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인간
끝나지 않는 화두, 무엇을 먹을 것인가. 과거에 종합병원이었다던 어느 여성은 프루테리언이 되면서 향수가 필요 없는 삶을 산다고 고백한다.
나는 프루테리언이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은 간헐적 프루테리언, 더 엄밀히 말하자면 약간의 녹말식을 겸하는 간헐적 프루테리언이다. 100% 프루테리언임을 자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완벽한 열매식을 지키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솔직히 덧붙이면 나의 경우 일평생 중독되어온 일반식의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종종 넘어가곤 하기 때문이다.
프루테리언을 선언한 것은 작년 늦봄이다. 병이라 이름 붙일 정도로 딱히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 몸은 건강하다고는 자부할 수 없는 상태로 늘 골골거렸다. 덜컥 겁이 났다. 골골거림은 큰 병의 서막을 알리는 시그널이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10년 넘게 마감 노동자로서 격무에 시달린 관계로 체중과 혈압은 조금씩 상승해왔고, 피부는 퍼석해졌으며, 화장실에 시원하게 다녀온 적은 손에 꼽았고, 무엇보다 늘피로했다. 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마사지를 받으러가서 엎드려 있기도 고됐으니까.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종합병원 신세였다. 하지만 나는 약물을 복용하거나 외과적 접근을 하는 것에 큰 거부감이 있는 인간 유형이라 우연히 발견한 한 동영상을 통해 나의 식습관을 점검해보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했다.
아직은 프루테리언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나에게 ‘이레네오’라는 유튜버의 열매식 개념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따라 살아봤다. 처음에는 일주일만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일주일 동안 몸이, 더불어 정신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자. 결과는 놀라웠다. 정확히 얘기하면 그 과정이 놀라웠다. 처음 이틀간은 소위 명현 현상이라는 것을 겪었다. 콧물, 기침, 가래, 두통 등이 나를 괴롭혔다. 평소라면 여기서 포기했을 테지만, 당시 내가 나를 몹시 싫어할 무렵이라 더 이상 나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더 흘렀다. 그때부터 아침에 눈을 뜨면 자연스럽게 생리적 신호가 왔다. 일주일에 한 번 화장실 가는 것도 힘겨웠던 내게 이것은 기적이었다. 가뭄 끝에 생명의 생수가 터져 나온 수준이랄까. 늘 돌처럼 딱딱하던 배가 말랑말랑해지더니 속에서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듯 상쾌했다. 피부와 머리카락에도 윤기가 돌기 시작했고, 생리통도 줄어들었고, 에너지가 샘솟았다. 그간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그것을 폐기 처분했다. 사람은 ‘과일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몸무게는 재보지 않았지만, 3주 만에 허리는 3인치가 줄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최소 고등학교 때부터 달달 외우고 있던 칼로리 계산과는 작별을 고할 시간이었다. 이젠 원푸드 다이어트, 황제 다이어트, 덴마크 다이어트 따위의 무차별적 유행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배고픔에 손이 떨리거나 신경질이 나서 친구와 싸울일도 없다. 나는 완전히 해방되었다. 칼로리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한 양의 과일을 약간의 생채소와 더불어 섭취한다. 내가 원한다면, 내 몸이 무리 없이 받아들인다면, 한 끼에 바나나를 10개도 먹을 수 있다. 수박 한 통을, 복숭아 한 박스를 먹어도 좋다.
현대인의 고정관념에 크게 위배되는 이런 획기적인 식사법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도 아주 많다. ‘과일 많이 먹으면 살찌지 않아요?’ ‘그러면 단백질 섭취는요?’ ‘어떤 다큐 보니까 고지방식이 좋다던 데요?’ 이 짧은 지면에서 모든 것을 반박하긴 어렵다. 특히 고지방식의 효능에 대해 프루테리언들은 대꾸할 가치조차 크게 느끼지 못한다. 대신 세상에 좋은 책이 이미 많이 나와 있다. 일단 하비 다이아몬드의 <다이어트 불변의 법칙>(사이몬북스)부터 읽어보라. 이 책을 읽은 한 독자는 이런 후기를 남겼다. “평생 동굴 속 콘크리트 밑에 파묻혀 있다가 구조된 듯한 느낌이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이 책을 보면 고기와 쌀밥, 달걀 프라이와 식빵의 조합이 얼마나 우리 몸을 해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식이요법의 기본 원리는 콜린 캠벨 박사에게서 흡수했다. 저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열린과학)에서 그는 환원론적 접근법의 한계와 식품을 영양소 복합체로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줬다. 쉽게 말해 ‘오렌지’ 하면 비타민 C만 떠올리고, ‘현미’ 하면 탄수화물만 떠올리는 사고 체계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자연식품의 영양 구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체계적이다. 물론 그것을 통째로, 자연 상태로 섭취하면 가장 좋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단백질과 암의 관련성’이다. 캠벨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섭취 칼로리의 10% 넘게 단백질을 섭취할 경우 암 발생이 증가한다.” 육류, 가금류는 물론 생선, 달걀, 우유도 과하게 섭취하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단백질 신화에 빠져 있는데,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출처를 알기 힘든 정보에 휩쓸리지 말고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에 따르면 스티브 잡스는 프루테리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그는 현대의학을 거부하고 식이요법에 더 의지했다. 천재의 안타까운 죽음을 놓고 여전히 현대의학과 대체의학의 의견은 팽팽하게 엇갈린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여러분, 병에 걸렸을 때 병원에 가지말고 과일을 드세요’도 아니고, ‘거봐, 프루테리언도 암에 걸리잖아!’와 같은 인과가 헐거운 비난을 반박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점은 잡스의 종양이 자라난 속도다. 채식의 거장이라 불리는 의학박사 존 맥두걸의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잡스의 종양이 처음 발견된 1cm에서 (보통 4기로 진단하는 크기인) 10cm로 커질 때까지 걸린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무려 8년이 걸렸다. 암세포는 두 배씩 성장한다는 특성을 안다면, 다가오는 강도가 더 셀 것이다.
나는 작년 겨울 일반식으로 외도했다가 올봄 다시 프루테리언으로 복귀했다. 이 두 번째 챕터를 통해 또 다른 발견을 하는 중이다. 가장 신기한 예는 외출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뿌리던 향수에 더 이상 손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체취가 옅어졌기 때문이다(프루테리언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의 몸에서는 향긋한 과일 냄새가 난다고 한다). 미처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화 덕분에 나는 앞으로의 삶을 점점 더 기대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이 조금 더 좋아졌다. 이미 천국을 맛봤는데 굳이 이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이렇게 프루테리언이 되어가고 있다.
- 에디터
- 김나랑
- 포토그래퍼
- 이현석
- 글쓴이
- 김현민 (영화 저널리스트)
- 프랍 스타일링
- 한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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