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과 가능 사이, 미술
현대미술을 들여다보니, 21세기가 낳은 전 지구적 유행어 ‘지속 가능성’의 본질에 가닿았다. 미술, 지속, 가능성 그리고 지속 가능성의 정신에 관한 매우 주관적 단상.
천하의 양혜규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2003년 그는 런던 델피나 재단(Delfina Foundation)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세계 최강의 물가를 자랑하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나 지금이나,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언감생심 작품이 만드는 족족 팔려 나가는 상황은 환상에 가깝다. 무엇보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다는 건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못하는 답보 상태라는 의미다. 그러나 자기 작품이 짐처럼 느껴졌다 한들, 공간 한 뙈기 마련하기란 그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마침 양혜규는 어느 갤러리로부터 전시를 제안받게 된다. 그리고 이 영민한 미술가는 당면한 현실을 예술적 경험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둘 데 없는 작품 13점을 운송 직전의 포장 상태 그대로 그러모아 나무 팔레트 위에 쌓아두고는 작품이라 명명한 것이다. 당장의 현실적 절박함과 결핍, 소외, 불안, 욕망 등으로 점철된 삶이 만들어낸 작품, 그래서 지금도 가장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작업으로 일컬어지는 ‘창고 피스(Storage Piece)’(2004)는 이렇게 탄생했다.
흥미로운 건 이후 ‘창고 피스’의 행보다. 궁여지책으로 개인의 영역을 벗어난 작품은 자기 풍자와 제도 비평의 원형으로 회자되었고, 작가, 작품, 컬렉터, 관객 모두의 관계를 재고하게끔 했다. 이를테면 예술 작품의 가치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작가의 삶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그것이 미술 시장에서 통용되는 룰을 어떻게 전복하는가, 작품의 순환은 작가의 작업 세계와 예술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등등 숱한 담론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작품이 ‘전시되다’와 ‘팔리다’는 엄연히 다른 얘기였다. 그렇게 2005년 아트 포럼 베를린 페어를 고별 무대 삼아 출현한 ‘창고 피스’는, 악셀 하우브록(Axel Haubrok)이라는 컬렉터의 눈에 들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미술관 불을 껐다 켰다 하는 마틴 크리드의 작업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2000)처럼 흔히 소장할 수 없다 여기는 비물질적 작품 소장에 도전하는 특이한 자였다. 양혜규는 그에게 작업에 관한 거의 모든 권한을 일임했다. 작가의 본래 아이디어와는 달리, 하우브록은 포장되어 내용을 알 수 없던 작업을 해체하는 ‘언패킹’까지 작업의 일부로 여겼다. 그리고 작가만큼이나 바쁘게, ‘창고 피스’ 역시 전 세계 주요 전시장을 유랑하며, 접히거나 펼쳐지며, 독자적 삶을 지속하고 있다.
“그것이 ‘창고 피스’의 개념적인 특성이에요. 기본적으로 욕망, 필요, 결핍에서 태어난 작품이기 때문에 컬렉터 역시 지금 가장 절실한 일을 이 작업과 하면 되죠. 작품에도 ‘라이프’가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껴요. 하지만 나는 작품의 인생이 드라마틱하고 의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처절하기도 했다가, 화려하기도 했다가. 간혹 다른 전시에서 ‘창고 피스’를 만나면 그래요. ‘반갑다, 오늘은 꽤 달라 보이는구나. 하이파이브!(웃음)’ 하지만 이 작업을 보호하려고만 하는 소시민적 엄마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요. 작가로서, 내 작품이 항상 따뜻한 데서 잘 먹고 잘 살길, 안녕하길 바라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조각가로서의 원죄 의식도 있고요. 나는 늘 무겁고, 큰 것을 계속 만들어내잖아요. 솔직히 가끔 내가 생산한 작품이 내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원죄 의식이죠.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이란 무언가를 만들어야지만 경험할 수 있거든요. 이 일의 원초적인 특성이자 근본적인 한계예요.”
작가가 동의하든 말든, ‘창고 피스’의 드라마를 접한 후 나는 이 작품을 ‘미술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명백한 사례로 기억하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미술 세계에서 지속 가능성이란 무엇일까, ‘미술의 지속 가능성’과 ‘지속 가능한 미술’이 어떻게 같거나 다르며,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등을 질문했다는 얘기가 맞겠다. 어쨌든 21세기가 낳은 최고의 유행어인 ‘지속 가능성’은 1972년 유럽의 경영자, 과학자, 교육자의 회의 모임인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한 후 환경, 경제, 사회적 연속성에 관련된 체계적 개념 혹은 인간 행동의 중요한 미래적 특징으로 쓰이고 있다. 쉽게는 삶의 터전인 환경, 생태계, 자원 따위를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환경 파괴 없이 지속할 수 있는 등의 뜻을 가지는데, 최근에는 환경을 넘어 인간-자연의 관계 양상과 삶의 양식, 더 나아가 세계관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미술계에서도 지속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어왔다. 예컨대 미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 마자 & 루벤 포크스(Maja and Reuben Fowkes)는 ‘지속 가능한 미술(Sustainable Art)’의 기원이 탈물질화에 대한 요구와 미술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의문이 부상하던 1960~1970년대 개념미술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냉전 시대의 종식과 새 시대정신의 출현을 겪으며, 생태, 사회 정의, 비폭력, 민주주의 등을 포함한 지속 가능성의 핵심 원칙과 조화를 이루는 예술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논지 중 하나다.
