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의 베개를 찾아서
궁극의 베개는 어떤 걸까. 기원전 7000년경부터 이어진 난제에 대한 해답.

나는 베개를 직접 만든다. 시판 베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이렇게 되기까지 숱한 불면의 밤을 견뎠다. 알다시피 수면은 건강과 미용을 좌우한다. 베개는 그토록 중요한 수면의 질을 좌우한다. 그런데 모든 소비재가 멀미 나도록 과포화 상태인 요즘 세상에도 베개만은 내 몸에 꼭 맞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체 공학 설계를 자랑하는 수백만원짜리 베개도 내게 안 맞으면 돌돌 만 목욕 수건 한 장만 못하다. 안경점은 방방곡곡에 있는데 안경만큼 활용도 높고 개인차가 큰 베개는 커스텀 숍이 흔치 않다는 게 이상하다. 내가 너무 까다로운가?
나는 좁고, 길쭉하고, 납작하고, 폭신한 베개를 좋아한다. 가수 김수희와 배우 최화정은 예순이 넘고도 주름 없이 매끈한 목으로 유명하다. 그들의 미용 비결이 ‘노 베개’였다. 베개 없이 잤더니 디스크가 좋아졌다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모로 누워서 자기 때문에 베개가 필수인데, 그나마 존재감이 거의 없는 납작한 베개를 선호하는 게 다행이다. 문제는 이게 흔한 취향은 아니라는 거다.
집을 떠나 잠을 청할 때면 나는 옛 유럽 동화 속 공주님이 된 기분이다. 길을 잃고 방랑하던 공주님이 민가에 들러 잠자리를 내어달라 청한다. 민가의 주인은 그가 진짜 공주인지 확인하기 위해 첩첩이 매트리스를 쌓아 올린 다음 매트리스 사이에 콩알을 숨겨둔다. 곱게만 자란 공주는 그 콩알이 불편해서 잠을 설친다. 베개는 나의 공주님 시험대다.
호텔에 묵을 때면 나는 침대 가득 쌓인 베개 무더기를 몽땅 바닥에 내던지고 자그마한 스탠더드 섐에 머리를 붙이곤 한다. 스탠더드 섐은 장식용 쿠션이라 순면 베갯잇 대신 언제 마지막으로 세탁했는지 알 수 없는 거친 섬유에 싸여 있다. 비위생적인 베갯잇은 피부 감염의 원인이 되고, 거친 베갯잇은 얼굴에 미세한 긁힘을 유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우 유인나는 여행할 때 호텔 베개에 깔 개인 수건을 지참한다고 한다. 일부러 짙은 색을 선택해 분실을 방지한다는 것이다. 뷰티 전문가들은 아무리 좋은 나이트 크림을 발라도 베갯잇이 다 먹어버리면 소용없다며 천연 비단 사용을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착한 피부에 그렇지 못한 보디를 가진 나는 그저 다음 날 목이 뻐근할 게 두려워 납작한 장식 쿠션에 의지해 옹색하게 밤을 보낸다.
16세기 유럽 생활상을 담은 윌리엄 해리슨(William Harrison)의 <잉글랜드 묘사>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 조상은 통나무를 베개 삼아 자고도 행복했다. 베개는 오직 아이를 낳는 여인을 위한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지금(엘리자베스 1세 시대)은 모든 것이 너무 부드러워져 나라가 걱정이다.” 윌리엄 해리슨이 아이더 오리 가슴 털에 비단을 씌운 ‘아이슬란딕 다운’ 회사의 1만 달러짜리 베개를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 죄송하지만 영감님, 그 사치스러움이야말로 베개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요?
좋은 베개는 심신의 긴장을 무너뜨리고 보호받는 느낌이 들게 함으로써 밤새 우리의 작은 둥지가 되어준다. 윌리엄 해리슨이 나약함이라고 느낀 그것을 현대인은 휴식, 회복, 재생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공주님이 아니지만 현대 서민은 산업혁명 이전 어떤 왕족보다 훌륭한 문물을 누리며 산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부유층만 베개를 사용했고, 그마저 돌로 만든 것이었다. 자는 동안 입, 코, 귀로 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머리를 띄우는 용도였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악령을 쫓기 위해 신의 이미지를 베개에 조각했다. 그 역시 대리석, 상아, 도자기, 나무, 돌 따위로 만들어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부드러운 깃털 베개는 오랫동안 지배층의 전유물이었다.
