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이 세상에 없는, ‘있지 않은 책’이 있다? 그런 책에 대해 말하는, ‘있지 않은 북클럽’도 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는 사이, 수상한 북클럽에 모인 수상한 사람들이 읽었다는 수상한 책에 관한 책이 눈앞에 도착했다. 이름하여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2025, 출판공동체 편않)이다.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있지도 않은 북클럽이 펴낸 책은 무려 세계 책의 날인 4월 23일 세상에 나왔다. 이것은 기막힌 농담일까, 신랄한 풍자일까. 아니면 책이라는 매체, 책이라는 물성에 관해 다르게 상상해보자는 기발한 제안일까. 출판 시장의 불황과 ‘텍스트 힙’이 트렌드로 공존하는 출판계를 향한 일침일까. 책이 없는 상태를 통해 책이 있음을 생각하기. 혹은 그 반대를 사유하는 방식일까. 어쩌면 완벽하게 기습적인 유희일까. 무엇이 되었든, 일단, 무조건,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이 책의 정체가 무엇인가. 무지무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요상한 책 앞으로 슬글슬금 가서 일단은 책의 꼴과 모양새와 종이의 질감과 두께를 만져보고 눈여겨보고 펼쳐보기부터 시작한다. “이 책은 다양한 출판사와 분야에서 일하는 일곱 명의 출판 편집자가 2024년 4월부터 9월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한 ‘있지 않은 북클럽’의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이 문장은 곧바로 잊어도 좋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면, 앞으로 진행되는 있지도 않은 북클럽 모임원들의 말과 기묘하게 공명할 것이기에 그것대로 또 괜찮다.
각자가 정한 별칭으로 서로를 부르는 일곱 명의 편집자가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근황을 나누고 곧 있지도 않은 책에 관해 말하기 시작한다. 책의 내용과 저자 소개부터 간단하게 공유하고 이 책을 두고 든 생각과 질문을 풀어간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저자 에리아크 서맥이 썼다는 이 세상에 없는 책 <엑스브이우스>(랑그에파롤, 2024)를 말하는 북클럽 현장으로 가보자. <엑스브이우스>의 작중 소설가는 자신이 남긴 소설을 반드시 베르베르어로 출간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 내용을 말하던 북클럽의 참여자인 편집자 ‘오로지’는 “베르베르어가 사용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처럼, 내가 만드는 책도 판매되지 않으면 사실상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읽히지 않는다면, 관측될 수 없다면 생명력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77~78쪽)라고 묻기에 이른다. <엑스브이우스>가 불러일으킨 질문은 무엇이 편집자의 노동 가치와 책의 효용과 쓸모를 결정하는가로 이어진 것이다. 그뿐인가. 이와 같은 외서의 번역 작업 앞에서 편집자들은 “무엇이 좋은 번역인가“(87쪽)를 두고 골몰한다. 직역과 의역뿐 아니라 근래에는 AI 기반의 번역 작업을 둘러싼 입장과 경험 차가 공유된다. 편집자 ‘지호’는 출판 편집자가 하는 일과 AI 같은 기계가 하는 일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의도’ 여부일 것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갈등이든 충돌이든 폭력이든 혐오든, 글에는 읽는 사람을 아주 조금은 성가시게 하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90쪽) 이것이 어디 번역에만 국한되는 일일까. ‘과연 읽을 만한 글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잠정적 대답처럼 들리는 것이다. 어디 글뿐이겠는가. 영화를 보고 글을 쓰고 말하는 일을 하는 나로서는 위의 인용 문장에서 ‘글에는’의 자리에 ‘영화는’을 가져다 두는 건 자연스럽다.

