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옷장은 안녕하십니까?

패피들에게 최고의 처방전인 쇼핑과 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인 옷장이 심리와 정신 분석의 중요한 단서로 떠올랐다. 이 따끈따끈한 정보에 맞춰 열린 <보그> 에디터들의 옷장 고백 상담소.



칙칙한 검은색과 회색, 신축성 있는 저지 소재, 실제 자기 사이즈보다 한 치수 큰 옷들. 10년 전 첫만남에서 엉덩이를 겨우 가리는 오버 사이즈 스웨터, 스타킹처럼 다리에 찰싹 달라붙은 싸이하이 킬힐 부츠를 신은 뇌쇄적인 옷차림으로 나(당시 대학 4년생)를 문화적 충격에 빠뜨렸던 어느 패션 기자의 옷장. 그 사이 너무나 초라해져 있었다. “제니퍼 박사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해! 난 패션 우울증과 외모 혐오증을 동시에 앓고 있다구.”

그런 패션 우울증과 외모 혐오증은 최근 화제인 <옷장심리학> 제3장과 4장에서 설명하는 패션 심리학 개념에 해당된다. 간단하게 말해, 따분하고 단조로운 옷차림은 무기력감의 표현이며(활력을 잃어버린 패션 우울증), 맞지 않는 사이즈는 형편없는 자기 몸매를 감추려는(외모 혐오증) 심리라는 것. “옷장의 패턴(을 관찰하는 것)을 통해 심리를 파악하는 통찰력을 기르게 되었죠. 그동안 제가 봐온 옷장들은 옷장 주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으니까요. 가장 최근에 본 어느 외과 의사의 옷장은 오래된 옷, 얼룩진 옷, 한 번도 안 입은 옷들이 자주 입는 옷과 함께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답니다. 그의 인생에서 엉망진창인 건 옷장뿐만이 아니었죠. 그는 일하느라 너무 바빠서 옷장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관리할 시간도 없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스케줄을 다시 짰고, 삶의 다른 부분들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옷장도 깨끗하게 치우고 새로 채워 넣었죠. 옷장은 더 큰 삶을 반영한 작은 삶을 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옷을 좋아했고, 앤 테일러와 랄프 로렌에서도 일했던 임상심리학자 제니퍼 바움가르트너는 그동안 조사해온 문제적 옷장과 쇼핑 패턴, 그 뒤에 숨은 심리적 기저의 사례들을 정리해 <옷장심리학>이란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 이 책이 <보그> 기자들 사이에 화제가 되자, 예전에는 지극히 정상으로 보였던 그들에게 한두 가지 문제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패션계라는 유별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옷장은 대체 어떤 ‘증상’을 앓고 있을까? 그렇다면 옷장이 암시하고 있는 나의 진짜 문제는? 까탈스럽기로 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보그> 기자들이 급기야 바움가르트너 박사와 정신과 전문의 강성민 원장에게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단,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먼저 A의 증상. “내 옷장은 아주 간결해. 코트, 블라우스, 팬츠, 그리고 속옷들이 정리된 서랍. 내 블라우스와 팬츠가 어떤 것들인지는 말 안 해도 잘 알지? 색으로 말하자면 검은색과 흰색(간간이 섞인 아이보리를 제외하고)으로 통일돼 있어.” 바움가르트너 박사(이제부터 B박사라 부르기로 한다)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검은색과 흰옷만 선택하는 것은 수용에 대한 두려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실수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강성민 원장도 비슷한 소견이다. “자신의 마음까지 완벽하게 통제하고 싶어 하는 심리죠.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해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은 새로운 변화와 도전이 필요할 때 가장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요.” B 박사는 곤란해 하며 말했다. “이 옷장은 A의 내면을 반영한다기보다 내면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 사람의 진짜 내면에 대한 분석이 어렵겠군요. 자, 다음 환자!”

