라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연출해서 생긴 게 아니고 안 발라서 생긴 광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공백과 수많은 소문 끝에 결정한 컴백, 화장을 안 하는 건 내 손해다. 하지만 그걸 선택했을 때는 이유가 있었다.
민낯을 공개한 이유가 뭔가?
실어증에 걸린 섬 처녀가 과연 화장을 할까? 역할을 생각하면 답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메이크업을 포기하면 우리 스태프들이 2시간은 더 잘 수 있다. 눈도 비비고, 코도 훔치며 연기하는 습관이 있던 터라 괜한 유난을 떨 필요가 없었던 거다. 여배우로서 메이크업 해야 할 이유보다 안 할 이유가 더 많았던 셈이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광’이라는 시대의 뷰티 키워드을 얻었다. 비록 자연스럽게 광 뿜는 법보다는 광 올리는 법을 발전시키게 됐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피부 이상향은 ‘보송보송 아기 피부’와 ‘까슬까슬 도도한 피부’다. 끈적이지 않아야 이물질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일부러 광을 내려고 쫀득하고 촉촉하게 화장하면 온갖 게 다 달라붙는다.
그 상태로 집에 와서 “10분만…”을 웅얼거리다 그냥 잠들곤 하지.
그러면서 왜 자꾸 피부가 안 좋아지는 거냐고 묻는다. ‘까슬하게 도도한 피부’, ‘내 피부를 지키는 화장품’은 부각되지 않은 테마지만 내겐 매우 중요한 키워드다.
너무 앞서가서 그렇다. 요즘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미세 먼지를 피하려면 보송보송하게 피부 화장 하라”는 팁을 보내온다.
이봐, 이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쯤 해서 묻겠다. 선구안이 있는 디렉터, 고현정은 왜 마스크 팩과 쿠션을 안 만드는 건가? 론칭하면 결과가 보장된 상품이다. 그리고 고현정 솜털 세안이 이렇게 유명한데 왜 클렌저를 팔지 않는 건가?
내가 꼭 그래야 할까?
‘코이’의 주된 유통 경로인 홈쇼핑은 비포 앤 애프터가 확실한, 즉 퍼포먼스가 화려한 제품일수록 잘 팔리니까. 왜 꽃길을 두고 좁은 문을 두드리나? 사은품 폭탄 없이 기초 제품 세트만으로 승부수를 던지는 일, 무모해 보일 정도다.
그 어려운 일, 내가 한번 해보려고 한다.
왜 굳이?
브랜드를 세우고 싶어서 그렇다. 단순히 많이 팔리는 거 말고, 진짜 좋은 제품을 파는 브랜드였음 싶다.
그 뚝심을 지지한다. 화장품은 아이디어와 돈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럼 당신이 ‘코이’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건 뭔가?
나쁜 성분이 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 화장품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한 질문은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 거지?”였다. 그다음은 “꼭 필요한 건 뭐지?”였고. 불필요한 건 다 빼고 아기가 먹어도 괜찮을 정도로 안전한 제품을 만드는 게 목표다. 효과가 드라마틱하게 눈으로 확인되지 않아도 무해한 게 우선! 아름다운 건 나중 문제다. 피부가 건강해야 그 위에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거니까.
‘대의’인가?
그런 거창한 건 모르겠다. 그저 유난 떨지 않으면서 지킬 건 지키고 싶을 뿐이다. 비비포 앤 애프터에만 집착하는 제품은 나와 맞지 않다. 그냥 질 좋은 제품을 누구나 부담 없이 써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물론 홈쇼핑 채널 유통에서 코이 제품이 저렴한 건 아니다. 하지만 박리다매할 거냐, 좋게 만들어서 조금 팔 거냐, 선택하라면 난 후자다.
이번 거 진짜 자신 있다더니, 나는 이미 반했다.
진짜?
저기, 왜 갑자기 수줍어하는 건가?
좋아서 그런다.
지금까지 내내 연극배우처럼 에피소드를 재연하고, 꾸러기 소년처럼 큭큭대며 얘기하다 갑자기 이러면 당황스럽다.
더 큰 매력이 많다. 한 면으로 나를 규정하지 말아달라.
얘기하다 보니 자꾸 설득당한다. 당신이 쿠션 팩트를 내지 않겠다고 하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진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쿠션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 납득하지 않으면 죽어도 못하는 사람이다. 내 마음을 동하게 하는 제품을 만들게 된다면 그때 출시하겠다.
