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정치는 모르겠고, 정치 드라마 장르에는 확실한 돌풍을 가져왔다
*이 리뷰에는 <돌풍>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처럼 새로운 주제와 시대정신을 포착한 정치 드라마가 나왔다. 6월 28일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돌풍>은 전율이 일 정도로 잘 만든 스릴러이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지적인 사회 비판물이다. 작가 박경수는 <추적자 THE CHASER>(2012), <황금의 제국>(2013), <펀치>(2014~2015), <귓속말>(2017) 등 묵직한 작품으로 매번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창작자다. 이번 드라마 보도 자료에서 그는 ‘사회를 고발한다는 말에 조금 거부감이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맥락을 살펴보면, 성인으로서 현실에 책임감을 느끼기에 타인의 잘못을 ‘고발’하듯 사회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고, 창작자로서 배경보다 인물에 더 흥미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박동호(설경구) 역시 자기 세대가 만든 사회에 책임감을 느끼고, 그 부조리를 껴안은 채 자폭하려는 인간이다. 주인공이 고발 대신 자기비판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이 드라마는 시의적절한 현실 비판에 도달한다.
<돌풍>은 가끔 ‘이게 본편인가 요약본인가’ 헷갈릴 정도로 전개 속도가 빠르다. 한 회에도 여러 번 위기와 반전이 벌어진다. 한국 근현대 정치사의 인상적 장면을 패러디한 듯한 미장센과 기발한 극적 상상이 완전 용해되었고, 정치인들의 수사법을 재현한 화려한 대사가 작품에 무게를 더한다. 상황의 긴박함에 비해 주요 배우들의 연기는 절제된 톤을 유지함으로써 리얼리티의 균형을 맞추는데, 특히 정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지 않은 김미숙을 활용한 것이 반갑다. 그의 캐릭터는 박동호의 범죄 사실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오른팔이 되는 인물로, 김미숙의 노련함 덕분에 노출 횟수 대비 존재감이 크다.
이야기는 낙마 위기에 몰린 국무총리 박동호가 대통령 장일준(김홍파) 암살을 시도하면서 시작된다. 대통령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정황을 눈치챈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이 박동호를 막아선다. 장일준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민주화 운동 세력의 상징이다. 하지만 자식의 비리 때문에 신념이 꺾였다. 그의 정치적 적자로 평가받는 정수진도 남편의 비리 때문에 재벌에 발목이 잡힌 상태다. 박동호는 이들의 잘못을 밝히려 하고, 정수진은 덮으려 한다.
박동호와 정수진의 싸움은 누가 정의고 누가 불의랄 것 없이 지저분하게 전개된다. 살인, 협박, 흑색선전, 중상모략, 당대회 선거인단 조작은 기본이고 기업, 검찰, 헌법재판소, 북한, 노조, 시민단체까지 등장하는 거대한 판이 펼쳐진다. 전대협 문화선전국장 출신 정수진이 자신을 고문했던 공안 검사 출신 야당 대표와 손을 잡기도 하고,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 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박동호가 탄핵 심판관을 매수하거나 검사에게 누명을 씌우기도 한다.
이 드라마는 자주 강력한 구호와 고매한 이상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조소한다. 전대협 의장 출신인 수진의 남편(이해영)은 과거 제 밑에서 운동하던 친구들이 다 금배지를 달았는데 자기는 현재 권력이 없는 게 콤플렉스다. 극우 단체의 지지를 받는 야당 대표 조상천(장광)은 북한의 가족에게 돈을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바람에 입지가 위태로워지자 북에 모종의 청탁을 한다. 정수진은 박동호를 청와대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노조위원장에게 돈을 주면서 데모를 사주하는데, 그때 하는 말은 “이 정도면 노동에서 해방될 거예요”다. 정수진이 변호사협회를 구워삶는 말은 민주화 세력이 쌓아온 사회적 유산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돌풍>은 한때 사회를 진보시킨 신념이 타락해 맹목적 구호로 전락한 세계를 그린다. 이 세계에는 영구한 정의도 불의도 없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끝없는 갱신이다. 극 중 박동호는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육사의 시 <광야> 중)’처럼 홀로 세계를 구하겠다는 운동권식 영웅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자신을 예수에 비유하기도 한다. 자기에게는 평화니 민주주의니 부패 척결이니 하는 신념이 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고, 그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구정물에 잠깐 발을 담가도 된다고 합리화하는, 그러다 영영 타락해버리는 정치인은 낯설지 않다. 드라마에서건 현실에서건. 하지만 박동호는 구정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쪽을 택함으로써 본인의 이상을 완결해낸다. 박동호의 비리가 밝혀지고, 시민 불복종 운동이 일어나고, 박동호가 부패 인사들의 명단을 폭로하기 위해 마지막 묘수를 두는 후반부는 이야기의 스케일에 걸맞은 몹 신과 긴박한 편집으로 강한 몰입을 유발한다.
<돌풍>은 현재 한국 정치와 오버랩되는 구석이 많다. 과거 민주화 운동 세력은 이제 권력 가까이에 있다. 우리가 이 나라를 독재에서 해방시켰고, 우리가 비켜서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퇴행할 거라는 그들의 자부심과 불안은, 우리가 이 나라를 전쟁과 가난에서 해방시켰고, 우리가 비켜서면 공산주의자들이 쳐들어온다는 그 윗세대의 자부심과 불안을 닮았다. 자부심이 오만으로, 불안이 편집증으로 종종 변질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다음 세대에게는 낡은 겁박처럼 들린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돌풍>은 이런 현실에 대한 환멸을 속 시원하게 드러낸다. 박동호의 적은 공산주의도, 독재도 아니다. 한때 독재와 싸웠으나 이제는 부패한 기득권이다. 과거 사상범으로 옥살이를 했던 정수진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저지른 범죄들로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렇게 드라마에서는 한 시대가 저문다.
극 중 박동호는 순교를 앞두고 비서실장 최연숙(김미숙)에게 깨끗한 정치인 명단을 정리하라고 한다. 최연숙은 방주에 태울 자를 골라보겠다고 답한다. 이로써 <돌풍>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한국 정치는 구태와 구구태를 오가는 타임트랩에 갇혀 있고, 박동호와 정수진이 물러나봤자 조상천 같은 부류만 살판이 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드라마라도, 드라마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대의 의제를 따라잡고 있는 것이 반갑다. 그것이 이토록 웰메이드라면 더할 나위 없다. <돌풍>은 제목이 예언이 되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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