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에 매료되다
그릇과 다완, 가느다란 화병까지. 공예와 예술 사이의 경계에서 도자의 조용한 매력이 우리의 일상을 채워가는 요즘이다. 보다 내밀하면서도 친근하게 다양한 도자를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찾았다.
평소 집 안의 세간살이 하나 허투루 고르지 않는 감도 좋은 선배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건 그녀의 그릇 컬렉션과 그것으로 차린 식탁 위 풍경을 만날 때다. 가야산 자락의 도예가가 만들었다는 한쪽이 이지러진 커다란 접시, 장작 가마에서 구워내 흙색이 여러 갈래로 어우러진 그릇, 교토에서 사왔다는 무채색 간장병, 어머니가 물려주신 조선시대 화병에 은난초가 꽂힌 식탁은 마치 정물화를 바라보듯 내 시선을 그윽하게 길어냈다.
최근 취향 좋은 그녀들 사이에서 도자를 향한 관심과 경험에 대한 욕구가 실로 뜨겁다. 실제 사용하는 그릇, 다기, 화병은 물론이고 그저 바라보며 감각하는 오브제인 도자 역시 집 안 한쪽을 채워가고 있다. 그 옛날 코렐과 포트메리온을 세트로 들여놓고 만족스러워하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취향을 기억한다. 그리고 불과 수년 전, 아라비아 핀란드와 이딸라 같은 북유럽 그릇에 매료되던 시절을 지나 도예를 향한 지금의 애착과 관심은 리빙 분야의 또 다른 현상이라 할 만하다. 나 역시 오래도록 도예가의 그릇과 찻잔, 크고 작은 접시를 찬찬히 모아왔고, 매일매일 심미와 실용의 목적을 아우르며 사용하고 있다. 몇 해 전, 그릇을 사러 나고야의 어느 주택가 숍에 들렀을 때 그곳 주인 이안이 이런 얘길 들려주었다. “디자인이라 불리는 것의 영역에는 주로 밝고 팬시한 것이 많은데, 우리를 사로잡은 건 조금은 어둡고 묵직한 도자의 면모예요. 물성 그 자체 그리고 재료를 매만진 손길이 드러나는 게 바로 도예의 가장 큰 매력이죠.”
도자는 사용하거나 매만질수록 그 오묘한 형태와 질감, 무엇보다 물건에 애정을 가질수록 도예가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진다. 공장에서 찍어 만든 것들의 매끈함과는 비견할 수 없는 감각이다. 같은 것이라 하더라도 도예가의 손길, 가마의 상황과 조건, 흙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그 무엇도 동일한 것일 수 없는 유일함. 이는 일견 예술의 그것과도 통하는 것인 동시에 음식을 담고 나의 촉각과 닿는다는 생활감이 있어 더욱 정감 어리고 편안한 유일성이다. 최근 도자를 향한 애정과 관심의 저변이 넓어진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젊은 도예 작가들의 활발한 활동도 한몫한다. 과거 엄격하고 치열하게 자신의 사명으로서 도예에 임하던 ‘선생님’들의 작업도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젊은 작가들이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감각으로 자신들의 작업을 브랜드화하는 흐름도 눈에 띈다. SNS를 통해 자신들의 작업을 소개하는가 하면 크고 작은 공간에서 전시에 참여하면서 공예를 친숙한 영역에서 선보이는 작업에 적극적이다. 일상품과 예술품 사이의 다양한 기물을 소개하는 가게가 늘어난 점도 도예에 대한 너른 관심을 견인한다.
오랜 관심은 애정을 길러내는 법. 좀 더 특별하게, 좀 더 내밀하게 도자를 만나고 구입할 수 있는 몇몇 공간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인사동을 걸어 공예 장생호에 도착했다. 1976년부터 어머니가 운영해온 고미술 가게 장생호의 이름을 따 근처에 현대 공예를 소개하는 공간으로 운영 중이다. 나른한 햇살이 깊숙이 들어오는 흰백의 공간에 새하얀 백자, 담백한 검은 그릇, 가야의 토기에 동백꽃이 둥글게 담겨 있었다. 대학 시절 도예를 전공했다는 정현주 대표는 “한국적인 걸 좋아하는데, 그 기준 또한 모호하죠. 일단 장식이 많지 않고 사용하기에 편안한 걸 추구해요. 무엇보다 제 미감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주로 소개해요”라는 말로 공예 장생호의 성격을 내비쳤다. 그리고 담백한 다기에 뜨거운 차를 내려주었다. “옛날엔 도자 작품을 너무 무겁게 여기셔서 직접 갖는 걸 엄두를 못 내셨죠. 근데 요즘은 하나쯤 소유하고 잘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도자를 심리적으로 편하게 대하시는 것 같아요.” 대화 도중, 장생호의 문을 열고 들어온 한 단골손님은 이곳이 도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한다고 수줍게 말했다.
