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초 여성 우주 비행사이자 마티유 블라지의 뮤즈, 클로디 에뉴레

가브리엘 샤넬과 클로디 에뉴레(Claudie Haigneré)의 이름이 처음으로 함께 언급된 건 2007년의 일입니다. 다소 의외의 상황에서였죠. 프랑스에서 여성 관련 국제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미국 공공 외교 담당 차관보가 연설에서 언급할 프랑스 여성 인물의 사례를 찾다가 두 사람을 떠올린 거예요. 눈부신 패션을 창조한 여성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하나인 가브리엘 샤넬, 그리고 프랑스 최초의 여성 우주 비행사이자 훗날 과학기술연구부 장관이 되며 놀라운 업적을 남긴 클로디 에뉴레를 말이죠.
2026년, 샤넬과 에뉴레가 또 한 번 연결됐습니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 덕분이죠. 20년 전인 2006년, 블라지는 벨기에 브뤼셀의 예술 학교 라 캄브르(La Cambre)의 졸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졸업 컬렉션을 에뉴레에게 헌정하기로 결심했죠. 에뉴레를 졸업 컬렉션의 ‘뮤즈’로 삼은 겁니다.
영감의 원천은 시각화된 과학 자료였습니다. 블라지는 과학 현상에서 구조를 찾아 패션으로 표현하는 데 흥미를 느꼈거든요. 그는 지질 단면도 다이어그램과 결정화된 암석의 연구 도면 같은 것들에서 로코코풍의 아름다움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자연의 구조를 완성된 하나의 ‘디자인’처럼 해석한 거예요. 그는 이를 조화로운 패턴으로 변환해 옷에 구현했습니다. 은빛 패브릭으로 덮인 볼륨감 있는 퍼 코트 같은 형태로 말이에요. “정말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블라지가 남긴 말입니다.
블라지의 졸업 컬렉션은 이탈리아 트리에스테(Trieste)에서 열린 신진 디자이너 공모전인 ITS(International Talent Support)에 초청받았고, 그곳에서 블라지는 뜻밖의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한 남성이 다가와 이렇게 물어본 겁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꿈의 직업은 뭔가요?” 블라지는 곧바로 대답했습니다. “라프 시몬스와 같이 일하는 거예요.” 블라지는 몰랐지만, 놀랍게도 눈앞에 있던 남자가 바로 라프 시몬스였습니다. 라프 시몬스는 그 자리에서 블라지를 자신의 브랜드에 채용했죠.

세월이 흘러 블라지는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습니다. 2025년 10월, 파리 그랑 팔레에서 자신의 첫 샤넬 컬렉션 쇼를 선보였죠. 무대는 우주를 연상케 했습니다. 별자리처럼 배치된 다채로운 행성을 배경으로 블라지가 재해석한 샤넬의 여성복이 등장했죠. 컬렉션은 가브리엘 샤넬의 가치관에서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종종 연인인 보이 카펠의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던 샤넬의 습관을 쇼에 반영한 겁니다. 샤넬은 남성복을 입으며 의복의 규칙을 뒤엎었고, 이를 여성해방의 도구로 활용했죠. 에뉴레 역시 샤넬과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온 여성입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우주과학 분야의 포문을 열었죠. 여성인 자신 역시 그 세계에 속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말이에요.


샤넬의 2026 가을/겨울 컬렉션 발표 현장에는 에뉴레가 직접 참석했습니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온 두 여성의 이름이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죠. 이번 쇼에는 행성으로 만든 세트가 등장하진 않았습니다. 대신 컬렉션 중심에 샤넬 정장의 원형이 자리했죠. 샤넬의 핵심이 진주나 퀼팅 백이 아닌 ‘테일러링’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겁니다.
무대에는 부클레 트위드 소재의 워크 셔츠부터 프레스트 트위드 소재의 남성용 블루종까지, 남성복을 여성 테일러링 언어로 재조합한 다양한 아이템이 올랐습니다. 에뉴레는 이날 검은색 샤넬 수트를 입고 등장했습니다.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우주복을 입던 그녀가, 여성을 위해 근사하게 재해석한 수트를 입은 모습은 블라지가 보여주고자 한 샤넬의 철학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뉴레의 본명은 클로디 앙드레-데셰(Claudie André-Deshays)입니다. 지금의 성 ‘에뉴레’는 결혼 후 쓰게 된 것이죠. 그녀는 1993년 동료 우주 비행사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은 원래 같은 임무 후보로 선발됐지만, 그녀는 결국 그 임무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에뉴레는 프랑스 국립 우주 연구 센터(CNES)의 우주 비행사 후보로 선발됐습니다. 의학과 생물학, 생리학 등 각종 학위를 받는 데 든 19년과 선발 및 훈련으로 채운 11년을 보낸 끝에 얻어낸 쾌거였죠. 마침내 1996년, 그녀는 첫 우주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에뉴레의 사진은 아마 ‘안드로메다 미션’ 출발 직전에 찍은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 임무를 통해 에뉴레는 우주에 간 최초의 프랑스 여성이자 국제 우주정거장에 도달한 최초의 유럽 여성,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궤도의 우주정거장에 체류한 세계 최초의 여성이 되었습니다.
우주 비행사 경력을 마친 그녀는 2001년, 정치에 입문합니다. 자크 시라크 정부에서 2002년부터 2004년까지 과학기술연구부 장관을, 2004년에는 유럽연합 담당 장관을 역임했죠. 2018년에는 DStv 유럽통신기구 스타 어워즈(DStv Eutelsat Star Awards)의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유럽통신기구가 주최하는 연례 공모전으로, 아프리카 전역의 학생들이 과학과 기술을 주제로 한 에세이나 포스터를 제작하는 활동으로, 과학과 기술을 기반 삼아 아프리카 대륙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자는 취지였죠(현재는 중단).
에뉴레는 이 대회 심사위원단에 참여한 최초의 여성입니다.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포인트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이력이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세계의 문을 처음으로 연 여성. 그녀가 걸어온 길은 언제나 불가능의 벽을 깨는 여정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샤넬이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20년이 흘러 두 사람의 이름이 다시 엮인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녀들의 한 걸음이 모여 인류에게 거대한 도약이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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