그러나 지속 가능성의 본뜻이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사회적 인식, 인류의 본질을 포용하는 미덕으로 폭넓게 진화되고 있다면, 미술의 지속 가능성 역시 주제나 방식의 문제로 한정 지을 이유가 없다. 미술 생태계의 관계자(작가, 컬렉터, 관객)들을 절멸시키지 않고, 서로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등의 단순한 해석도 가능하며, 어쩌면 그 부분이 가장 절실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양혜규는 국제 미아 혹은 비싼 쓰레기가 될 뻔한 작품의 소멸을 ‘유예’하고, 세상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미술이 자기 작업 영역에서, 시장에서, 그 세계에서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현실화했다. 게다가 미술 생태계와 시장의 룰을 전복하고자 용기를 발휘했다는 점에서, 지속 가능성의 요소인 사회적 책임에도 충실했다.
결국 지속 가능성의 필요란 주어진 자원이 한정적인 데 반해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근원적인 불안에서 기인한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 개최한 ‘올해의 작가상’ 수상자인 이주요의 작업이 호평받은 이유 역시, 그 시절의 양혜규처럼, 불안과 결핍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다만 양혜규가 제 작품의 성격을 전복했다면, 이주요 작가는 전시장의 성격을 뒤집는다. 향후 실제 구현하고자 하는 미술관의 작품 보관 창고 시스템의 견본 격인 신작 ‘러브 유어 디포(Love Your Depot)’를 비롯, 창작과 보관, 공유와 기록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의 개념 자체를 작품으로 삼은 셈이다. ‘창고 피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문제에서 출발, 미술 전반과 기관적 차원의 담론을 이끌어내고 실천적 해결책을 제안”하는 이주요의 작업은, 태생적으로 ‘분리의 장소’인 미술관의 공간적 한계를 ‘너와 나’의 공통된 미래라는 시간성으로 극복한다. 그의 작업이 이렇게 지속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미술계 전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미술의 지속 가능성’이 ‘지속 가능한 미술’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고나 할까.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금의 미술계에서 꽤 중요한 화두다. 어느 작가는 술자리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요즘 젊은 작가들이 미술 언어로 영상을 선택하는 이유는 시대가 변하기도 했거니와, 현실적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일종의 주체적 제스처”라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작가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찬경도 비슷한 언급을 했다. 주로 영상 작업을 해온 그는 이례적으로 전시장에 전통 건축의 요소를 부각시키며 공간 자체를 실험했고, 소회를 밝혔다. “시멘트 덩어리를 갖다놓는다든가(‘해인’), 기계를 전시한다든가(‘맨발’), 이렇게 물건을 대대적으로 만든 건 처음이에요. 내게는 새로운 방식인데, 그다지 좋은 것 같진 않아요. 농담이 아니라, 건축 폐기물이 엄청나요. 종이나 나무 정도이니 공해까지는 아니겠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죠. 일단 작품을 보관할 데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작품을 폐기해야 하는 상황을 직면한다는 건 언제나 곤란한 일이죠. 조각하는 작가들이 여러모로 힘들겠어요. 비싼 작업을 파는 작가들 말고는, 실제로도 조각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잖아요.”
‘비싼 조각을 만드는 기성작가’들도 이 복잡다단한 의미망에서 자유롭긴 어려워 보인다. 지속 가능성이 전제하는 도덕적 올바름도 외면할 수 없을뿐더러 동시에 자기 작업의 철학을 지속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테이트 모던 터바인 홀에서 열린 카라 워커의 <현대 커미션> 전시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를 다루는 개인전 <Fons Americanus>에서 작가는 버킹엄 궁 앞에 자리한 빅토리아 기념비에서 영감을 받은 높이 13m짜리 대형 설치작을 선보였다. 이 기념비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하게 하는지 질문함으로써 본래 역할과 기능을 전복하면서도, 카라 워커는 무해하고 재활용이 가능한 코르크, 목재 및 금속 소재 위에 무용매 아크릴과 시멘트 합성물 등으로 표면을 코팅하는 등 지속 가능성을 고려했다.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폭력 등을 다뤄온 작가 작업에서 지속 가능성이 주된 화두는 아니겠지만, 이런 실천이 반(反)기념비를 통해 유의미한 발언을 하고자 한 의도에 일말의 진심을 더하기엔 충분하다.
