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사진가와 가을 여인들
올가을 여성들에게는 세 가지 옵션이 주어졌다. 우아한 숙녀, 관능적인 요부, 중성적인 면과 팜므파탈적인 면을 모두 지닌 카멜레온. 세 명의 사진가를 통해 분석한 2013년 가을 여인들.
“난 발렌시아가가 야구 선수인 줄 알았다.” 비록 최고 디자이너의 이름도 외우지 못했지만, 어빙 펜은 아름다운 옷을 더욱 황홀하게 포착하는 본능적 감각을 지닌 사진가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패션 사진가로 꼽힐 만한 펜의 작품들은 이번 가을 ‘미드 센추리 스타일(4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는 20세기 중반의 미학)’을 추억한 디자이너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선사했다. 예를 들어 라프 시몬스는 디올 컬렉션을 준비하며 어빙 펜의 50년대 <보그> 사진들을 뚫어져라 연구했을 법하다. 당대 슈퍼 모델이자 아내인 리사 폰사그리브스가 우산을 들고 ‘뉴 룩’ 코트를 입은 이미지나 밍크 코트 차림의 진 파솃이 테이블에 기댄 모습은 디올 무대에서 붉은색 코트와 가죽 코트로 재탄생했다. 우아한 발레리나를 완성한 니나리치, 디올의 뉴 룩처럼 여러 겹의 소재로 탄생한 풀 스커트의 로샤스, 로마로 휴가를 떠난 도비마가 입을 법한 헤링본 스커트 수트를 선보인 돌체앤가바나에도 어빙 펜 사진들은 ‘영감’으로 작용했다. “극적이고, 필름 누아르 분위기가 이번 시즌 컬렉션에 자리 잡았다.” 미국 스타일닷컴은 이번 시즌 트렌드 중 하나로 ‘미드 센추리 스타일’을 꼽으며 이렇게 선언했다. “미우치아 프라다부터 셀린의 피비 파일로까지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미드 센추리 라인을 생각하며 허리가 날씬한 코트와 히치콕 여주인공에 어울릴법한 스커트 수트들을 선보였다.” 어빙 펜의 카메라 앞에 선 리사 폰사그리브스가 셀린의 크림색 치마를 입고 활처럼 어깨를 구부린 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우아한 기품이 넘친다.
수갑을 찬 채 벽에 기대고, 열차 노선 위에 쓰러져 있고, 자동차 창문에 반쯤 몸을 던지는 기 보댕 여인들은 치정에 얽힌 범죄 사건 현장에 남겨진 비극적 증인들처럼 보인다. 오죽하면 한 예술 평론가가 이렇게 평했을까. “그의 사진은 벼랑 끝에 선 패션을 보여준다. 강간당할 때 입었던 옷, 살인을 당하고 남겨진 구두, 목이 졸릴 때 사용된 스카프까지.” 이렇게 으스스한 면도 있지만, 생생한 색감이 돋보이는 그의 사진(영국 <보그> 화보를 위해 바다에 파란색 물감을 풀어 더욱 새파랗게 만드는 시도까지!)은 섹슈얼한 이미지를 꿈꾸는 스티븐 클라인이나 머트&마커스 같은 후배들에게 여전히 영감을 던져준다. 이번 시즌 비극적이고 도발적인 여성을 꿈꾼 디자이너들은 기 보댕 사진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옷을 선보였다. 가슴을 망사 장갑으로 가린 채 걸어 나온 마크 제이콥스 쇼의 릴리 맥미나미는 기 보댕 여인 그 자체. 짙은 스모키 화장과 윤기 흐르는 숏컷, 그리고 조형적인 샌들까지 기 보댕 사진 속 모든 요소를 갖췄다. 이 세상 모든 붉은색을 사용한 듯한 톰 포드의 패치워크 수트, 반짝이는 소재를 붕대처럼 감싼 베르사체 드레스, 허벅지의 깊숙한 곳까지 올라 오는 푸치의 빨강 싸이하이 부츠, 구찌의 깃털 장식 망사 톱과 실크 스커트의 여인도 기 보댕이 광기 어린 눈빛을 반짝일 만한 피사체. 또 유난히 원색을 좋아했던 기 보댕이 좋아할 만한 붉은 기운의 옷들도 가득했다. 그가 만약 이번 가을 파리 <보그> 커버를 찍어야 했다면, 과연 어떤 옷을 선택했을까? 기 보댕을 존경한다는 파리 <보그> 편집장, 엠마뉴엘 알트라면 발맹의 보랏빛 하렘 팬츠를 입은 미래 여전사를 적극 추천하지 않았을까? 뭔가 위험하고 에로틱한 분위기로 가득한 그 옷이라면 기 보댕 뮤즈가 입기에 손색없을 테니까.
“파리에서 쇼를 선보일 거라면, 파리지엥다워야죠.” 온통 금빛으로 반짝이는 웨스틴 호텔의 그랜드 볼룸에서 쇼를 마친 롤랑 뮤레가 이번 시즌 테마를 한마디로 정의했다. 그렇다면 그가 상상하는 파리지엥은? 가슴이 푹 파인 검정 드레스를 입고 반투명의 검정 스타킹에 아슬아슬한 스틸레토힐을 신은 채 어두운 파리 뒷골목을 거니는 여성들이다. 모델들이 워킹하는 순간, 맨 먼저 떠오른 건 헬무트 뉴튼의 여신들! 아주 남성적인 팬츠 수트와 몸매가 드러나는 모노톤 드레스가 유독 많이 등장한 올가을, 헬무트 뉴튼을 ‘오마주’하는 화보를 기획한다면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페티시적 취향으로 가득한 알투자라의 한쪽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슬릿 가죽 드레스, 커다란 금색 버클이 금욕적인 멋을 더한 캘빈 클라인의 가죽 드레스, 상체의 옆면을 체인으로 연결한 안토니 바카렐로의 검정 롱 드레스의 여인들은 뉴튼이 사랑했던 90년대 슈퍼 모델 나디아 아우어만의 완벽한 빙의였다. 실제로 알투자라는 80~90년대 뮈글러 의상을 촬영한 뉴튼 사진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헬무트 뉴튼 하면 떠오르는 팬츠 수트들도 넘쳐났다. 스텔라 맥카트니와 엠마뉴엘 웅가로 등에서 만날 수 있는 핀스트라이프 팬츠 수트는 2013년형 ‘르 스모킹’으로 불려도 좋을 정도. “뉴튼 사진들은 사진 속 패션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칼 라거펠트의 말처럼, 영원한 클래식으로 남을 뉴튼의 여성들이 올가을 그 어느 때보다 매력적으로 보인다.
- 에디터
- 패션 에디터 / 손기호
- 포토그래퍼
- KIM WESTON ARNOLD
- 스탭
- ILLUSTRATION / HONG SEUNG 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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