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의 우주에서 마주친 유아인과 뱅상 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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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의 우주에서 마주친 유아인과 뱅상 카셀

2018-11-22T13:31:56+00:00 2018.11.22|

<보그>의 우주에서 마주친 유아인과 뱅상 카셀.

SKY FALL
파리 특유의 흐린 가을날 만난 유아인과 뱅상 카셀. 유아인의 화이트 케이블 스웨터와 네이비 코듀로이 팬츠, 뱅상이 입은 카멜 컬러 스웨터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여기 전혀 다른 매력의 두 남자가 있다. 한 명은 전설적인 배우의 2세로서 일찍이 프랑스 영화계를 짊어지고 나갈 남자로 성장했고, 또 한 명은 청소년 드라마부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 이제 한국 영화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한 명은 잃을 것이 없는 파리 외곽의 변두리 동네 깡패로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다른 한 명은 세상이 자기 손가락에서 움직인다 믿는 재벌 3세 역할을 제 옷처럼 소화했다. 한 명은 브라질 음악을 즐기며 지극히 개인적 삶에 충실하고, 다른 한 명은 영감을 공유하는 동료들과 아트 컬렉티브를 통해 동시대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이토록 극과 극의 스펙트럼을 지닌 두 배우, 프랑스의 뱅상 카셀과 한국의 유아인이 파리에서 만났다. 영화 <국가 부도의 날>에 함께 출연한 두 배우가 <보그> 12월호 커버 촬영을 위해 파리 벨빌(Belleville) 근처에 자리한 스튜디오로 모인 것이다. 두 남자는 등장부터 달랐다. 아침 일찍 짙은 코발트 블루 후디에 낙낙한 스웨트 팬츠를 입고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온 카셀, 서울에서부터 함께 날아온 자신의 크루들과 함께 존재감을 드러내며 등장한 유아인. 두 사람은 곧 <보그>라는 우주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가득한 도킹을 시작
했다.

실상 이 만남을 주선한 건 오래전의 일이었다. 처음 밀담이 오간 건 유아인이 <버닝〉과 함께 칸으로 향하던 5월. 하지만 두 나라를 대표하는 배우를 한곳에 모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정해진 데드라인(<보그> 12월호와 영화 개봉일인 11월 말) 아래 물밑 작업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름과 가을을 오가던 어느 날 결정적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10월 말경 두 배우 모두 스케줄이 가능합니다.”

10월 말이라는 액자가 그려졌으니, 이제 남은 건 퍼즐을 채우는 것이다. 만남의 현장은 파리, 사진가는 뱅상이 신뢰하는 브라질 출신의 빅토르 산치아구(Victor Santiago), 스타일링은 편안하고 클래식하게, 무드는 자연스러움을 강조하기로 하고 틀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정상을 지켜온 두 배우가 지닌 뚜렷한 취향 덕분에 오히려 수월하기까지 했다.

DAYDREAM
대중적인 취향과 예술에 대한 아이디어를 함께 모색하는 유아인. 그가 입은 케이블 스웨터와 카키 컬러의 코듀로이 스리피스 수트, 화이트 스니커즈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오전 9시. 먼저 스튜디오에 도착한 인물은 뱅상 카셀. 그가 도착하자마자 스튜디오의 스피커 위로 브라질 음악가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의 음악을 흘려보냈다. 철저히 그의 취향을 배려한 선택이었다. 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시간 날 때마다 브라질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걸 미리 알아보았던 것이다. “음악이 마음에 드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한 손엔 진한 커피를 나머지 한 손에 크루아상을 든 카셀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실제로 그가 벨로주와 절친한 사이라는 건 대화하던 중 알게 되었다). 스태프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그는 한국에서의 촬영에 대한 추억을 먼저 나눠주었다. “상당히 추웠어요. 모든 것이 효율적이어서 힘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만큼 자국 영화 산업에 대한 자존심을 지닌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건 인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뉴욕에서 자라서인지, 프랑스 억양이 섞여 있지만 매우 분명한 어투의 영어로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NEW LOOK
80년대 후반에 데뷔한 후 3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이어온 뱅상 카셀에게 <국가 부도의 날>은 여러모로 새로운 실험이었다. 카멜 퍼펙토 재킷과 스웨이드 부츠는 발맹(Balmain), 네이비 스웨터는 브리오니(Brioni), 블랙 데님 팬츠는 디올 옴므(Dior Homme)

20여 년이 넘도록 카셀은 때로는 폭발적 에너지를, 때로 상처 받은 강아지 눈빛을 오가며 우리를 사로잡아왔다. 절망을 무기로 휘두르는 <증오> 속 갱스터, 사라진 연인을 쫓는 허망한 청년의 눈빛을 선보인 <라빠르망> 그리고 비극 속에서 몸부림치는 <돌이킬 수 없는>.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청년 카셀을 보고 그의 향에 취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 더 어린 세대에게는 <블랙 스완> 속 자비 없는 코치, <제이슨 본>을 쫓는 냉철한 킬러로 더욱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HIDDEN SAVAGE
거친 역할 속에 숨겨진 뱅상 카셀은 사랑에 푹 빠진 연인이었다. 그가 입은 아이보리 니트 숄칼라 카디건은 브루넬로 쿠치넬리(Brunello Cucinelli).

