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할머니, ‘미나리’ 윤여정의 이야기
영화 <미나리>의 엔딩 크레딧은 ‘To All Our Grandma’로 마무리된다. 우리에게 멋쟁이 할머니 윤여정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 <파친코> 원작의 드라마 촬영차 캐나다로 곧 출국합니다. <파친코>는 한국계 1.5세대인 이민진 작가가 재일 동포의 애환을 그려낸 작품이죠. 짐은 어느 정도 정리하셨나요? 이것저것 꺼내놓긴 했어요. 짐은 내가 직접 다 싸요. 1월 말부터 3월까지 있으려니 양이 꽤 되네요.
가서도 자가 격리를 하셔야죠. 어휴, 자가 격리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아, 그리고 드라마 얘기는 하면 안 돼요. 걔네들이 얼마나 철저한지 몰라요.
한국과 해외를 오가며 촬영하기가 만만치 않은데,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특별히 하는 거 없어요. 예순다섯 살부터 운동을 시작하긴 했죠. 혼자는 못하겠어서 트레이너랑 같이 해요. 내가 그렇게 대단한 의지의 여자가 못 돼거든.
필라테스 같은 운동인가요? 그렇기보단 트레이너가 나에 맞춰 근력 운동을 시켜주더라고요.
예순다섯 살부터면 벌써 10년째 꾸준히 운동을 하셨군요. 올해 배우 인생 55주년이시죠. 그런 거 안 따지기로 했어요. 무슨 주년 이런 거 별로예요.
<미나리>를 영화제에서 미리 봤어요. 그래, 영화를 봐야 인터뷰를 하지.
<미나리>는 정이삭(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자전 영화죠. 영화에서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는 병아리 감별사로 일합니다. 제이콥은 폐기된 병아리를 태우는 연기를 보면서 아들 데이빗(앨런 김)에게 이렇게 얘기하죠. “우리는 꼭 쓸모 있는 사람이 돼야 해.” 제이콥에게 그런 사람이란 농장주란 생산적인 직업을 가지고 가족을 건사하는 가장이죠. 바퀴 달린 집에 살면서까지 땅을 일굽니다. 하지만 모니카는 아픈 데이빗 때문에 병원과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런 와중에 한국에 살던 할머니 순자가 미국 딸네로 옵니다. 처음 볼 땐 우느라 정신없었고, 두 번째 돼서야 정신 차렸어요. 울었다고요? 술 먹고 봤네, 정신을 놓고 봤어. 하하! <미나리>는 감독 본인의 얘긴 줄 모르고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 디테일이 경험하지 않으면 쓸 수 없겠더라고. 시나리오 읽다 말고 스태프에게 전화해서 “감독 어릴 적 얘기냐”고 물어봤죠. 그렇다고 하길래 바로 이 작품 하기로 결심했죠.
운 이유는 영화에 빠지기 전에 할머니 생각이 나서요. 이런 영화를 찍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이게 고마워할 일인가요?
<미나리>의 월드 프리미어 영상이 화제입니다. 정이삭 감독, 스티븐 연, 한예리 등의 주연배우와 함께 해외 미디어 앞에 섰는데요. 중후한 분위기다 보니 “쟤네 너무 진지하네요, 난 그렇게 안 진지해요”라면서 영어로 객석을 빵빵 터트리셨어요.스티븐이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해선지 진지하더라고. 아이작도 객석 앞에서 벅차올랐겠죠. 다들 심각하게 얘기를 길게 하길래 끊어버렸죠. 내가 빨리 끝내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같은 자리에서 “저는 이 영화를 하고 싶지 않았어요. 독립영화니까. 그 얘기는 다 힘들다는 거잖아요”라고 농담하셨죠. 오히려 작은 영화, 독립영화이기에 선택했을 거 같은데요. 내가 그렇게 성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브래드 피트네 회사(플랜 B)에서 한다니까 독립극인 줄 몰랐어요. 출연료도 달러랑 원화랑 자릿수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헷갈려버렸지. 하하.
‘0’ 하나를 착각하셨군요. 나중에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근데 이 영화 자체 예산이 진짜 적어요. 한국에서도 그 돈 가지고 영화 못 찍어요.