한반도 사정도 비슷했다. 백제 시대 왕과 왕비의 목침, 고려 시대의 청자 베개 등은 몹시 아름답지만 그걸 베고 잘 엄두는 나지 않는다. 한약재를 채워 넣고 베갯잇에 수를 놓은 조선 시대 상류층의 베개는 그나마 실용적이지만 오늘날 베개와 비교하면 고문 도구에 가깝다.
푹신한 베개가 널리 보급된 건 섬유 공장 엔진이 돌아가기 시작한 산업혁명부터였다. 한동안은 저렴한 직물에 건초, 닭털, 거위털 등으로 속을 채운 베개가 널리 쓰였다. 1960년대 들어서는 관리가 쉬운 폴리에스테르가 이들 천연 소재를 대체했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공주님이 되었다. 잠 못 드는 공주님.
현대인은 신체리듬을 무시한 획일적인 노동시간, 과로, 블루 라이트와 카페인, 24시간 쏟아지는 자극 등으로 인해 만성 수면 부족에 시달린다. 하지만 사회구조도, 라이프스타일도 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더 좋은 침대, 더 편한 베개, 수면 클리닉 따위 대증요법에 공을 들인다. 특히 베개는 매트리스에 비해 교체가 쉬워 사용자들이 꾸준히 실험해볼 수 있는 항목, 즉 지갑을 열기 좋은 아이템이다.
요즘은 베개 속통만 해도 라텍스, 메모리 폼, 합성섬유, 말갈기, 양모, 깃털, 물, 쿨링 젤, 나뭇조각, 마른 허브, 곡물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고, 정형외과 의사와 함께 개발했다는 요상한 형태의 기능성 베개도 넘쳐난다. 유아용 짱구 베개부터 임신과 출산의 파트너 U자 베개, 수유 베개, 여행용 목베개, 피어싱이나 이어폰 착용자를 위한 도넛 베개, 코골이 방지 베개, 거북목 베개, 죽부인 대신 껴안고 잘 수 있는 캐릭터 베개··· 실로 모든 수면 환경을 위한 베개가 존재한다.
뉴욕의 더 벤자민 호텔은 1999년부터 10여 가지 베개 옵션을 제공하는 걸로 유명하다. 그들의 성공 이후 디저트처럼 다양한 베개 메뉴는 특급 호텔 서비스의 표준이 되었다. 객실에 메뉴가 비치되지 않더라도 컨시어지에 요청하면 숙면의 비밀 병기를 꺼내주곤 한다. 인테리어를 망치지 않기 위해 꼭꼭 숨겨둔 기능성 베개 말이다. 하지만 베개 종류가 아무리 많아도 인간의 신체, 수면 습관, 취향의 갈래보다 많을 순 없다. 이게 바로 베개의 딜레마다.
“모든 사람은 유니크하다. 당신의 베개도 그래야 한다.” 이건 네덜란드 물리치료사가 설립한 ‘테일러메이드 필로우(Tailormade Pillow)’의 캐치프레이즈다. 이들은 3D 스캐너를 이용해 고객의 어깨너비, 목 길이, 머리 형태를 측정하고, 수면 습관을 분석한 다음 3D 프린터로 베개의 곡선을 뽑아낸다. 기본 모델의 가격은 3,995달러, 약 580만원이다. 가장 비싼 모델은 24K 순금, 다이아몬드, 사파이어로 커버를 장식하고 루이 비통 케이스를 제공하는 ‘골드 에디션’으로 5만7,000달러, 약 8,300만원이다. 나는 베개에 이 정도 비용을 지불할 용기는 없어서 집에서 베개를 만들었다.