싸한 겨울 찬 공기를 만끽하며 서촌으로 향했다. 통의동의 한 건물 3층에서 작업을 하는 조희진 작가의 공간이다. 오롯이 작업을 위한 사적 공간이기에 작가와 미리 약속해야만 방문할 수 있다. 미완성인 채 형태를 만들어가는 커다란 화병, 가마에 들어갈 채비를 마친 몇 개의 접시, 바닥에 떨어진 유약 흔적에서 작가의 분주한 시간이 느껴졌다. 작은 원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접시가 되고, 화병이 되는 조희진 작가의 독특한 조형성은 최근 오픈한 찻집 토우베(Tove)에서 사용하면서 인스타그램 피드에 아름답게 출현하곤 한다. “유닛 같은 작은 면을 이어 붙여 한 덩어리를 만들어요. 부분이 전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직관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무한 증식하듯 원형의 면면이 이어지다가 어느덧 작은 그릇, 화병, 잔의 쓰임새로 변모하는 과정. 그리고 그걸 하나하나 이어 붙였을 작가의 노동과 시간의 궤적이 그대로 느껴지는 작업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작업 앞을 서성이다가 장인적인 앤티크 무드가 묻어나는 촛대 하나를 집었다. 굳이 초를 꽂지 않아도 놓인 자리 어딘가를 밝혀줄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지만 잠시 작가의 공간을 공유하고, 감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건 도자에 기대 우리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적 풍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남동의 사유집은 골동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보람, 이소희 대표가 운영한다. 자신들의 꾸준한 컬렉션을 바탕으로, 국내 작가와 일본 작가의 작업은 물론 조선시대와 신라시대 토기, 아프리카의 빈티지까지 두루 아우른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어딘가 묵직한 톤과 손으로 빚고 다듬은 물건의 흔적은 묘한 어울림을 이룬다. “저희는 공예보다는 민예품, 옛날 사람들이 직접 생활에서 쓰던 투박한 모양새나 손으로 만든 흔적을 더 선호해요. 어떤 물건은 깨진 흔적이 있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특유의 안쓰러움의 정서가 있어요. 그런 걸 더 좋아해주시는 손님도 계시고요.” 티베트의 나무 그릇, 영롱한 색유리 화병과 조선시대의 등잔대, 중국의 홍토기. 하나하나 비밀스러운 긴 이야기를 간직한 듯한 물건을 탐색하느라 해가 기우는 줄도 몰랐다. 고심 끝에 부산에서 활동하는 키요 작가의 새하얀 화병 시리즈를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화병의 둥글둥글한 모양새가 넉넉한 미소를 던지는 것 같았다. 흰 종이로 곱게 포장 중인 그녀에게 사유집의 의미를 물었다. “이런 물건을 만들고 사용하던 옛사람의 삶이나 생각을 되돌아보자는 의미예요. 더불어 이 공간에 대한 기억도 간직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어요.” 아름다움에 대하여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감정을 공유한다는 건 새삼 기쁜 일이라는 걸 느끼며 돌아오는 길, 일본의 텍스타일 디자이너 미나 페르호넨이 찻잔 시리즈를 발표하며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산책 도중에 발견한 꽃을 따는 듯한 기분으로 컵을 잡는 모습을 생각해 이 작은 컵을 디자인했어요.” 산책 도중 꽃을 따는 듯한 기분, 우연 같은 끌림으로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하게 된다면 정말 그런 기분이 들 것만 같다. 깨지기 쉬운 반면에 그 뜨거운 불의 온도를 견디고 나온 도자의 밀도와 깊이는 그 아름다움을 영속적으로 만들어준다. 오늘도 나는 깨끗이 씻은 청색 유약 그릇을 싱크대 찬장 대신 거실 사이드보드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 에디터
- 공인아
- 글
- 박선영
- 포토그래퍼
- 김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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