예산을 아끼려고 배우들이 매일같이 저녁을 먹고, 숙소도 나눠 쓰며 6주 만에 촬영을 마쳤죠. 일주일은 준비하고, 근 5주간 같이 살았어요. 작은 연극 동아리 같았어요. 다들 즐거워했죠.
그랬기에 배우 간의 연대감이 컸을 거 같아요. 스티븐 연도 “공동체 같았다”고 얘기했고요. 맞아요. 돈 많은 상업영화였으면 너도나도 트레일러 쓰고 현장에서만 만났겠죠. 우리는 자꾸 마주치다 보니 서로 어색한 한국말, 영어 발음도 자연스럽게 고쳐주고, 한국을 표현하는 장면도 우리끼리 열심히 연구하고 그랬어요. 참 웃기는 일이지만, 인생이 그렇잖아요. 웃기는 일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죠.
스티븐 연이 윤여정 선생님과의 첫 만남을 회상한 인터뷰가 재밌더군요. 뭐라던가요? 어디, 사실을 얘기하나 보자고.
둘만 밖에 나가 수다를 떨었는데, 스티븐 연이 “함께 있어서 기쁘고 영광이다”라고 하자 윤여정 선생님이 자신의 작품에서 좋았던 점을 얘기해주셨다고요. “윤여정의 에너지는 진짜라고 느껴졌다”고 말했어요. 기억나요. 내가 <워킹 데드>와 <버닝>을 찾아봤거든요. 스티븐이 “선생님, 저 너무 떨려요. 두려워요”라고 한국어로 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한국어가 어색하니까 ‘I’m very afraid of’를 그렇게 말한 거 같아요. 내가 “한국말은 얼마든 도와줄 수 있다, 걱정하지 말아”라고 답해줬죠. 배우가 어떤 작품을 할 때 겁내는 게 나쁘지 않아요. 떨면서 작품에 임하는 모습에서 얘 잘하겠다 싶었어요. 잘했잖아요.
배우는 작품을 대할 때 어느 정도 긴장해야 한다는 뜻인가요? 오래 배우 생활을 해보니 떨림이 있어야 좋더라고요. 처음 남자 만날 때도 떨림이 있어야 쭉쭉 나가잖아요. ‘하던 거니까 그냥 하지, 뭐’ 하면 결과가 별로였어요.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고요.
<미나리>를 보기 전에 공교롭게 김초희 감독, 윤여정, 정유미 주연의 단편 <산나물 처녀>를 봤어요. 외계의 노처녀 순심(윤여정)이 남자를 찾으러 지구에 왔다는 동화 같은 얘기죠. 이 영화는 산에 소풍 가듯 촬영했을 거 같은데, <미나리>는 어떤 분위기였나요? <산나물 처녀> 뒷얘기 해줄까요? 정말 김초희 감독이 돈 하나도 없이 찾아왔어요. 2,000만원인가, 1,000만원을 들고 영화를 만든다는 거예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그 감독이죠. 사람들이 저를 날카롭고 예민하고 못된 여자로 아는데 실은 맘이 굉장히 여려요. 친한 감독이 한 번만 출연해달라는데 어떻게 안 나가요. 돈 한 푼 안 받고, 안 받은 게 뭐예요, 내가 밥 사주고 챙겨주고 내 돈 쓰면서 며칠 동안 찍었죠. 첫 장면이 드레스를 입고 꽃 달고 수챗구멍에서 나오는 거예요. 별걸 다 시키더라고. 외계에서 온 역할이라 그렇다는데 뭐 어째요, 다 찍었죠. <미나리>는 음… 매우 하기 싫은 감정으로 들어갔죠. 하하. 스티븐이랑 다르죠?
영화인에 대한 연대, 후배를 돕는 마음으로 작품에 참여하는 횟수가 많아지시죠.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만들지 보이니까요. 그래서 한 거지 독립영화의 발전?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 감독을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했어요.
