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화보

스타일 헌트

2018.03.26

by VOGUE

    스타일 헌트

    크러쉬, 지코, 딘.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나가는 뮤지션들의 스타일을 만드는 세 팀. 뮤지션과 동등한 위치에서 영감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아티스트가 그들이다.

    크러쉬가 입은 흰색 후디 재킷은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at Eliden Men).

    CRUSH, PARK JI YEON, PARK SANG WOOK
    “오~ 지따시, 그렇게 하고 다녀!” 촬영장에 걸어 들어오며 스타일리스트 박지연에게 말을 거는 크러쉬는 어느 때보다 편해 보였다. 교실에 들어오며 친구 별명을 부르는 학생처럼. 92년생 동갑인 크러쉬와 박지연은 13년 된 친구다. “어릴 때부터 옷을 좋아하던 친구들이었어요. 언젠가 재미있는 일을 해보자고 늘 얘기해왔죠. 아까도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재미로 쓰긴 했지만, 그런 지점에서 결실을 맺고 있지 않나 싶어요. 저를 제일 잘 아는 친구들이기에 저에게 무엇이 어울리고 제가 멋있는지 편하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크러쉬의 최근 1년 스타일이 보다 동시대적이고 그의 나이게 맞게 바뀌었다는 건 그의 인스타그램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순히 지금 유행하는 브랜드를 걸친 게 아닌, 각종 일본 디자이너 빈티지, 영국 독립출판사에서 발매한 티셔츠(Winona), 테크웨어 등 여러 아이템으로 연출했기 때문이다. 특히 돋보이는 사복 패션에는 늘
    @pvrkjiyeon, @youngblueboy라는 두 개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태그한다. 함께 일하는 두 명의 스타일리스트 박지연, 박상욱 남매의 계정이다.

    크러쉬가 입은 카무플라주 재킷은 마이어(Myar at Eliden Men), 올리브색 팬츠는 니들스(Needles at Eliden Men),
    남색 구두는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

    옷을 좋아하던 남매는 청담동 편집매장 쿤과 국내 로드 숍 등에서 일한 뒤 크러쉬의 러브 콜을 받았다. 그리고 크러쉬의 공연 무대, 방송, 화보, 광고 그리고 5~6월에는 세상에 공개될 크러쉬 앨범 비주얼까지 의논하는 크루가 되었다. 크러쉬는 패션에 대해 긴밀히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 관심사 역시 비슷해졌다고 말한다. “딱히 패션 뉴스를 팔로우하는 건 아니에요. 친구들이 이런저런 소식을 알려주죠. 요즘은 80~90년대 LP, 당시 뮤지션들이 입었던 패션과 음악에 관심이 있어요. 얼마 전엔 친구들이 추천한 LA 빈티지 숍 호러 바큐오(Horror Vacuo)에 혼자 다녀왔죠. ‘레어’한 아이템이 많더라고요. 마르지엘라 니트, 언더커버, 꼼데가르송 빈티지를 샀어요.” 패션쇼를 스마트폰 생중계로 보는 밀레니얼 세대지만 오히려 빈티지에 탐닉한다. “요샌 편집 숍에 가도 다 같은 옷이잖아요. 그래서 오히려 빈티지 숍에서 사는 편이에요. 중고 거래 사이트 ‘그레일드(grailed.com)’에 올라온 전 세계 셀러의 매물을 뒤지고 도쿄의 라일라 도쿄(Laila Tokio), 라그타그(Ragtag) 같은 세컨드 숍에서 옷을 구합니다. 오늘 크러쉬가 입은 로프 벨트도 그레일드에서 구한 넘버 나인 액세서리예요.” 이 남매는 크러쉬뿐 아니라 뮤지션 식 케이의 비주얼, 국내 브랜드 어나더유스(Anotheryouth)의 룩북 등으로도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많은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리의 스타일을 원하는 이들과 함께하고 싶어요.”

