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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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전시

2022-04-27T19:22:27+00:00 2022.04.28|

지금 광화문 한복판에는 잡지 촬영 현장의 한 순간이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 있다. 12년간 패션지 기자로 일해온 기획자와 동시대의 주요 사진가 29명이 참여한 전시 <언커머셜: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는 우리 일상의 수많은 이미지와 이를 만들어온 모든 이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스톰=292513’의 사진으로 표지를 싼 다이어리 한 권을 갖고 있다. ‘S’가 새겨진 연두색 양말을 신고 트렌치 코트 차림으로 밝게 웃는 스무 살의 김하늘과 독수리 로고 모자를 쓴 모델 하랑의 모습. 1915년생인 롤랑 바르트가 우연히 나폴레옹의 막냇동생 제롬의 사진을 보고 “황제를 보았던 두 눈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꼈다면 나는 이 브랜드 카탈로그 화보에서 어제 일처럼 생생한 1995년과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당시 ‘틴에이저’라면 누구나 동경하던 듀스의 김성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그와 함께 ‘스톰’의 모델로 활동하던 신인 모델들은 바로 그 스타와 가까이에서 그가 입었던 옷을 입고, 그와 같은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모델들의 포즈는 제멋대로 굴어도 뭐든 쿨하고 유쾌한 청춘 그 자체였고, 내게도 이런 멋진 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즐거움과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그 무렵 10대 시장을 겨냥해 쏟아져 나온 잡지와 브랜드는 자체적으로 모델 선발 대회를 열었는데 사진 응모를 통해 하루아침에 평범한 학생에서 스타가 된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이 오래된 광고 사진은 그 시절 존재하던 사람들과 현실을 드러냄과 동시에 외롭고 별 볼 일 없는 지방 소도시 사춘기 소녀의 절망과 꿈을 상기시키며 그날의 분위기를 지금, 이 자리로 불러온다.

그 유명한 ‘스톰’의 광고 사진을 찍은 사람이 조세현과 안성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나중의 일이다. 4월 8일부터 오는 6월 26일까지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언커머셜: 한국 상업사진, 1984년 이후>는 나의 이런 사사로운 기억과 잡지사 기자, 기획자로서 일해온 지난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암실에서 인화한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밝은 방>이라는 아이러니한 이름의 책으로 엮은 것처럼 이번 전시는 한국의 상업사진을 상업 매체의 지면이 아닌 미술관이라는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전시한다. 제목도 ‘언커머셜(Uncommercial)’이다. 미술관 학예 팀으로부터 상업사진 전시를 기획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땐 제목만 나온 상태였다. 막연하나 매혹적이었다. <동아일보>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인 만큼 현재는 폐간된 1980년대 대중 패션지 <월간 멋>의 실물 자료가 존재했고, 연구자이자 기획자로서 1세대 상업사진가 김한용을 연구해온 한금현 선생의 ‘김한용 아카이브 특별전’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외는 텅 빈 백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까지 한국 상업사진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의 사방에 넘쳐나는 이미지와는 별개로 상업사진은 학술적인 연구가 거의 진행되지 않았을뿐더러 예술 기관의 진지한 아카이빙이나 관련 전시도 드물다. <보그 코리아>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2016년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Mode & Moments: 한국 패션 100년> 전시를 기획할 때나 어느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카이브 전시를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늘 일상에서 접하는 패션이나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또 그 사진에 대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록하고 보관해야 할 가치를 못 느끼는 듯하다. 물론 곧 영국 V&A에서도 한류 전시회가 개막한다는 요즘은 상황이 꽤 달라지긴 했으나 급속도로 성장한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제외하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잡지사 피처 기자로 미술이나 디자인에 관해 조금씩 글을 쓰던 내가 난데없이 한국 디자인과 우리 술을 소개하는 공간 꽃술을 운영하고 전시 기획을 하게 된 것도 사실 그 때문이니까 말이다. 상업과 예술의 중간에 위치한 많은 것(패션, 건축, 인테리어, 가구/제품 디자인, 대중음악, 상업사진 등)을 전시나 연구 같은 비상업적 목적으로 다루는 전문가가 없다. 덕분에 미술 전공자도 제품 판매자도 아닌 나는 에디터라는 중간자로서 ‘중간 예술’을 중심 소재로 이쪽과 저쪽을 오가며 어중간하게 먹고살고 있다.

