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RESHAPE THE FUTURE

2023.02.20

RESHAPE THE FUTURE

2020년대 패션 생태계에서 가장 유효한 가치가 될 ‘지속 가능성’. ‘기준’의 디자이너 김현우와 〈보그〉가 협업해 지속 가능성과 미래 세대에 부합하는 옷을 완성했다.

김현우는 나우의 카키색 나일론 셔츠를 옷의 구조만 남겨두고 네거티브 스페이스(뚫린 공간)를 활용하는 작업으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전면과 후면의 패널을 잘라낸 후, 털실을 이용해 핸드 스티치와 기준의 시그니처 로프 장식을 가미했다. 스커트는 윈드브레이커를 뒤집은 후 안감과 겉감 사이에 솜을 넣어 볼륨감을 더했고, 자투리 원단으로 만든 파우치를 스커트 앞면에 추가해 실용성을 더했다. 여기에 윈드브레이커의 소매를 묶어 오픈 스커트로 연출했다.

2019년은 어느 때보다 환경 및 지속 가능 패션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는 해였다. 아마존은 불탔고, 10대 환경 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UN에서 강렬한 연설을 했으며, 많은 브랜드에서 지속 가능 패션을 추구하겠노라고 공표했다. 새로운 10년을 열게 될 2020년은 이러한 논의가 더 구체적이며 신속하게 이뤄질 것이다. 지난해 9월 2020 S/S 시즌을 발표한 디자이너부터 살펴보자. 뉴욕의 가브리엘라 허스트(Gabriela Hearst)는 최초로 ‘탄소 중립 패션쇼’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지속 가능성 컨설팅 업체 에코액트(EcoAct)와 협업해 컬렉션을 준비하며 패션쇼라는 이벤트를 둘러싼 요소를 하나씩 고쳐나갔다. 지난 시즌에 남은 원단을 활용하는 데 이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 필요가 없는 모델을 쇼에 섭외하며, 매립지에 방치될 플라스틱 옷걸이 대신 재활용 카드보드지 옷걸이를 사용하는 식이다. 밀라노의 거대 브랜드 구찌 역시 ‘제대로 된 변화’를 위해서는 제작부터 포장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상쇄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아울러 글로벌 산림 보존 지원 사업 ‘REDD+’를 공개하며 매년 사업 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꼼꼼히 모니터링하겠다고 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학자들의 보고서는 명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구찌 CEO 마르코 비자리의 말이다. 전 세계 26개국 에디션의 <보그> 또한 지난해 12월, 2020년과 그 이후의 공동 약속에 관한 ‘Vogue Values’를 발표했다. 이 중 패션계가 힘을 실어야 할 중요한 가치의 하나로 지속 가능성을 꼽았다.

보시다시피 전 세계는 하나의 목소리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서울 패션계에서 진일보한 채 지속 가능성이라는 이슈를 던진 사례는 사실 많지 않았다. 이 중요한 시점에 <보그>는 서울의 젊은 디자이너 김현우와 신개념 지속 가능 컬렉션을 제작하기로 의기를 투합했다. 물론 버려질 운명에 처한 재료를 사용해서. 디자이너 김현우는 SADI 졸업 컬렉션으로 프랑스 이에르 패션 페스티벌의 최종 후보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대한민국 패션대전 대통령상을 받으며 패션 코리아의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브랜드 ‘기준(Kijun)’을 론칭한 건 그 직후다. 서울 패션 위크 런웨이에서 컬렉션을 발표하는 대신, 이태원 클럽 지하를 빌려 옷을 선보이거나 카페 등에서 패션 화보 촬영장 못지않은 연출로 컬렉션을 보여주는 등 기존 브랜드와 다른 형식의 독자적 길을 걷고 있다. 단순히 옷을 포장하는 방식이 쿨했다면 지금쯤 ‘기준’의 이름은 기억에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수많은 PR 에이전시 힘을 빌리지 않고도 여러 패션 화보를 통해 그의 옷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분명한 캐릭터를 지닌 브랜드가 서울에 부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자이너 김현우와 모델 김주향. 김현우는 나우의 코트와 패딩 점퍼의 안감을 전부 해체한 후 핸드 스티치로 연결해 하나의 패치워크 원단을 만들었다. 이후 기준의 첫 번째 시즌에서 결함으로 판매하지 못한 상품과 함께 매치했다. 여기에 로프 디테일을 추가해 사이즈 조절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커다란 케이프와 미니드레스 두 가지 버전으로 입을 수 있게 연출했다.