완벽한 베개를 찾는 나의 여정은 10여 년 전 시작되었다. 난생처음 방이 남아도는 아파트로 이사한 나는 안방을 최고의 수면실로 만들겠다는 혼자만의 목표를 세웠다. 호텔에서 푹 자고 나면 침대 시트와 베갯잇을 걷어서 브랜드를 확인하던 시절이다. 그렇게 라텍스 토퍼와 거위털 이불을 장만했다. 하지만 베개만은 결정이 쉽지 않았다. 메모리 폼 베개니 깃털 베개니 하는 것들을 온라인으로 구매했다가 후회하기 일쑤였다.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독특한 형태의 베개는 내 두상과 맞지 않으면 오히려 머리와 목에 힘이 더 들어가 피곤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본 듯 2016년 <보그>에 ‘숙면을 위한 비싼 베개’라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는 서울수면클리닉 홍일희 박사의 말을 인용해 오늘날 베개 마케팅에 도사린 함정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수면의 질, 호흡 장애 개선에 관해 정말 승인을 받았다면, 이런 베개는 공산품이 아닌 의료 기기로 판매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충격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비싸면 더 좋겠거니 믿지 말고, 자신의 수면 자세에 맞는 베개 디자인, 자신이 좋아하는 느낌을 따르세요.” 나는 그 조언에 따라 망해도 그만인 저렴한 베개 몇 가지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때 발견한 게 폴리에스테르 충전재가 들어가고 베개 가운데가 움푹 파인 납작한 경추 베개였다. ‘빨아 쓰는 베개’라는 컨셉에 끌렸다. 최소한 위생에는 좋겠지. 그게 수년간 나의 애착 베개가 되었다. 세탁기에 돌릴 때마다 솔기가 뜯어져서 손으로 기워가며 썼다. 해외로 이주할 때도 비행기로 실어왔다. 그렇게 8년이 지나자 겉감이 바스러지고 여기저기 솜이 튀어나오고 형태가 틀어져서 더 이상 착용감이 편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은퇴하는 애착 베개의 후임을 고민할 무렵 나는 나 자신의 요구가 아주 구체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니겠나. 나는 1만7,000번이 넘는 밤을 살았다. 매달 한두 번은 여행을 떠나기에 지난해에만 50여 군데 호텔에 묵었다. 베개 경험치가 쌓일 만큼 쌓였다. 바로 누웠을 때 고개가 꺾이지 않을 만큼 세로 길이가 짧으면서 이리저리 뒤척여도 될 만큼 가로는 길쭉한 형태, 목주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옆으로 누웠을 때 귀를 받쳐주는 적당한 볼륨, 세탁하기 쉬운 소재, 침대 스타일링을 해치지 않는 미니멀한 디자인, 별 하나에 까탈, 별 하나에 예민··· 세상에, 완성품을 찾는 것보다 만드는 게 쉽겠는걸?
일이 그렇게 되어서 나는 손님용으로 구비해둔 베개 속통을 갈라서 사이즈를 커스텀하기 시작했다. 임시 재봉을 해놓고 이리저리 누워보면서 부피를 조절했다. 버리려던 원피스를 오려서 베갯잇도 만들었다. 너무 좀스럽나 싶었지만 만들고 보니 흡족했다. 몹시 편할뿐더러 여느 베개보다 작으니 가정용 세탁기로 너끈히 빨 수 있고, 잘 마르고, 숨이 죽으면 뜯어서 충전재를 보충할 수도 있다. ‘이게 테일러메이드 아니냐! 럭셔리다, 럭셔리!’ 요즘 나는 어딜 가나 이 베개가 그립다. 손흥민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 투어 내내 맘모스 베개를 들고 다녔다. 내 생애 처음으로 유명인의 공항 룩에 관심이 가는 순간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이 룩을 따라 할 수 없다. 나는 나의 몸 상태에 국가 브랜딩의 사활이 걸린 월드컵 대표 팀 주장이 아니고, 대중교통과 이코노미 클래스를 애용하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심지어 손흥민조차 몇 년 후 인터뷰에서는 베개가 자리를 많이 차지해 갖고 다니기가 쉽지 않더라며 포기를 선언했다.
애착 베개와 함께 어디든 갈 수 없으므로, 나는 그것이 있는 내 침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잠드는 시간이 즐겁다. 이 여정을 통해 내가 발견한 ‘완벽한 베개’의 해답은 이것이다. 모두의 눈에 맞는 안경은 없다. 베개도 마찬가지다. VK
- 뷰티 디렉터
- 이주현
- 글
- 이숙명(대중문화 칼럼니스트, '패션으로 영화읽기' '혼자서 완전하게' '나는 나를 사랑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 저자)
-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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