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하게 살아 있는 낯선 목소리들로 만든 예술
며칠 전 막을 올린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돌아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번 주제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Foreigners Everywhere)’에서 ‘외국인’은 비단 인간에 그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첫 남미 출신 예술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는 “외국인, 이민자, 실향민, 망명자, 난민 예술가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공표했지만, 이방인의 목소리에 진정 귀 기울이게 된 건 이번 비엔날레가 인간계뿐 아니라 비인간계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지구상 모든 생물과 무생물의 존재를 미술적으로 호명하는 작품은 세계의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합니다. 이쯤 되니 베니스 비엔날레 개막 직전 부랴부랴 리움미술관으로 달려가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을 보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파레노야말로 일찌감치 세계를 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동시에 결합하는 영역으로 간주하고, 인간 중심의 편협한 시선을 부지불식간에 전복해온 대표적인 미술가이니 말이죠.
서울에서 열린 필립 파레노의 전시가 베니스 베엔날레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진 건 이 전시를 구성하는 숱한 목소리들 때문입니다. 전시 제목인 <보이스(VOICES)>, 즉 작가의 작업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요소인 ‘다수의 목소리’는 작품과 전시의 서사를 만들어내는 목소리(들)이기도 합니다. 또 인간계 안팎의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상징인 동시에 실제 작품을 일컫기도 하죠. 전시장에서는 낯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요. 배우 배두나와 협업해 창조한 겁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하고, 새로운 목소리는 새로운 언어인 ‘∂A(델타 에이)’를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아마도 전시가 끝날 때쯤 이 목소리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걸 습득해버렸을지도 모르겠네요.
“진공 상태처럼 느껴지는 화이트 큐브로서의 미술관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파레노는 전시를 유기적인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말을 증명합니다. 전통적인 오브제를 만드는 작가가 아님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생생하게 살아 있는 전시라니요. 그의 작업은 전시장 안팎을 연결해냅니다. 예를 들어 미술관 정원, 아니쉬 카푸어의 기념비적인 조각 대신 놓인 ‘막’이라는 탑은 인지능력을 갖춘 인공두뇌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죠. 센서를 통해 환경적, 사회적 및 내부 자극을 흡수·처리·상호작용하면서 주변 환경의 정보를 수집합니다. 작품이 전시장 내 옛 극장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불빛 형태의 ‘차양’과 연결되고, ‘막’의 데이터가 ‘차양’의 조명을 껐다 켰다 하는 방식인 거죠. 흔한 가벽처럼 생긴 ‘움직이는 벽’은 실제 조금씩 움직이며 매번 공간을 바꿉니다. 파레노는 이를 통해 전시라는 것이 작품을 모아 진열한 이벤트가 아니라 작품, 관람객, 공간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매체임을 몸소 보여줍니다. 이런 식으로 시간과 기억, 인식과 경험, 관객과 작품의 관계를 거침없이 새로 정의해온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보이스(VOICES)>는 압도적이되 과하지 않습니다. 놀랍지만 주눅 들 필요도 없죠. 그의 전시는 통합적인 경험의 장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은 인식을 바꾸는 가장 첫 단계입니다. 요컨대 어린이와 성인을 공히 매료시키는 물고기 풍선들은 ‘내 방은 또 다른 어항'(2022)이라는 엄연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건 그저 둥둥 떠다니는 물고기 따위가 아닙니다. ‘우연에 맡겨진 사물과 환경을 구성하는 조건이 인간의 행동과 시간 흐름에 대한 인식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한다’라는 설명글이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물고기를 만지고 싶거나, 나도 모르게 따라가게 되거나, 사진을 찍거나, 어쨌든 물고기와 동일한 공간에서 같은 시선을 공유하는 우리 자신을 인지하다 보면, 위 문장이 뜻하는 바를 직감할 수 있을 겁니다. 혹여 내가 틀린 건 아닐까, 걱정하지 마세요. 평생 예술 작품과 전시를 대하는 방식을 실험해온 작가가 여러분에게 원하는 것이 정답은 아닐 테니까요.
- 글
- 정윤원(미술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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