본격적인 전시 준비는 지난 1월부터였다. 친한 잡지사 선후배들과 삼삼오오 모여 우리가 함께 작업해온 사진가들의 이름을 열거한 후, 충무로에서 강남으로 스튜디오를 옮겨온 1990년 전후를 기억하는 사진가들을 한 명씩 만나 밑조사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찾은 건 초기 청담동 문화를 꽃피운 사진가 김용호의 작업실이었다. 연예인과 모델, 기자, 사진가, 영화감독들이 모여 마치 벨 에포크 시절 파리의 예술 살롱 같았던 ‘카페 드 플로라’와 숱한 브랜드의 광고를 탄생시킨 ‘도프앤컴퍼니’는 지금도 업계에선 전설처럼 회자된다. 무크, 엘칸토 등의 사진 촬영뿐 아니라 광고 대행 및 기획을 함께 진행했으며 백종열을 비롯한 유능한 창작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1994년 패션사진작가협회가 결성된 것도 유명 사진가이자 문화 공간의 운영자였던 김용호의 힘이 컸다. 그의 작업실에서 옛 카탈로그를 발견했을 땐 보물 상자라도 찾은 것 같았다. 인천 차이나타운과 부산 어시장에서 뱃사람들과 함께 촬영한 1980년대 패션 브랜드 ‘하리케인’ 카탈로그를 비롯, 갓 모델 활동을 시작한 이정재가 늠름한 상체를 드러낸 ‘베이직 진’ 청바지 화보, <보그>의 초대 편집장 이명희 상무가 글을 쓰고 김중만, 김용호, 조남룡, 조세현 네 명의 당대 톱 사진가들이 촬영한 닉스 카탈로그, 88 서울 올림픽 전후로 광고 시장이 개방되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외국인 모델 화보와 본업인 미술은 물론 최근 배우로도 맹활약 중인 백현진이 모델로 출연한 신발 브랜드 개그(Gag)도 있었다. 김용호의 구술과 조선희, 김보성, 홍장현, 목정욱 등 <보그> 기자 시절 인연을 맺은 사진가들의 도움으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하나씩 맞춰졌다.

그 시절 김용호가 ‘엘칸토’의 비주얼을 책임졌다면 ‘에스콰이아’는 구본창이었다. 시스템이 김용호라면 EnC는 구본창, 당시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의 미술 큐레이터들은 구본창이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한 <사진, 새 시좌>(워커힐미술관, 1988) 전시나 ‘태초에’를 비롯한 일련의 작업이 한국의 현대 사진을 논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건 알아도 그가 영화 포스터와 음반 사진 작업을 했고 꽤 상당한 양의 광고 비주얼을 만들어왔다는 건 잘 모른다.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작업한 <보그>의 ‘탈’ 화보는 물론 그가 사진에 한국적 요소를 담는 계기가 된 디자이너 이영희의 한복 컬렉션 북, 진태옥의 아트 북, 김동순의 울티모 화보를 비롯, 영화 <깊고 푸른 밤>, 가수 김완선의 바이닐 음반 커버 사진과 디자인까지 구본창은 본인이 작업한 거의 모든 자료와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다. 국내에 기성복 브랜드 개념을 처음 도입한 논노에서 출시한 남성복 알렉시오의 화보는 또 얼마나 근사한지. 1980년대 남영동의 어느 담벼락 앞에서 멋지게 점프하는 남자 모델은 레스토랑 일마레 대표이자 모델 엘리스의 아빠이기도 한 안도일이다. 인화된 사진을 실과 바늘로 조각조각 이어 붙인 ‘태초에’의 작업 방식을 차용한 오리지널 리 화보를 발견했을 땐 너무 기뻐 소리를 질렀다. “언젠가 필요한 날이 올 것 같아 브로마이드 하나도 함부로 버릴 수가 없었다”는 그는 자신이 찍은 김중만의 영에이지 신문 광고 사진을 보여줬다. 덕분에 지금 전시장에는 1990년대 초 전문직 프리랜서의 상징처럼 광고 모델로 각광받던 김중만의 옛 모습이 김중만이 찍은 닉스 카탈로그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김영수는 그보다 한 해 앞서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에스콰이아의 ‘포트폴리오’를 찍었다. 1996년 9월호 <보그> 기사에선 사진작가를 하청 공장쯤으로 여기는 일부 광고주와 한국의 현실을 탓하며 국내에도 브루스 웨버의 옵세션이나 닉 나이트의 질 샌더, 헬무트 뉴튼의 월포드 광고처럼 사진가와 브랜드가 만나 시너지를 발휘하는 사례가 있다고 김영수를 소개한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포트폴리오’란 단어가 주는 예술 작품의 느낌을 소비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진 액자를 주로 사용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도시가 주는 느낌인 콘크리트나 철판, 대리석과 같은 소재를 제품의 배경으로 사용했다. 구도와 라이팅은 지금 봐도 세련되었고 합성이나 리터칭이 거의 불가능하던 필름 카메라 시절의 사진이라는 걸 고려하면 놀랍기까지 하다.