이번 <미나리>는 윤여정 배우 개인으로만 21관왕입니다(1월 기준). 주변에서 오스카, 오스카 하니까 부담스러울 거 같아요. <버라이어티>도 선생님이 <사요나라>(1957)의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아시안 배우 중 두 번째로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으리라 예측했어요. 그래서 아무도 안 만나요. 나한테 오스카 단어 꺼내는 사람은 다 ‘X’ 치고 있어요. 그 얘기 하지 마세요.
이건 여쭤보고 싶어요. 골든글로브에서 <미나리>가 작품상 후보가 아니라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면서 논란이 일었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미나리>는 대사 대부분이 한국어지만, 미국 영화사인 플랜 B가 제작했고, 미국 국적의 감독이 미국에서 연출한 영화다. 지난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영화 <페어웰>의 중국계 미국인 감독 룰루 왕도 트위터에서 “올해 <미나리>만큼 미국적인 영화를 보지 못했다”며 “미국인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구시대 규칙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나도 여러분이랑 똑같이 골든글로브를 텔레비전에서 본 사람이에요. 어떻게 후보에 오르는지 모르기 때문에 할 말이 없어요. 여러분이랑 같은 심정이죠.
영화 <죽여주는 여자>로 몬트리올 판타지아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할 때 “영화제가 수학 경시대회는 아니니 그저 운이 좋았나 보다 해요”라고 말씀하셨죠. 그렇죠. 상을 받는 순간은 행복하지 나쁘진 않죠. 하지만 연기를 비교하는 건… 이 사람이 저 역할을 했고, 나는 이 역할을 했을 뿐이에요. 노미네이트되는 사람들 모두 상 받을 만하고, 어떤 사람이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의 문제지 점수를 매겨선 안 돼요. 이런 수상 시스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미나리>의 할머니는 쿠키를 구울 줄 모르고, 말도 험하고 고스톱 좋아하고 TV로 격투기를 보느라 손자의 옷을 챙겨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할머니가 가족을 구원하죠. 인자한 할머니가 아닌 이렇게 설정된 할머니 캐릭터가 어떠셨나요? 아이작은 굉장히 기억에 남는 감독이에요. <미나리>가 감독의 자전 영화잖아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죠. “너희 할머니 흉내를 낼까?” 그러지 말라더군요. 선생님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요. 아이작이 내게 부여한 공간이자 자유죠. 그러니 순자는 아이작의 실제 할머니가 아니라 내가 표현한 거예요. 이런 거만 봐도 아이작 ‘스마트’하지 않나요? 실제에 집착하면 다큐멘터리를 찍어야죠.
<미나리>는 촬영 화면도, 배우 연기도 담백합니다. 분노할 상황임에도 감정이 지나치게 격앙되지 않아요. 지금 세계가 윤여정에 빠진 이유도 노스탤지어를 뛰어넘는 복합적인 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장면인지 말할 수 없지만 감독이 마지막 15분 클라이맥스에서도 담담하게 연기해달라고 부탁했나요? <미나리>를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요. 우리는 한국 특유의 끈끈함, 드라마틱함을 좋아하고 익숙하잖아요. 근데 이 영화는 담백해요. 질척거리지도, 끌어안고 울고 불고 하지도 않아요. 나랑 스티븐, 한예리도 영화의 담백함을 어떻게 표현할지 매일 토론했어요. 무엇보다 아이작 본인 자체가 흔들림 없이 조용한 사람이라 이런 영화가 나왔죠. 이건 아이작의 영화예요.
특히 어린 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 같아요. 수입한 영화사도 본전을 뽑아야 할 텐데 말이죠. 왕창 벌진 못해도 잃으면 안 되잖아요. <미나리>를 많은 미국인이 이민자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거 같아요. <아이리시맨> 같은 이민자의 영화가 수도 없잖아요. 우리나라에선 어떤 식으로 다가설지 궁금해요. (윤여정은 현장에서도 여러 사람에게 영화 감상평을 계속 물어봤다.)