“역할을 맡으면 저만의 준비를 합니다. 저를 설득할 수 있어야 관객도 설득할 수 있으니까요.” <국가 부도의 날>에서 맡은 IMF 총재 역을 위해 프랑스 정치인과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며, 당시 한국과 금융 위기에 대한 역사와 경제 공부를 꼼꼼히 마쳤다. “물론 그 사건에서 제가 맡은 배역이 한국 관객에게는 악역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스스로 의사를 연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파서 찾아온 환자를 낫게 해주려는 마음을 지닌 의사처럼 당시 IMF 역시 한국을 치료하겠다는 마음이었을 거라 여겼죠.”

OUCH OF ANIMAL
카메라 앞에서 더욱 자유로운 피사체, 유아인. 거친 무톤 재킷은 터프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유아인이 입은 시어링 재킷은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보사노바 리듬에 맞추어 카셀의 긴 팔다리가 카메라 앞에서 움직일 때쯤, 유아인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극 중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두 배우는 이곳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수염까지 기른 중년의 프랑스 배우와 아직까지 말간 얼굴을 간직한 한국 배우의 존재감은 분명 달랐다. 하지만 이번 만남은 그들의 차이를 돋보이게 하고, 그 속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을 찾기 위한 것이다.

LEAN BACK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을 통해 ‘금융맨’으로 변신한 유아인. 베이지 케이블 스웨터와 베이지 치노 팬츠, 옆에 벗어둔 카멜 코트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유아인이 카메라 앞에 설 때쯤 파리 하늘이 드라마틱하게 맑아지고 있었다. 그가 옥상에 오를 때에 맞춰 오전 내내 내리던 비가 멈춘 것이 놀랍지 않았다. 유아인이라는 배우에겐 언제나 그처럼 극적인 순간이 마법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완득이>와 <깡철이>로 이어지는 스크린 신고식은 자연스러웠고, <성균관 스캔들>과 <패션왕>을 통해 동시대 배우들 가운데 유난히 돋보이는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손쉽게 증명해 보였다. 절대적 어른의 세상에서 길 잃은 청춘을 연기한 <밀회> 혹은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던 <베테랑> 속 이죽거리던 그의 표정은 관객의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1월 말 만나게 될 새 영화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예견하는 젊은 ‘금융맨’ 역할을 맡았다. 예술과 감정에 더 가까워 보이는 배우가 이성적 숫자를 마주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비록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았지만, 그만의 해석으로 탄생한 캐릭터는 성공을 예견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견고한 내공을 갖춘 유아인은 처음 만나는 사진가의 카메라 앞에서도 자유로웠다. 중후한 멋을 풍기는 카셀의 옆이었기에 그의 ‘소년미’가 더 돋보이기도 했지만, 그 매력을 자유자재로 꺼내 보이는 방법을 깨달은 그는 오히려 한발 앞서 자신의 이미지를 완성해갔다. 하얀 의자에 혼자 앉아도, 붉은색 가죽 소파에 기대앉을 때도 그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포착되는지, 어떻게 비치고 싶은지를 간파한 것처럼 보였다. 사실 우리는 그의 그런 모습을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스스로를 큐레이팅하는 시대에 유아인만큼 명민하게 스스로의 커리어와 삶을 가꾸고 표현하는 아티스트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TWO BY THE SKY
파리의 스카이라인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옥상에서 포즈를 취한 뱅상 카셀과 유아인. 뱅상 카셀이 입은 카멜 컬러 스웨터와 화이트 팬츠, 유아인의 화이트 케이블 스웨터는 폴로 랄프 로렌(Polo Ralph Lauren

서로의 안부를 묻고(카셀은 유아인의 ‘아트 컬렉티브’에 대해 궁금해했다), 자연스럽게 교감을 나누던 두 배우가 함께 포즈를 취할 때. 두 남자는 커버를 위해 서로의 공간을 나누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함께 카메라 앞에 서자 둘은 여전히 달랐다. 옥상에서 즉석으로 배우들에게 서로의 앞을 거니는 포즈를 제안하자, 카셀은 한 마리 표범처럼 유아인 앞을 뛰어다녔다. 반면 유아인은 조심스럽게 카셀 주위를 맴돌았다. 본능으로 몸을 움직이며 삶을 달려온 배우와 자신의 행보를 조심스럽게 가꾸어온 배우. 두 사람이 그렇게 서로를 맴돌 때, 파리 하늘에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이 둘의 압도적이고 눈부신 만남을 축하하는 듯한 순간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