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드리안 아피올라자가 만드는 이상한 모스키노

2025.07.29

아드리안 아피올라자가 만드는 이상한 모스키노

이상하고 아름다운 모스키노 나라의 새로운 주인공, 아드리안 아피올라자.

2025년 가을 컬렉션 쇼장에서 모델 알렉스 콘사니와 함께한 아피올라자.

지난 2009년 <보그 코리아>는 창간 1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책을 준비했다. ‘THE SHOW’라는 제목으로 <보그 코리아>를 처음 시작한 1996년 이후 가장 인상적인 패션쇼 무대의 이미지를 총망라한 책이었다. 그 책을 준비하기 위해 패션 뉴스 에디터들은 모든 컬렉션 이미지를 샅샅이 뒤졌다.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필름 슬라이드부터 각종 이미지 아카이브 사이트, <보그> 소유의 컬렉션 이미지 CD 등. 라거펠트와 고티에, 맥퀸과 갈리아노 등 당대 ‘패션쇼맨’만큼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던 브랜드의 이름은 모스키노였다.

프랑코 모스키노가 1983년 설립한 브랜드는 도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버튼 대신 바람개비를 장식하고, 클래식한 수트에 숟가락과 포크를 더했다. 쓰레기봉투는 드레스로 변모했고, 검정 드레스 위에 세일 가격을 수놓기도 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심각한 패션계에서 브랜드 모스키노가 상징하는 건 가장 원초적인 재미였다. 불이 붙은 드레스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거대한 서커스장이 패션쇼 무대가 되고, 롤러스케이트를 탄 바비가 런웨이를 가로질렀다.

프랑코 모스키노가 세상을 떠난 뒤 20여 년간은 그의 어시스턴트였던 로셀라 자르디니(Rossella Jardini)가 그 정신을 이어나갔다. 곧 패션계의 또 다른 악동 제레미 스캇(Jeremy Scott)이 약 10년간 브랜드를 맡았다. 그 바통은 아르헨티나 출신 디자이너 아드리안 아피올라자(Adrian Appiolaza)의 몫이 되었다. 지난해 1월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그는 1990년대 런던으로 건너가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했다. 그 후 그는 다양한 하우스에서 경험을 쌓았다. 맥퀸, 미우미우, 루이 비통, 끌로에와 로에베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 3주 만에 데뷔 쇼였던 2024 가을 컬렉션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오랜 경력 덕분이었다. 이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그가 <보그> 인터뷰에 응했다. 모스키노 세상의 주인공이 된 행운의 사나이가 전하는 재미있는 패션의 원칙.

모스키노 하우스에 입성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장 먼저 프랑코 모스키노가 디자인한 아카이브를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 1월 합류해, 첫 컬렉션 쇼를 준비할 시간이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을 가장 의미 있게 쓰는 방법은 과거에서 배우는 것이라 여겼다. 프랑코가 사용하던 원단을 직접 만져보고, 늘 존경해온 이 브랜드의 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었다.

모스키노에 합류하고 나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카이브가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훌륭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룩을 본 후 디자인 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충분한 창의적 자유를 보장받았고, 첫 쇼의 첫 번째 룩부터 비전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모스키노의 이직 제안은 내 인생에서 딱 맞는 타이밍에 찾아왔다. 그래서 ‘빙고!’를 외쳤다. 이전에도 몇몇 브랜드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마음 깊이 느꼈다.

모스키노에 대한 당신의 첫 기억은?

단연코 미국 TV 시트콤 <못 말리는 유모(The Nanny)>가 모스키노의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그 프로그램 보는 걸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빈티지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라 예전부터 모스키노 피스를 자주 접해왔다. 내 컬렉션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프랑코 모스키노 시절의 베스트(Waistcoat)가 꽤 많이 있다.

모스키노 하우스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모스키노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서로 전혀 다른 창의적인 자극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프랑코 모스키노와 함께 일하던 이들이 여전히 팀의 일원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큰 의미가 있다.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 우리가 일하는 건물 안에도 아주 강한 에너지가 흐른다. 그 안에서 브랜드가 지닌 열정과 과거로부터 이어진 유산의 중요성을 분명히 느낄 수 있다.

또 하나, 모스키노는 오랫동안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메시지를 전하는 브랜드였다. 때로는 유쾌한 위트로, 때로는 날카로운 풍자로 시대를 말해왔다. 이 브랜드가 지닌 그런 목소리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모스키노는 언제나 사회와 그 변화 속에서 의미 있는 가치를 전달해온 브랜드였기 때문이다.

아카이브 중에서 특별히 눈에 띈 것은?

모스키노 아카이브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은 프랑코가 얼마나 많은 상징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피스’ 사인부터 특히 사랑하는 ‘스마일리’까지! 또한 그의 디자인 곳곳에 이탈리아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때로는 비현실적인 아이디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모스키노의 아틀리에와 장인들이 궁금하다.

정말 놀랍다! 가방을 만드는 장인들을 직접 만나봤는데, 그들은 진정한 예술가다. 실제 사물을 가죽으로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중에서도 ‘셀러리 백’은 완성도와 원본과의 유사성 측면에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작품 중 하나다.