영화에서 할머니가 미국 딸네 집에 도착하자 싸온 짐을 풀어요. 각종 한식 반찬, 아픈 손주가 먹을 약이 끝없이 나오고, 그곳에는 미나리 씨앗도 있죠.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미나리는 부자든 가난하든 다 먹고, 찌개 끓여 먹고 국 끓여 먹고, 아플 때 약도 된다. 미나리는 원더풀.” <미나리>의 제목을 두고 외신에선 “미나리는 한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나물”이라며 미국에서 삶을 개척해나가는 한국인으로 연결 짓곤 해요. 제게 미나리는 모두를 구원하는 할머니의 사랑으로 다가왔어요. 그 이유를 밝힐 수 없지만요. 미나리의 의미는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알다시피 미국에는 미나리가 없어요. 종종 미나리를 영어로 ‘차이니스’ 어쩌고라고 부르는데, 나는 듣기 싫어서 인터뷰마다 ‘코리안 워터크레스’라고 해요. 샐러드 할 때 먹는 식물인데 미나리랑 비슷하거든요. 아이작의 할머니가 실제 미나리씨를 미국에 가져가 심었대요. 아이작은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울 것 같아요. 첫 시나리오 리딩 때도 울어서 내가 휴지를 줬죠. 할머니한테 지은 죄가 많더라고요. 영화에서 손주가 할머니한테 오줌을 음료수라고 갖다주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 그랬대요. 지금 아이작 성품을 보면 상상이 안 가요. 요즘 저런 친구가 있나 싶을 정도로 현명하거든요. 내가 “You are so mean”이라고 뭐라 하니까 어릴 때 할머니 냄새가 싫었대요. 생각해보면 좀약 냄새였던 거 같아요. 예전 우리 할머니들이 옷장에 좀약을 넣었잖아요.
선생님의 할머니도 생각났을 거 같아요. 많이 그랬죠. 난 아이작을 이해할 수 있어요. 증조할머니랑 열 살 때까지 살았어요. 내가 그렇게 증조할머니한테 못되게 했어요. 한국전쟁 때니까 동네에 몇 시간 동안 수도가 안 나와서 할머니가 쓰던 물을 또 썼거든요. 어린 마음에 더럽다고 싫어했어요. 지금까지도 죄송하다고 기도해요. 60대가 되어서야 증조할머니 얘기를 들었어요. 부잣집에서 시집온 어린 처녀가 집에 곧 다시 갈 수 있을 줄 알았대요. 근데 우리를 다 먹이고 살림하느라 무진 애를 썼죠. 그런 할머니한테 더럽다고 말한 생각을 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엔딩 크레딧의 끝에 ‘To All Our Grandma’라고 떠요. 서양 사람들에게도 할머니 이야기가 터칭(Touching) 했대요. 다 같이 느끼는 게 있나 봐요.
할머니는 만국 공통어죠. 또 모르죠, 일이 다 끝난 다음에 우리 맘대로 해석하는지. 하하. 찍을 때는 5주 안에 모두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그냥 열심히 했거든요. 근데 생각해보면 감독 정말 대단해요. 마흔네 살밖에 안 된 감독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화 한 번 안 냈어요. 감독이 제일 잘하는 한국어가 ‘선생님’이에요.그의 ‘선생님’이란 호칭에서 나에 대한 존경이 느껴져요. 감독이 외국 스태프들에게 큰절을 가르쳐서 나한테 해줬어요. 정말 울컥하더라고요.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어야 하는데, 다들 절하느라 못 찍었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겠네요. 그렇죠. 아이작의 마음이 남아 있죠.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어떤 장면인가요? 아이작의 좋은 점은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정직하고 깨끗한 눈으로 본다는 거죠.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교회에서 데이빗에게 서양 꼬마가 “Why your face is so flat?”이라고 물어요. 다른 감독은 그걸 인종차별로 비틀곤 하잖아요. 그런데 데이빗은 못 알아들어요.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 없으니까. 정말 세련됐죠? 선댄스영화제에서 <미나리>를 보면서 다시 한번 느꼈어요. 아이작이 맞았구나. 나처럼 신파에 익숙한 사람보다는 젊은 사람 얘기를 들어야 해.