이번 전시는 1984년을 상업사진계에 새로운 물결이 시작된 원년으로 상정한다. 생각해보면 그해엔 많은 일이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전 세계에 동시 송출했고, 애플 매킨토시 128K가 시판되었으며 한국에선 왕복 2차로의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연예가중계>는 그해 첫 방송을 했고, MBC 강변가요제에선 이선희가 ‘J에게’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가 편집 디자인을 맡고 김중만이 표지 사진을 촬영한 <월간 멋>이 동아일보에 인수되어 파리 <마리끌레르>사와 제휴를 맺었고 기성복 브랜드가 앞다퉈 출시되며 컬러의 시대에 부응한 총천연색 이미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1세대 유학파 사진가들이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신발 광고에 모델이 출연한다던지 단순히 제품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기획 의도를 담은 스토리가 있는 광고 이미지도 등장했다.

그간의 상업사진에 관한 논의가 기호와 코드의 분석이나 연예인 초상 사진에 대한 언급에 그쳤다면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이후 한국 상업사진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조명하고 그 변화의 과정을 살핀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와 대중의 취향, 여기에 다양한 협업자의 존재와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상업사진에는 그 시대와 문화에 속한 이들의 집단적 준거로 수용되는 정당성과 아름다움이 있고, 그 수많은 욕망 틈에서 카메라를 든 작가 개인의 역량과 미적 감수성이 피어난다. 스튜디오 내에 컬러 암실을 두고 사진 완성의 마지막 단계인 인화의 순간까지 본인의 색채를 드러내기 위해 고심했던 박지혁과 흑백의 네거티브 프린트 사진으로 특유의 서정성을 선보인 이건호의 필름 사진,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된 후 상업사진의 새로운 경향과 형식적인 실험, 영상, 게임, 3D 그래픽이 결합된 최근의 작업까지 이번 전시를 통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이들의 카메라가 포착한 것은 우리 모두가 동경해온 멋과 꿈이기도 하다.

참여 작가들은 패션이나 엔터테인먼트 업계 관계자라면 익숙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며 나 역시 한 번쯤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었거나 <보그>의 촬영 현장에서 만났던 이들이다. 어떤 사진을 찍는 사진가인지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전시장에서 보는 이들의 작업은 또 다른 생각과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전시를 핑계로 오랜만에 그리운 이들과 만나 한참 수다를 떨었다. 금강산 관광이 허락되자마자 어마어마한 옷 짐을 싸 들고 산을 올랐던 선배 기자들의 열정과 1990년대 압구정과 X세대의 표상이었던 국내 첫 스트리트 매거진 <인서울>을 비롯한 숱한 잡지, 지금은 사라진 브랜드에 대한 기억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모델들의 앳된 얼굴들은 또 어떤가. 홍진경이 베네통의 글로벌 모델로 선발(1994)되었다는 사실이 대서특필되고 변정수가 한국 모델 최초로 해외 패션쇼 무대에 선다는 사실에 모두가 흥분하던 게 2000년이다. 고작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 모델들은 해외 매체의 표지 모델을 장식하고 사진가들은 SNS와 한류를 타고 전 세계로 진출하는 중이다. 주어진 공간의 한계로 상업사진계의 모든 주요 작가를 포함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 전시가 하나의 계기가 되어 한국 상업사진의 아카이빙과 연구가 진행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거리의 전광판, 버스 정류장, 백화점, 버스와 지하철, 스마트폰의 작은 세계 안에도 이미지가 넘쳐난다. 그야말로 이미지의 시대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그 이미지와 숨은 이야기에 대한 전시는 오는 6월 26일까지.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