“지속 가능 패션의 중요성을 인식한 계기는 패스트 패션이 등장한 후 패션에 대한 소비가 가속화되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저 역시 그 많은 소비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죠. 저렴한 가격과 유행을 즉각 반영한 디자인에 끌려 구매했지만, 한 철 지나면 눈과 손이 가지 않는 옷이 옷장에 가득 찼죠. 고객이 입지 않아 버려지는 옷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팔리지 않은 그 많은 재고의 행방이 디자이너 입장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했어요. 이와 반대로‘기준’의 옷은 버려지지 않고 입는 사람에게 오래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겼죠.”

이 프로젝트에는 포틀랜드를 기반으로 탄생한 지속 가능 브랜드 ‘나우(Nau)’가 힘을 보탰다. ‘나우’는 리사이클 원단으로 제품을 제작하는 브랜드다. 그러나 최종 검수 과정에서 탈락시켜야 하는 아이템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보그>는 재활용으로 탄생한 제품 가운데 상품이라는 숙명에서 아쉽게 버려질 위기에 처한 제품을 디자이너 김현우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이 기획을 시작했다. “리사이클 다운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우리가 브랜드로서 어떤 위치에 서야 할지에 대해 진일보하게 해주었습니다. 더불어 고객에게 우리가 어떤 가치를 대변하느냐에 대해서도 알려주었죠.” ‘나우’ 소재 관리팀의 설명이다. ‘나우’가 리사이클 다운, 재생 가능한 폴리에스테르를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은 가히 업계 최고라고 할 만하다. 패딩과 재킷에 쓰이는 리사이클 다운은 버려진 침구, 침낭을 엄격히 분류해 솜털과 깃털로 나눈 후 세척 및 살균 과정을 거쳐 생산한다. 분류 단계에서 리사이클 다운으로 쓰기 부적합한 부러진 깃털 등은 분쇄 후 유기농 비료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모든 세척 과정은 온천수로 해결하고 사용한 다음에는 정화 후 농업용수로 활용한다. 제작 공정을 가능하게 하는 전기에너지는 모두 태양열로, 열에너지는 목재와 가축의 배설물에서 얻은 생물 에너지로 생산한다. 이렇듯 모든 공정을 환경을 위해 각별히 신경 쓰는 브랜드에서 또다시 버려지는 옷이 나온다는 사실이 매우 아이러니하지만, 이를 재활용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강력한 메시지로 다가갈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우의 스탠드 칼라 점퍼 또한 옷의 구조만 남겨둔 채 전면과 후면 패널을 잘랐다. 흰색 주름 패널을 그 사이로 통과시켜 입체적인 실루엣을 연출했다. 남은 원단과 버릴 예정이었던 단추와 부자재, 코르크 마개로 디테일을 가미했다. 바지는 기준의 첫 번째 시즌에 선보인 언밸런스 팬츠를 실루엣의 기반으로 잡았고, 나우의 회색 재킷과 카키색 코트를 완전 해체한 후 재배열해 블로킹 패널 팬츠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지속 가능성이라는 주제에 맞게 주어진 옷을 최대한 잘 활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다음 시즌인 2020 F/W 컬렉션의 미리 보기쯤 되는 ‘호보(Hobo)’ 스타일 룩을 차용해 약간의 어지러움 속에 느껴지는 미학을 탐구했습니다.” 아울러 디자이너는 지난 시즌 아카이브를 토대로 이전 컬렉션을 위해 사용하고 남은 액세서리와 로프, 단추, 코르크 마개 같은 부자재를 재활용해 ‘기준’ 시그니처 룩을 이번 특별 협업 컬렉션에 적용했다.

‘기준’ 또한 지속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준비 중이다. “컬렉션 라인은 재고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문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물의 가죽이나 털 등을 비윤리적 방식으로 착취해 쓰지 않고, 인조가죽인 플레더 원단과 에코 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룩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호두와 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 껍데기로 액세서리도 만들 계획입니다..”

김현우는 2020년 초 유럽에서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선보일 2020 F/W의 영감 역시 환경의 중요성에서 가져왔다. 영화에서 가끔 아이디어를 얻는 디자이너답게, 이번에는 한국 영화에 꽂혔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참고했습니다. 영화의 스토리가 미군 부대 영안실에서 버린 포름알데히드 같은 화학물질이 한강으로 흘러들어 수질이 오염되고 그로 인해 괴물이 탄생한다는 설정이죠. 비슷한 개념의 선상에서 아름다운 ‘크리처물’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아 해외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프레젠테이션인 만큼 가장 ‘기준다운’ 방식으로 준비 중이다

    패션 에디터
    남현지
    포토그래퍼
    박종하
    모델
    김주향, 이승찬
    헤어
    장혜연
    메이크업
    유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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