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취약한 존재기에 서로 기울지
영화관이나 공연장과는 달리 미술관은 관람객 개개인의 몸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누군가와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지만, 바로 옆이나 뒤에 바짝 붙어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공간이지요. 미술관만큼 우리 몸에, 존재에 관대한 곳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는 7월 20일까지 열리는 전시 <기울인 몸들-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는 각 개인의 몸을 통해서 사유가 깨어나는 미술관의 장소성을 전시 주제이자 방법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취약한 몸에 대한 고정관념, 미술, 건축, 디자인의 시점에서 몸을 환영하는 방식, 그리고 서로 다른 몸이 함께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이번 전시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정상성’의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 미술관이 어떻게 예술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천의 문제를 함께 탐구합니다.

‘기울인 몸들’, ‘살피는 우리’, ‘다른 몸과 마주 보기’, 세 가지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 초입에서 김 크리스틴 선의 ‘일상의 수어’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수어를 말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린 드로잉 두 점을 나란히 걸었는데요, 전시가 이러한 간극을 채워가고자 함을 시사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판테하 아바레시의 ‘사물 욕망’은 장애 신체에 투사된 성적 욕망의 불가시성을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전시의 흐름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각자 개체로 살아가던 우리를 하나로 묶어내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사진가 천경우의 ‘의지하거나 의지되거나’는 두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시간을 담은 퍼포먼스이자 사진 작품으로, 노년기 여성들과 오랜 친구들이 손을 붙잡은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최태윤과 연 나탈리 미크의 ‘일하지 않는 움직임/이주하는 몸들’은 ‘취약함’의 영역을 장애나 노화를 넘어 타자화의 단계로 해석하고 범위를 확장합니다.



사실 저는 이번 전시를 보면서, 또 다른 취약한 우리를 떠올렸습니다. 미술관은 늘 문턱 없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현대미술의 난해함과 현학적 난이도에 무감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현대미술이 말하는 바를, 가끔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는데, 아마도 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그 간극에 이상하게 주눅이 들곤 하는데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을 대면하는 우리의 복잡한 심경까지 신경 쓴 게 분명합니다. 단어는 매우 평이하고, 공간 구성도 날 서 있지 않습니다. 관람객의 움직임도 매우 느슨하고, 헐겁습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꽉 들어찬 기존의 미술관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바로 옆에서 유명 작가 론 뮤익의 블록버스터 전시가 열리고 있었기에, 다름의 감각이 더했을 겁니다. 그 많던 관객은 다 어디로 갔나,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말이죠.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미술뿐만 아니라 공연예술, 여성학, 인류학, 디자인, 건축 등 배경이 다양합니다. 특히 건축가인 리처드 도허티는 ‘농인 공간’ 개념 아래 수어 사용자들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점자 블록을 바닥에 설치했습니다. 장애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이 공간을 점자로, 몸으로 느끼도록 함으로써 이 장소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달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청각 자료가 풍부하고, 심지어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작품도 있습니다. 물론 미술관의 모든 전시를 이토록 친절하게 구성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 전시가 미래의 미술관, 혹은 훗날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아주 조금씩이라도 바꿀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제목 ‘기울인 몸들’은 취약한 몸을 의미하는 동시에 상대에게 다가가려는 몸짓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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