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미디스커트에 롱부츠 조합이 좋은데요, 시골 귀족이라 놀려요
엊그제 꽤 마음에 드는 차림으로 사무실에 갔습니다. 브라운 블레이저, 빈티지 미디스커트, 무릎까지 오는 검정 부츠. 근데 자리에 앉자마자 영국 <보그> 패션 뉴스 에디터 다니엘 로저스(Daniel Rodgers)가 웃음을 빵 터뜨리는 겁니다. “리안, 너 왜 앤 공주처럼 입었어?”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딸이자 지금도 시골 스타일의 정석을 보여주는 바로 그 앤 공주 말입니다.

그날의 룩엔 문제될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요. 한 가지 의문점은 ‘왜 내가 이 옷을 입고 있느냐’였죠. 저는 귀족도 아니고, 시골에 살지도 않고, 유산을 물려받은 적도 없습니다. 경마장엔 가본 적도 없고, 사립학교? 전혀요. 영국 왕실 팬도 아니고 오히려 살짝 반감까지 있는데, 왜 다니엘의 표현대로 ‘진보 성향에, 가수 샤이걸(Shygirl) 노래를 듣는 스물여섯 살’이 ‘하이랜드에서 웰시코기를 트렁크에 태우고 달리는 귀족 영애’처럼 입고 있는 걸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겨울에는 누구든 앤 공주처럼 보이기 쉽다는 겁니다. 저도 흰 티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삼바를 신는 20대지만 가끔은 프레피 무드에 손이 갑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게 ‘왕족 코스프레’로 읽히는 거죠. 트위드 블레이저만 입어도 왠지 성에 살 것 같고, 승마 부츠 신으면 말부터 타야 할 것 같은 분위기요.

앤 공주의 평상복을 보면 힌트가 있습니다. 바버 재킷, 줄무늬 셔츠, 튼튼한 웰링턴 부츠, 오클리 고글 선글라스. 시골 저택에서 말을 타는 사람이면 당연해 보이죠. 하지만 런던 한복판에 사는, 말은커녕 개 산책도 안 하는 사람이 그런 옷차림을 하면 약간 과해 보일 수도 있어요. 동료 올리비아 앨런(Olivia Allen)은 저와 추구하는 멋이 다르더군요. “바버 재킷은 겨울에 개 데리고 억지로 나갈 때 입는 옷이지. 멋 내려고 고른 적은 한 번도 없어.” 이어서 덧붙이길, “왜 젊은 농업인 협회 가는 사람처럼 입고 다니는지 모르겠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골 무드의 클래식 룩은 건재합니다. 지하철만 타도 바버 재킷은 흔하고, 닥터마틴은 아예 방수 부츠를 출시했으며, 오클리 고글은 킹슬랜드 로드를 걷는 잇 걸들의 시그니처가 됐습니다. 결국 앤 공주는 유행을 넘어선 스타일의 아이콘이었던 셈입니다. 우리가 자각했든 아니든, 앤 공주처럼 입고 있으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매력적일까요? 저는 단호하게 ‘실용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요즘 옷들, 몇 번만 빨아도 흐물흐물해지고 쉽게 해집니다. 그런데 앤 공주가 고른 옷은 오래갑니다. 제 빈티지 블레이저도 중고로 샀는데 몇 년째 멀쩡해요. 앤 공주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대로 만든 정장은 오래갑니다. 클래식한 디자인이라면 평생 입을 수 있어요. 절약은 우리 집안 DNA에 있죠. 낭비는 죄입니다.” 물려 입는 건 앤 공주에게 당연한 일이고, 케이트 미들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실천해왔습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유행’보다는 ‘스타일’에 방점을 뒀습니다. 앤 공주가 회상했죠. “엄마랑 얘기한 적 있어요. 패션과 스타일은 다르다고요. 엄마는 트렌드는 따르지 않았지만, 확실한 스타일은 있었죠. 스타일은 훨씬 오래갑니다. 개성과 품질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누군가를 닮는다면 앤 공주는 꽤 괜찮은 방향입니다. 말수 적고, 자기 할 일 해내고, 가식도 없고, 괜히 튀지도 않죠. 지금 내가 입고 있는 블레이저가 왕족 놀이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겨울엔 따뜻하고 오래가는 옷이 최고니까요. 누굴 닮았든 상관없지만, 앤 공주라면 나쁘지 않죠. 오히려 꽤 뿌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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