아르헨티나에서 패션이라는 꿈을 찾아 떠나온 계기가 있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자랐고, 할머니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할머니께서는 작은 작업장을 운영하시던 재단사였다. 덕분에 아주 어릴 때부터 재봉틀 다루는 법을 배웠다. 원단 가게에 가는 일부터 패턴을 만들고, 재단하고, 바느질까지 흥미진진한 과정에 자연스럽게 끌렸다. 패션에 대해 진짜 큰 영향을 받은 건 빈티지 숍에서 1988년 무렵의 <더 페이스(The Face)> 매거진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였다. 그곳에서 꼼데가르송, 요지 야마모토, 장 폴 고티에 같은 디자이너를 처음 접했고, 그 실루엣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때부터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여러 브랜드를 경험하면서 어떤 교훈을 얻었나?

다른 메종에서 일하는 것은 흥미로운 도전이었고, 각 브랜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이 일을 깊이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자산이 되었다. 그들의 경험을 내 방식으로 반영하며 나만의 창조적인 목소리를 다듬어왔다. 모스키노는 내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처음 디자인하는 브랜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온전히 나 자신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표현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전 상사들에게서 얻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늘 자유롭고 진실하게 자신을 표현하라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말이다.

빈티지 숍을 운영하고 있다.

사실 물건을 판매하는 가게는 아니다. 남자 친구 라이언 베나서(Ryan Benacer)와 몇 년 전 함께 만든 개인 아카이브다. ‘20 Age Archive’라고 부르는데,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들의 작품 약 4,000점을 모은 컬렉션이다. 요지 야마모토, 비비안 웨스트우드, 장 폴 고티에, 프랑코 모스키노, 꼼데가르송, 마르탱 마르지엘라 등이 있다.

오늘날 패션에서 가장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오늘날 패션은 여러 문제와 맞물려 있다. 20년 전만 해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창의성’이었고, 그 창의성으로부터 수익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특히 소셜 미디어의 영향으로 산업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그 결과 개성과 독창성의 의미가 많이 희석되었다. 창작 활동이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추구에서 브랜드나 기업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요즘엔 ‘조용한 럭셔리’가 패션 시스템 대부분을 규정한다. 물론 수익 창출이 중요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이 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적으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 즉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느낌’이라고 여겨왔다. 그런 점을 내 작업에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미학은 바로 ‘개성을 축하하는 것’이다. 내 메시지는 분명하다. ‘옷을 입고 행복과 자유를 느끼는 것.’

모스키노 세계에서는 가장 놀라운 아이디어가 실제로 착용 가능한 작품이 된다. 그런 환경이 일하는 방식을 바꾼 적도 있나?

가장 재미있고 사랑받는 시즌 피스를 디자인하는 창작의 순간은 단연 이 과정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모스키노다운 지점이다. 그래서 답은 ‘그렇다’이다. 이 하우스에서 일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우리는 빈티지 아이템이나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 그리고 사람들의 옷과 액세서리에 대한 인식을 아주 모순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겨 활용한다. 디자인 미팅은 재미와 진지한 기술적인 전문성이 혼합된 자리가 된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온 장인들과 긴밀히 협업하며, 이런 비전형적인 아이디어를 구현해내고 있다. 우리 의상과 가방은 실제 물건처럼 보여야 하는 동시에 실용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직접 착용 가능하고, 사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장 크게 동기부여를 받는 부분은, 패션이 예상치 못한 감정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패션은 성공하는 것이라 믿는다. 사람을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하며, 연결되게 만드는 순간.

1980~1990년대 모스키노 쇼를 보면 패션 산업과 그 안에 존재하는 부르주아적 취향을 재치 있게 표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 그의 사고방식이 오늘날도 여전히 의미가 있나?

그렇다고 믿는다. 다만 조금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젊은 세대에게 교육할 책임이 있다. 많은 이들이 프랑코 모스키노가 개척한 놀라운 것들을 잘 모른다. 요즘 패션에 대한 이해는 스마트폰을 빠르게 스크롤하며 가볍게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1980년대만큼 자유롭게 아이러니를 활용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오늘날 문화 환경은 훨씬 민감해져서 풍자를 자주 오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코의 태도(패션과 자신을 향한 유머와 웃음)가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고 믿고 있다. 덕분에 이 산업이 인간적이고 솔직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일 때,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반항적인 태도를 고수하기는 쉽지 않다. 과연 모스키노에서도 그런 반항적인 접근이 여전히 필요할까?

필요 여부를 떠나 반항적인 태도는 내 정체성 그 자체이며 프랑코 모스키노의 본질이다. 반항은 우리 DNA에 깊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탐구하고, 그 속에서 나만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 거기에 한 줌의 아이러니를 곁들인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일 때조차도 아이러니와 반항 정신은 사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나만의 솔직함을 지키는 방식이자, 패션에 생명을 불어넣고 늘 새롭게 만드는 비결이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다. 출근하면 카푸치노 한 잔과 함께 팀과의 첫 미팅에 바로 돌입한다. 보통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카테고리별로 진행한다. 어느 날은 기성복, 다음 날은 슈즈, 그다음은 가방 순으로. 가장 흥미로운 순간은 완성된 컬렉션을 조합할 때다. 쇼 며칠 전에는 스타일리스트 알라스테어 맥킴(Alastair McKimm)과 함께 작업한다. 그를 늘 존경해왔기에 정말 특별한 경험이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하루하루가 설렘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업무 철학 중 하나는 ‘즐기자!’이니 당연하다. VK

    패션 에디터
    손기호
    포토
    Courtesy of Mosch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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