브랜드가 당신의 확신에 따라 움직이는 만큼 책임도 무겁다. 게다가 유명인이라 표적이 되기도 쉽다.
고현정은 그거라도 해야지. 얼마 전 회의하면서 그런 얘길 했다. “최선을 다했고 제품은 잘 나왔다. 이제 모든 평가와 결과는 내가 감당할 테니 이제 당신들은 신경 끄라”고 말이다.
너무나 밝게 말하는 거 아닌가? 내가 당신 입장이었으면 심장이 쫄깃해지다 못해 딱딱해졌을 거다. 아무 바람막이도 없이 맨 앞에 홀로 서 있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수년간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또다시 “내가 감당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원동력은 뭔가?
‘좋은 일’이니까. 나는 지금 어딘가로 올라서기 위한 발판을 찾는 게 아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면서까지 성공하고 싶지도 않다. 욕심이란 건 참 덧없는 거다. 1억 가지면 10억 가지고 싶고 10억이 생기면 100억을 욕심내겠지만 그러다 보면 일생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된다. 나는 이미 이번 생에 감사할 일이 많다. 정직하게 일하면서 갚아가야지.
너무 몰두해 건강을 해치는 것 같다고 주변에서 걱정하더라.
괜찮다. 이 일이 나와 잘 맞다.
디렉터가, 아니면 화장품이?
논의의 과정이. 바다가 좋냐, 산이 좋냐를 논하는 일이 아닌지라 팩트가 있고 답이 있다. 모르면 물어보고. 그러면 다들 친절히 알려준다.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생각한 뒤 그다음 날 또 물어보며 의견을 나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결국 시너지를 내고 있더라.
하지만 단순히 과정을 즐길 수만은 없는 위치다.
아마 나 혼자였다면 진짜 무서웠을 거 같다. 하지만 나는 홀로, 먼저 갈 생각이 없다. 결국엔 내게 소중한 사람들과 다 같이 그곳에 도착하게 될 것을 아니까 아주 기꺼이 앞장서는 거다. 시시콜콜 다 말할 순 없지만 나는 너무나 말이 안 되는, 경우 없고 이치에 닿지 않는 상황에 놓여 해명도 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진짜 두려운 건 그럴 때뿐이다.
턱 주름과 귀 주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 무슨 뜻인가?
세로 주름을 잘 관리하자는 뜻이다. 우리 한번 솔직해져보자. 이른바 안티에이징 제품이라는 걸 쓰면 완벽히 주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그건 김선달 같은 얘기다. 표정 짓고 근육 쓰며 생기는 가로 주름은 괜찮다. 개성이니까. 하지만 쪼글하게 입술을 따라 방사형으로 생기는 입가 주름, 꽁하니 힘줘서 생기는 턱 주름, 찡그려서 생기는 미간 주름 등은 얼굴 근육을 스트레칭하고, 크림 바를 때 살살 달래주고, 표정을 예쁘게 지으며 예방할 수 있다.
코이에서는 주름 기능성 제품을 출시하지 않을 건가?
획기적이고 효과 있는 성분과 기술을 만나게 된다면 ‘언에이징’ 크림을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가 돼도 솔직히 얘기할 거다. 이게 당신의 주름을 쫙쫙 펴주진 않을 거라고.
언에이징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안티에이징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자신의 나이에 안티를 선언하는 건가? 나이 들었다, 아니 좀더 살았다는 건 굉장히 멋질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스무 살만의 파릇한, 치명적 그 무엇은 사라지고 없을 거다. 하지만 40대 중반이 되고 나니 알 거 같다. 얼굴에서 인생이 나타나는 순간만큼 최고로 멋진 일은 없다는 걸. 옷이나 가방처럼 쇼핑할 수 없는, 내가 직접 만든 내 것이자 세상에 딱 하나뿐인 레어 피스다.
마지막으로 고현정, 당신의 면을 살려주는 건 뭔가?
나만의 애티튜드. 누가 있거나 없거나 나는 언제나 똑같이 행동한다. 피부도 그렇다. 내가 밖에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 말하고 안에서는 요리조리 짓누르며 혹사시키고 있었다면 내 피부는 지금 이런 상태가 아니었을 거다. 언행일치, 그게 내 면을 살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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