할머니와 손주가 미나리밭에서 뱀을 마주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할머니가 손주를 안심시키려는 대사가 기억에 남아요.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거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 있는 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아이작이 그 대사를 ‘Meaningful’하게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데이빗(손주) 일생에 남는 말이 되길 바란다고. 아이작이 제게 한 첫 요구죠. 처음 받은 영어 대사는 꽤 복잡해서 한국말로 알아듣기 쉽게 계속 고쳤어요. 봉준호 감독과 아이작의 대담을 보고 알았는데, 그 대사가 세인트루이스에 사는 아이작 친구의 시래요.
영어 대본을 한국어로 고치느라 많이 애쓰셨군요.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죠. 내가 인복이 있는 사람이라, 홍상수 영화 번역을 많이 하는 친구가 촬영장으로 왔어요. 걔는 그냥 “선생님 미국 영화 잘 찍으시나” 연락 한번 해본 건데, 촬영장에 눌러앉게 됐어요. 스태프 회의까지 참석했죠. 실은 내가 그 친구 휴가 갈 비행기값까지 물어주면서 도와달라고 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 나 이 영화 투자자네요? 하하.
마음에 남는 대사는 어떤 대사인가요? 마음에 남기보다는 아이작이 무척 좋아해준 대사가 있죠. 데이빗이 할머니에게 오줌을 주고 “코리안 스멜 난다”고 했다가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게 돼요. 데이빗이 밖에서 자기가 맞을 나뭇가지를 꺾어와야 하는데 하늘하늘한 이파리를 들고 오잖아요. 아이작 감독이 할머니가 이 신을 마무리하는 한마디를 했으면 좋겠대요. 나는 애드리브에 강한 배우가 아닌데. 내가 생각한 게 데이빗이 아버지를 이겨먹은 거잖아요. 그래서 “니가 이겼다”고 말했죠. 이 대사를 하니까 아이작이 너무 기뻐하더라고요. 그 얌전한 사람이 활짝 웃더라고.
우리 할머니도 자주 쓰시는 말이에요. 네가 날 이겨먹으려고 하는구나. 선댄스에서도 그 장면에서 다들 엄청 웃더라고요. 내 자랑이지만, 나 잘했네 싶었지.
영화에서 미국에 사는 딸 집에 갈 때 흰색 원피스를, 교회 갈 때도 같은 옷을 입죠. 할머니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일 텐데요. 어떤 옷을 고를지 고민 많았을 거 같아요. 워낙 패션에 일가견이 있으시니까요. 감독이랑 소품, 미술 팀이 정말 잘했어요. 영화 <페어웰>에도 참여한 한국 친구인데 얼마나 애를 썼다고요.
서랍장 바닥에 흰 종이를 까는 디테일에 놀랐어요. 제가 어릴 때도 할머니가 농협에서 주는 큰 달력을 찢어서 장에 깔았거든요. 스태프가 한국인이고, 자기 할머니를 봐왔으니까 그런 디테일이 나올 수 있죠. 아마 할머니는 그 서랍에 좀약도 넣었을 거예요. 하하.
예능 프로그램 <윤스테이>를 일부러 안 보신다고요. 맞아요. 일부러 그래요. 촬영하면서 알레르기는 심하게 올라오지, 온도 차가 심해서 볼은 빨갛고 콧물은 뚝뚝 떨어지지. 나중에는 휴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그 모습을 보기 싫더라고요.
젊은 팬들이 난리예요. 선생님처럼 유머 있고 싶다, 영어 잘하고 싶다, 세대에 얽매이지 않고 소통하고 싶다
고요. 나한테 배울 거 하나 없어요.
위트와 유머는 타고난 건지, 길러진 건지요? 웃고 살다 죽기로 결심했거든요. 살다 보니 힘들어서 사람도 웃기고 즐거운 애들만 만나요. 심각하게 앉아서 영화를 논하자는 애들은 멀리 피하고.
인생에서 유머가 굉장히 중요하군요. 정말 그래요, 날 웃겨주는 사람이 제일 좋아요.
아이작 감독은 “영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자전 영화를 만들 줄 알았다”고 했어요. 선생님께서도 자전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내용이 주가 될까요? 나는 절대로 안 하죠. 하하. 다시 말하지만 나 아직 살아 있고 여기저기 일하러 다닐 수 있어요. 그거면 됐죠.
-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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