요즘 현대미술가에게 작품 재료란 곧 작업의 메시지다. 지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만난 가나 태생,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엘 아나추이는 버려진 병뚜껑으로 작업한다. 그는 오랫동안 식민 시대, 서구의 반강제, 불평등 무역협정으로 수입된 술병 뚜껑과 알루미늄 조각을 엮어서는, ‘그들은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우리를 보았다’(2011) 같은 금속 태피스트리 작업으로 선보여왔다. 작가는 현대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소비, 환경의 문제뿐 아니라 아프리카 후기 식민 시대의 역사적 트라우마까지 모두 껴안으며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다. 73세의 예술가가 병뚜껑으로 만들어낸 아르누보 회화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에서, 지속 가능성은 결코 목적도, 수단도 될 수 없다. 이 단어가 지금처럼 유행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이미 이를 과거와 현재, 역사와 환경을 모두 관통하는 미술적 개념으로 체화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이 1970년대에 생태학을 강조한 선견지명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미디어아트와 생태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그가 쓴 문장은 충분히 일리 있다. “생태학은 정치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경건한 세계에 대한 관념이다. 그것은 세계의 기획, 전 지구적 순환, 인간 행동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에 두고 있다. 너 혹은 나로부터 너와 나로의 변화로…”(<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 공동시장>(1974)). 생태학을 통해 그가 선언한 건 단순히 환경 혹은 보호가 아니라 ‘자연을 향한 새로운 감수성’이었다. 한편 그의 절친이자 전위 작가 요셉 보이스는 제7회 카셀 도큐멘타를 맞아 시내에 7,000그루의 참나무를 심는 운동이자 퍼포먼스 ‘7000그루의 참나무’(1982)를 선보였다. 비록 보이스는 그로부터 4년 후 세상을 떴지만, 참나무의 수명이 다할 800년 동안 지속 가능한 ‘사회적 조각’이 탄생한 셈이다. 1980년대는 성장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 이념주의 등을 신념 삼아 전력 질주하던 시대였다. 두 사람은 당시 상상하지 못한 예술가의 역할을 자처함으로써 현대미술 너머 세계의 지속 가능성을 각자의 방식으로 지지했다.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의 지속 가능성이 미래에서 출발한다면, 김수자의 지속 가능성은 과거로부터 기인한다. 김수자는 프랑스 중부의 작은 도시, 푸아티에의 역사적 공간을 현대미술로 해석하는 프로젝트 <여정>에 첫 번째 작가로 참가했다. 푸아티에는 정치·종교적으로 ‘유럽’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아랍권과의 ‘푸아티에 전쟁’으로 알려진 중세도시이자, 철학자 미셸 푸코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김수자는 이 도시로 동료 예술가들을 초대해, 아키텐 공작 궁전, 옛 법원 등 주요 건축물에 작업을 배치했다. 현대미술 작가 16명의 작품은 곳곳에서 도시의 문화유산과 소통하면서, 그간 미술적, 철학적 접근을 통해 현대화에 힘써온 푸아티에의 행보에 지속 가능성을 부여한다. 운 좋게도 나는 얼마 전 푸아티에에서 김수자의 작업 ‘숨쉬기(To Breath)’(2019)를 경험할 수 있었다. 바닥의 거울이 나를 수직으로 비추고, 내리꽂힌 듯한 내 몸이 바늘이 되어 이 오랜 건축물을, 천지를, 도시 역사를 꿰어내는 듯한 감각. 평생 스스로를 끊임없이 이동 상태에 둔 김수자에게도 이 도시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지속 가능하도록 이어내는 바늘이자, 다음 행보를 이어가기 위해 잠시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김수자의 작품은 2020년 1월 19일까지 도시 면면에 새로운 미래의 에너지를 수혈하고는 또 다른 여정에 나선다. 보통 장소 특정적 작업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만,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야 하는 작가의 운명, 어떠한 형태로든 세상에 탄생하고 이동해야 하는 작품의 운명, 그리고 그런 작품을 특정 기간, 특정 장소에서만 볼 수 있는 관객의 운명이, 그리하여 이곳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였다는 사실이 전설처럼 남는다. 이 당연하고도 필연적인 순환은, 적어도 미술에서만큼은 ‘지속 가능성’이 예컨대 해변에서 모은 플라스틱으로 오브제를 만든 ‘친환경 예술’ 이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다시, 양혜규가 말한 ‘작품의 라이프’를 떠올린다. 예컨대 김환기의 ‘정원’이 명작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어느 컬렉터의 거실에 갇혀 있는 것과 어느 미술관 소장품으로 관객을 만난다는 건 완전히 다른 삶일 것이다. 미술의 지속 가능성은 결국 만들고, 전시하고, 본다는, 가장 본질적이고 단순한 지점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 피처 디렉터
- 조소현
- 글
-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포토그래퍼
- Courtesy of 국제갤러리, 현대자동차 아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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