있지 않은 또 다른 책 <뒷담 클럽>의 북클럽 현장은 어떤가. 이 책은 전현직 출판인 32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이하게도 32명의 공저자마다 담당 편집자가 한 명씩 있었고 이들까지 포함한 총 64명의 이름을 표지에 넣었다. 책을 만든 과정을 고스란히 표지에 반영한 것인데 여기에는 저자 중심으로 모든 게 맞춰진 출판 관행에서 벗어나 함께 책을 만든 편집자들의 역할을 정확히 기입하려는 의지도 표명했다. 출판 시장의 흐름도 짚는다. 편집자 ‘다든’은 <뒷담 클럽>의 배본 일이 “출판계가 선사할 수 있는 가장 큰 스펙터클의 경험“(134쪽)이라고 할 수 있는 도서전 바로 다음 날임을 눈여겨보고는 이 책은 거대한 출판 시장의 자본 흐름에 반기를 든 게 아니냐고 추측한다. 이어서 “지금의 출판업계가 좋은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것인지, 책을 만들기 위해 이야기를 억지로 발굴하고 있는 것인지”라고 지적한 어느 필자의 말을 인용한다. 두 가지 모두 흥미로운 문제 제기다. 독자의 양상도 변하고 있다. “세상에 읽으려는 사람은 없고 쓰고 싶은 사람만 많아지듯“(137쪽)이라는 편집자 ‘오로지’의 지적이든, “출판에서 메이저라고 하면 국내 문학, 특히 에세이와 자기 계발“(141쪽)이라는 점을 편집자 ‘윤수’가 말할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내가 일하는 영화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도 출품작이 역대급으로 많다”가 국내 여러 영화제가 매년 하는 말이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어렵사리 영화를 만들고 극장 개봉까지 했다고 한들 관객이 없어 괴로운 일이 반복되는 악순환이다. 일반 서점과 달리 도서전에만 가면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굿즈가 순식간에 동이 나는 것처럼 개봉하면 외면받아도 미개봉작 특별 상영이나 개봉 전 영화제 프리미어는 매진 사례가 이어진다. “읽거나 소장하려고 사는 책이 아니라 저 브랜드, 저 메이커에 돈을 내고 그들을 응원한다는 감각의 경험“(163쪽)이라는 편집자 ‘지호’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먼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영화를 본다는 희소하고 특별한 체험과 경험이 주는 만족이 아니겠는가. 특정 영화가 시장을 점유하는 방식도 비슷한 지점이 있다. 영화를 응원하겠다는 뜻으로 극장에 직접 가기도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영혼 보내기’라는 이름으로 영화 티켓을 사고 응원하는 게 관객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북클럽 마지막 시간에는 세상에나 본문조차 없고 그 외 책을 구성하는 요소로만 이뤄진 책 <없는 책>에 대해 말하기까지 한다. 이번 시간은 앞선 북클럽에서 나온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한데 모이는 듯한 인상마저 불러일으킨다. 본문 없는 책의 의도를 추정하던 편집자 ‘연다’는 모두가 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시대, 그 욕망을 분출하라고 촉구하는 책, “자기가 쓰고 싶은 이야기나 자기 삶을 내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씀으로써 완성되는 책“(240쪽)이라고 말하며 책을 통한 수행적 독자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반면 편집자 ‘히구치’는 “이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만든 사람들은 독자들이 지금 사고 싶고 필요한 게 무엇인지, 깊고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셨을까“(246쪽)라며 반문한다. 책을 만드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독자를 설정하고 독자와 만나려고 해야 한다며 능동적 기획의 필요를 역설한다. 없는 책 <없는 책>을 두고 기획자와 독자의 역할론이 대두됐다. 그뿐인가. <없는 책> 덕에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본문이 아닌 표 1부터 표 4까지, 책등, 일러두기, 판권, 목차 등을 하나씩 찬찬히 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없는 책> 가지고 책 자체만이 아니라 저희가 일하는 방식 등을 또 이것저것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251쪽) 편집자 ‘윤수’의 말처럼, 책과 책 만드는 이들 얘기가 책 없이도 즐거웠다.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있지도 않은 책을 만드느라 고생한 이들의 노고, 유통과 판매 과정과 그 변화의 경향을 말한다. 동시에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미래의 책을 말한다. ‘있지 않은 책’이라는 말에 희망을 조금 섞으면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언젠가는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책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있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은 과거의 책과 미래의 책 사이에 있는 책,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있을 예정인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나와 독자를 만나는 책, 미래의 독자와 만날 그다음의 책, 그 모든 책에 관한 책, 그 책은 이미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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