    KIM DO HEE
    “딘을 만난 건 작년 이맘때였어요. 먼저 연락이 왔죠. 첫 만남은 청담동의 할랄 푸드 가게였습니다.” 검은색 베레, 데님 오버올을 내려 입은 듯 보이는 바지 차림으로 김도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낯익다면 한남동의 힙한 카페 앨리스 로렌스(Alice Lawrance XX)에 들렀던 사람일지 모른다. “카페를 운영하고 동명의 브랜드 옷도 만들었어요. 전공이었던 영화과도 다녔고요.” 그를 스타일리스트에 입문시킨 인물은 92년생 동갑내기 딘이다. “딘을 만나기 전만 해도 국내외 뮤지션을 통틀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딘의 음악도 몰랐고 유명세도 몰랐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 바로 딘이었어요.” 지난 1년간 딘은 패션계의 인플루언서로 자리 잡았다. 팔로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해외 패션쇼 프런트 로를 차지했으며 패션지 표지에도 등장했다. 게다가 일본의 편집 스토어 어반 리서치(Urban Research)와 옷도 선보였다. 이 패션 여정에 늘 김도희가 함께했다. “대외적으로 딘의 패션이 많이 알려진 건 <쇼미더머니 6>였지만 모든 작업이 기억에 남아요. 밴드 디 인터넷(The Internet)의 멤버 시드(Syd)와 협업한 ‘Love’ 뮤직비디오, 패션 화보도 있었고요. 최근 런던에서 어 콜드 월(A-cold-wall)과 키코 코스타디노프(Kiko Kostadinov)의 쇼도 봤어요.” 이들의 런던행은 최근 LVMH 프라이즈 수상 후보에 오른 어 콜드 월의 사무엘 로스(Samuel Ross)의 적극적인 메시지 덕분이었다. “어 콜드 월 옷을 좋아해 딘이 옷차림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가끔 올렸어요. 그러자 사무엘로부터 메시지가 왔더라고요. 어 콜드 워 쇼 3일 전에 런던으로 오라고 그러더군요. 재미난 작업을 해보자면서요. 마침 ‘인스타그램’이라는 노래의 티저 영상이 나올 때였죠.” 뮤지션과 스타일리스트가 시너지를 내려면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무작정 좋은 것만 입히기보다, 그 친구의 생각 혹은 사상과 개인적 요소를 통합해 룩으로 보여주는 거죠. 그런 면에서 딘이 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듯합니다.” 요즘 딘이 빠져 있는 건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쇼미더머니 6> 결승전 때부터 머리에 두건을 두르는 스타일을 고집했어요. 얼마 전 버버리 쇼에서도 체크 머플러를 두건처럼 둘렀어요.” 노란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이 나루토나 <원피스>의 조로를 닮은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그 룩에는 악플 비중도 꽤 있었다. “무작정 착해 보이는 건 싫어요. 차라리 ‘배드 보이’처럼 보이는 게 좋을 때가 있죠.”

    LEE SUNG SIKE
    “지난해 화제의 프로그램 <쇼미더머니 6>에서 패션 관계자들의 눈이 확 뜨인 순간은 지코-딘 팀의 ‘요즘 것들’ 공연 무대였다. 영국에서 파생된 힙합 장르인 그라임(Grime) 스타일의 노래를 선보인 무대에 멤버들이 버버리의 노바 체크 옷을 입고 나온 것이다. 그라임 음악이 영국 빈민가에서 유행했고 영국의 못된 젊은이들 중 하나인 ‘차브(Chav)’족이 트랙 톱, 트레이닝 팬츠, 명품 브랜드 액세서리를 걸친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통찰력에 박수를 쳤을 것이다. 게다가 차브족의 패션을 스트리트로 끌어들인 고샤 루브친스키가 버버리와 협업한 첫 컬렉션을 발표한 직후였으니 더더욱! 무대의 일등 공신은 스타일리스트 이성식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상한 구제 옷을 입고 나왔네’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노래와 스타일의 시너지가 제대로 났습니다. 방송 후 버버리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죠. 디자이너가 바뀌는 해를 맞아 브랜드 이미지도 신선하게 바뀌게 된 좋은 예라고요. 이런 스타일은 제가 빈티지 스타일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가능했던 것 같아요.” 스트리트 패션이 성행했던 2000년대, 이성식은 잡지와 웹사이트에 단골로 등장한 스트리트 패션모델이었다. 장발에 큰 프레임의 안경, 아방가르드한 타비 슈즈, 베를린의 블레스(Bless) 액세서리를 걸치던 그는 누가 봐도 특이한 스타일. 당시 홍대에 ‘아프로갓(Aprogod)’이라는 빈티지 숍을 운영하던 그는 온오프라인으로 국내에 생소한 브랜드를 소개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진입한 것도 그 숍을 통해서였다. “스타일리스트들이 옷을 구하러 많이 들렀어요. 스타일이 특이하단 소문이 퍼졌는지 SM의 민희진 비주얼 디렉터가 제게 에프엑스의 스타일링을 제안하더라고요. 이후에는 남자 힙합 아티스트, AOMG 소속 뮤지션들이나 지코, 워너원까지 담당하게 됐죠.” 현재 아프로갓은 운영을 중단한 상태이지만, 직원 20여 명이 있는 대형 비주얼 디렉팅 회사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성식은 지금 하는 일을 ‘스타일리스트=코디’라는 개념보다는 몇 발자국 전진한 존재로 본다. “스타일리스트라는 게 단순히 옷을 예쁘게 입혀 무대를 완성하면 끝이 아니에요. 여러 방면으로 문화적 역량을 미칠 일을 하죠. 스타일리스트 초기에는 제가 직접 입는다는 생각으로 아티스트에게 입혔어요. 다음에는 회사나 팬,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좀더 대중적으로 안정된 스타일링을 했죠.” 지금은 또 생각이 바뀌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트렌드를 초월해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스타일을 창조하고 싶어요. 결국 사람들이 따라 하게 만드는 거죠.”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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