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듯 시크하게, ‘노력 없는 스타일’이라는 환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저 역시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편입니다.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으레 그렇겠지만, 제가 ‘자연스럽게’ 손에 넣게 된 것은 거의 없고요. 제가 옷 입는 스타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죠. 몇 달 전, 한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요. “너는 스타일이 참 트렌디해.”

칭찬이었겠지만, 저는 오랫동안 숨겨뒀던 비밀을 만인 앞에서 폭로당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평생을 구축해온 옷 입는 방식이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았죠. 무심한 척 걸친 재킷이, 고민 없이 집은 척 든 가방이, 아무 생각 없는 척 신은 구두가, 실제로는 올해 트렌드에 대한 패션 전문가들의 수많은 코멘트를 확인한 후 고심 끝에 고른 것이라는 은밀한 사실을 말이죠. 확대해석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 제가 느낀 충격은 그랬습니다.
그 후 저는 몇 가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매 시즌 패션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야만 하는 나는, 타고난 패션 센스가 없는 걸까? 스스로에게 잘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그저 유행만 좇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그런데 여기서 본질적인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옷을 잘 입고 싶어 하는 노력, 스타일리시해 보이고 싶은 노력, 그게 우습거나 찌질한 걸까요?
오랫동안 패션계는 스타일이란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야말로 ‘무심하고 시크하게’, 어떠한 고민이나 고려 없이 본능적으로 타고난 감각처럼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죠. 선천적 재능에 가까운 것이라 여긴 셈입니다. 사실, 스타일은 타고난다는 믿음을 공고히 하는 이미지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찍히든 세련돼 보이는 파리지앵의 사진, 매 순간을 런웨이나 화보처럼 연출하는 모델들, ‘조용한 럭셔리’로 대변되는 부유한 이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죠.
패션 담론이 고도로 발전한 현대에 밝혀진 진실이 있다면, ‘노력 없는 스타일(Effortless Style)’이란 환상이라는 겁니다. 옷을 멋지게 입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패션업계는 오랫동안 ‘타고난 스타일’을 최고로 여겨왔으나, 패셔니스타의 일상을 담은 브이로그나 개개인이 각자의 취향을 다듬는 과정을 담은 콘텐츠가 등장하며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죠.


최근 소셜 미디어에서는 개인의 스타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취미, 경험, 가치관,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형성된다는 주장이 대두됐습니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야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다는 거죠.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리처드 N. 카르도조(Richard N. Cardozo)의 소비자 만족도 관련 연구에 따르면,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한 사람일수록 목표에 대한 애착이 강해집니다. 이 연구 결과는 개개인의 스타일에도 적용할 수 있을 거예요. 나에게 맞는 옷과 가방, 신발을 찾기 위한 노력이 스스로의 선택과 스타일에 대한 만족감을 높여줄 수 있는 것이죠.
“우리 모두가 각각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가장 크게 투자해야 하는 건 시간이에요.” 패션 애널리스트이자 디자이너 맨디 리(Mandy Lee)의 말입니다. “핀터레스트나 인스타그램에서 사진 몇 장 찾아서 저장해두는 것만으로 스타일이 완성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찾아낸 아이템을 직접 입어보고, 옷장에 채워 넣으며 스타일을 만들기까지 영겁의 세월이 걸리죠. 어쩌면 평생 이어질 수도 있는 여정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리의 말에 동의할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모두가 스타일리시하다고 인정하는 패셔니스타들은 어떨까요? 시대의 패션 아이콘들은 패션에 대한 감각을 그저 타고나는 것처럼 보이죠. 아까도 말했듯, 패션계가 오랫동안 강조해온 것이기도 하고요. 실제로도 그럴까요? “우리가 패션 아이콘이라고 부르는 이들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배우고 시간을 들였어요. 그들 역시 지난한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고요.” 패션 크리에이터 잘릴 존슨(Jalil Johnson)의 말입니다. 패션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들조차 적극적인 학습과 오랜 멘토링 끝에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는 거죠.
우리는 왜 스타일리시해 보이기 위한 노력을 가치 없는 것처럼 여길까요? 모든 면에서 노력을 강조하면서 유독 패션에 있어서는 어째서 계속 ‘무심한 듯 시크한’ 태도를 취하는 걸까요? 실패가 두려워서, 스타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완성한 나만의 스타일이지만, 타고난 듯한 패셔니스타들과 비교했을 때 보잘것없어 보일까 봐 자기방어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죠.
“개인 브랜딩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 시대예요. 노력하지 않고도 스타일리시한 모습으로 보이는 건 자기 PR에 상당한 강점이 될 수 있고요. 사실 노력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궁극적인 럭셔리죠.” 스타일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 중인 헤더 허스트(Heather Hurst)의 말입니다. 실제로 부와 시간을 갖춘 이들은 보다 자연스럽게 매력적인 스타일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개인 스타일리스트, 부모가 물려준 고급스러운 빈티지 아이템이 가득 찬 옷장, 그리고 한도 없는 카드까지. 자연스럽고 세련된 스타일링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없죠.” 존슨의 말입니다. 이런 특권층 패션은 쉽게 도전할 수 없습니다. 그 희소성이 그들의 스타일을 더욱 근사해 보이게 만들죠.