다음 환자는 쇼핑 중독이 의심되는 C. “옷을 너무 많이 산다는 생각이 들어요. 옷방에는 아직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과 밑창이 깨끗한 새 신발이 상자째 쌓여 있죠. 문제는 늘 입는 옷만 입는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무조건 사진 않아요, 가격도 적당하고 마음에 드니까 사는 거라구요! 굽이 지나치게 높은 신발이나 과감한 옷은 사놓고 착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고 보니 코트나 재킷 같은 외투는 많은데, 그렇게 쇼핑해도 안에 입을 톱이나 블라우스는 늘 부족하니 어찌된 영문인지!” B 박사도 쇼핑의 힐링 효과를 인정한다. “입지도 않을 옷을 사거나 옷을 많이 사도 정작 필요한 옷이 없다는 건 충동적으로 옷을 사기 때문입니다. 쇼핑을 하면 실제로 두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일시적으로 불안감이 사라지죠. 쇼핑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건 문제될 게 없지만, 물건이 인간의 감정을 대체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쇼핑으로 위안을 얻기 위해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옷을 사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쇼핑 중독 증세군요. 이러다간 빚더미 위에 앉기 십상.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고 해소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D는 패션에 있어 분열 증세를 보인다. “쇼핑을 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여성스러운 스커트예요. 늘 가장 예쁜 스커트를 사오지만 아침에 몇 번을 입었다 벗었다 망설이다 결국엔 평범한 바지 차림인 제 자신이 싫어요! 몸매가 드러나거나 달라붙는 옷을 입으면 남이 볼까 불편하죠. 그렇지만 속옷은 늘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걸 고른답니다.” B 박사가 콕 짚어 지적했다. “평범하게 입으면 사람들이 당신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을 테고, 내면의 결점까지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 결점을 감추거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옷을 입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막상 옷을 잘 입은 사람들 속에 섞이면 금세 초라한 기분이 듭니다. 일부러 옷을 대충 입는 건 자존감을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이에요. 혹시, 꽤 오랫동안 외로운 싱글로 지내진 않았나요?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법이거든요.” 강성민 원장은 충돌하는 욕구에 초점을 맞췄다. “화려하고 여성스러운 속옷은 무의식을 상징하고, 치마 대신 바지를 입는 것은 무의식이 표면화되는 것에 대한 방어 기제입니다. 막상 입지도 못할 치마를 사면서 소극적으로 타협하고 있군요. 자신 안의 여성성을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는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게 가장 시급합니다.”

쇼핑을 할 때도 고뇌가 묻어나는 E. “전 한 가지 스타일에 고착되어 있어요. 벗어나고 싶은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네요! 게다가 쇼핑하면 오히려 기분이 우울해지니 대체 이유가 뭔지. 게다가 친구들은 내가 쇼핑할 때 지나치게 오래 고민한다고 저를 비난해요.” B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또 한 명의 패션 우울증 환자가 있군요! 이런 경우 무작정 스타일부터 바꾸려 들면 오히려 더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원인부터 파악해야 해요. 굳어버린 생활 패턴, 스타일링에 대한 자신감 결여, 몸매에 대한 열등감 등등. 쇼핑이나 옷 입기를 하나의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외모를 못마땅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뭘 입어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떻게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쇼핑이 부담스러울 수밖에요.”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발견해도 쉽게 사지 못하는 증세까지! 옷을 잘 입기 위해 시간과 노력, 돈을 들인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경제적인 여유가 허락하는 선에서 최고의 옷,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옷을 입었을 때 편안할 뿐 아니라 자신감이 생겨서 삶의 만족도 또한 높아진다면 그보다 가치 있는 옷이 어디 있겠어요?”

패션에 관한 한 도가 튼 <보그> 편집부도 온통 문제 투성이니 이쯤되면 있던 자신감도 사라질 만하다. 만약 자신의 옷장 속 모습에 대해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다면, 먼저 잡지에서 오린 사진이나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받은 이미지들로 나만의 ‘스타일 파일’을 만들어 보시라! 그 가운데 반복해 등장하는 아이템들로 목록을 만들면 그게 바로 내가 꿈꾸는 옷장의 모습이다. 현실 속의 내 옷장과 리스트를 비교하고 뭔가 빠진게 있다면? 드디어 쇼핑을 나설 때! 죄책감을 느끼거나 갈팡질팡하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옷장을 위해 쇼핑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