허스트는 신체 조건 역시 ‘타고난 스타일’이라는 환상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스타일리시한 건지, 아니면 그냥 마른 사람인지에 대한 논쟁이 항상 있잖아요.” ‘패션의 완성은 몸’, 즉 ‘패완몸’이라는 표현이 이를 대변할 수 있겠습니다. 모델이나 셀러브리티는 ‘거적때기’를 입어도 근사해 보인다는 의미죠. “우리는 오랜 시간 마른 몸이 세련된 것이라고 생각해왔잖아요. 우리가 멋지다고 느끼는 스타일이 실제로는 체형에 대한 편견과 연결돼 있을 수 있다는 거죠.”
그렇지만 스타일이 반드시 부유하거나 마른 몸을 지닌 소수의 특권인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항상 자연스럽게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스타일은 단순히 경제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어요.” 홍보 전문가 지아 콴(Gia Kuan)의 말입니다. “영화를 보고, 잡지를 읽고,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찾아낸 자신만의 스타일이었으니까요.”
종합해보면, 스타일은 타고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러 요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가깝죠. 그 요인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일 수도 있고, 마른 몸일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콴의 말처럼, 스타일은 시간을 들여 탐색하고 연구하는 과정을 거치면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순간, 스타일은 더 이상 희소한 것이 아니게 돼버립니다. 패셔니스타, 셀러브리티, 그리고 평범한 우리까지, 모두가 스타일을 위한 노고가 존재하지 않는 척하는 건 애써 얻은 가치를 더욱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 발현된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스타일링에 대한 노력을 평가절하해온 것은 아닙니다. 이는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르게 인식돼왔죠. ”어머니가 유년 시절을 보낸 미국 뉴욕 브롱크스에서는 그런 노력이 오히려 미덕으로 여겨졌다고 해요.” 모델이자 크리에이터 이마니 랜돌프(Imani Randolph)의 말입니다. “커다란 후프 귀고리나 번쩍이는 금붙이로 만든 반지, 여러 보석이 박힌 목걸이처럼 화려한 주얼리를 특히 강조했죠. 단순히 멋있어 보이기 위한 건 아니었어요. 자부심의 표현이었죠.”
콴 역시 랜돌프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는 세련돼 보이기 위한 노력 자체를 가치 있는 행위로 여겼어요. 단순한 ‘꾸밈’으로 치부하지 않고, 꾸준히 정성을 들이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죠.” 콴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소셜 미디어가 순기능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불과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스타일은 타고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어요. 하지만 소셜 미디어가 스타일을 위한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면서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죠.” 한 연구에 따르면, 스타일이 타고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일수록 개인의 스타일을 탐구하고 발굴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아예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는 반가운 변화입니다.

타고난 것만이 진정한 스타일이라는 주장은 패션업계뿐 아니라 뷰티업계에서도 비슷하게 통용됩니다. 메이크업을 최소화한 사람만이 ‘진짜 미인’이라는 고정관념처럼요. 랜돌프는 적절한 예를 들어줬습니다. “립스틱 하나만 슥 바르고 외출할 수 있는 여자만이 정말로 예쁜 거라고 보는 거죠.” 하지만 이는 노력을 들여 자신의 스타일을 가꾸고자 하는 이들을 배제하는 생각입니다. 스타일이나 메이크업에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자존감을 키우는 과정이기도 하고요.
우리가 시간을 들여 옷장을 채우고 나에게 맞는 화장품을 찾을 때, 그 결과는 단순한 외적 변화가 아닌 내면의 성취감과 보상으로 이어집니다. 시간을 들여 자신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결국 더 큰 만족감과 자신감을 얻게 되죠. 단순히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입고 화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건, 모든 여성들이 공감하는 바잖아요.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노력 없이 스타일리시해야 하고, 노력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압박에 굴할 필요 없는 이유입니다.
노력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항상 존재합니다. 옷장에서 옷을 고르고 입는 순간에만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죠. “저는 매일 출근할 때 입을 옷을 고르는 데 3~5분 정도 걸려요. 제 스타일에 맞는 옷을 옷장에 가득 채워놨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죠. 그렇게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지만요. 나에게 맞는 옷을 찾고, 구입하고, 옷장에 넣기까지 무수한 노력의 연속이었죠.” 콴의 말입니다.
좋은 스타일은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것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저 유행하는 옷을 입는 게 아니라, 내게 맞는 옷을 입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하죠. 패션 역사 속 아이코닉한 인물들 역시 자신의 스타일에 애정을 갖고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노력하지 않는 스타일’을 추구할까요? 각자의 노력과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과정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노력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스타일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일 겁니다. 나만을 위한 레퍼런스를 찾고, 새로운 아이템을 구입하고 입어보는 등 지속적인 시도를 하는 과정 자체가 스타일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죠. 사실, 세상에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더 재미있고 가치 있는 거고요. 스타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만약 모두가 같은 옷을 입는 게 의무가 되어버린다면 정말 끔찍할 거예요. 제가 시간을 들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 옷을 고르고 입는 모든 순간이 즐겁기 때문이에요. 스타일이란 그 모든 과정일 테고요.” 존슨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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