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파란만장한 삶에서 발견한 전혀 예상치 못한 의미
2018년, 스물두 살에 임신 4개월이었던 나는 런던으로 이사했다. 당시 할머니는 노팅힐의 부유한 동네에 있는 구빈원(자립적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을 위한 지역 자선 사회주택)에 살았다. 아주 길고 번잡한 도로를 따라 몇 마일 걸으면, 내가 살던 셰퍼드 부시(Shepherd’s Bush)에서 노팅힐의 깨끗하고 나무가 우거진 거리까지 갈 수 있었다. 애니(Annie) 할머니의 집에는 작은 부엌이 있었다. 고리에 냄비와 마른 행주들이 걸려 있었고, 창문에서는 공동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옆집에 사는 백만장자들을 위한 경비 차량이 30분 정도에 한 번씩 아래 도로를 천천히 순찰했다.

할머니와 나는 함께 어두운 거실에 앉아 우유를 넣은 진한 홍차를 마시고, 비스킷을 먹고, 십자말풀이를 했다. 우리가 앉는 자리 주변에는 사진이 담긴 액자와 기념품들이 걸려 있었다. 내가 처음 학교에서 찍은 사진, 아빠가 당시의 나와 비슷한 나이일 때 상의를 벗은 채 손 위에 도마뱀을 올려놓고 찍은 사진, 또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삼촌의 결혼식 초대장 같은 것들이었다.
아기가 태어난 후, 애니 할머니는 카펫 위에 누워 발을 차는 아기를 어르곤 했다. ‘우리는 아가들을 좋아해’라고 할머니는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야, 우리는 아가들을 좋아해, 그렇지?’ 애니 할머니는 함께 있으면 늘 편한 사람이었다. 까다롭지 않았고,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았고, 놀라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80세를 코앞에 둔 그해, 할머니는 점점 더 감각이 둔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움직임이 느렸고, 그나마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주 무언가를 잊었다. 막 치매를 진단받고 난 후였다.
어느 날 오후, 할머니는 가슴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며 아래층에 사는 친구의 집 문을 두드렸다. 할머니의 친구가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고 말했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민망하게 여겼다. 도착한 구급대원들은 할머니가 심각한 심장마비를 두 번 겪었다고 말했다.
애니 할머니는 몇 주 동안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다가 배터시 지역의 요양원으로 옮겼다. 나는 할머니가 쓰던 접이식 식탁을 받았다. 식탁을 부엌에 두고, 그 한쪽 끝에 유아용 식탁 의자를 가져다 두었다. 식탁 가운데에는 초록색 유리 꽃병을 놓았다. 아들이 한 살 생일을 맞은 달에 영국에 봉쇄령이 내렸다. 우리는 브라이턴(Brighton)에 있는 엄마의 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이모가 자신의 카페에서 팔았던, 하지만 이제는 팔 수 없게 된 당근 케이크를 먹으며 지냈다. 애니 할머니는 1년 넘게 면회객을 맞이하지 못했다.
마침내 면회 제한이 풀려, 나는 할머니를 만나러 요양원으로 갔다. 현관에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애니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길고 하얗게 센 머리가 등 뒤에서 엉켜 있었다. 파란색 종이 마스크 위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할머니는 전보다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정된 거리를 유지한 채 방 맞은편에 앉았다. 할머니의 머리 뒤편으로 TV가 켜져 있었다. 할머니는 아침에 뭘 먹었는지, 혹은 언제 마지막으로 외출했는지 나에게 말해주지 못했다.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아기에 대해 잊어버린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모가 애니 할머니를 모시고 세인트 레오나즈(St Leonards)의 바닷가 마을로 이사했다. 이모와 할머니는 해가 잘 드는 집에서 이모가 키우던 작은 개와 함께 살았다. 앞발로 손뼉을 치고 빙글빙글 돌 줄 아는 개였다. 욕실에는 환자용 변기가 있었고, 찬장에는 약이 잔뜩 쌓여 있었다. 애니 할머니는 보행기를 사용해 안락의자와 침대 사이를 오갔다. 그래도 그곳은 행복했다. 애니 할머니의 머리카락은 언제나 빗질과 기름칠이 되어 두 가닥으로 가늘게 땋은 상태였다. 이모는 할머니에게 화사한 옷들을 입혔다. 뜨개 과일 장식이 있는 카디건, 할머니의 얼굴을 모두 덮는 커다란 밀짚모자 같은 것들이었다.
둘째 아들이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애니 할머니의 삶에 대해 들어보기로 했다. 2022년이 끝나갈 무렵 겨울이었다. 나는 둘째를 아기띠로 들쳐 업은 채 기차를 타고 세인트 레오나즈로 갔다. 인터뷰를 해도 괜찮겠느냐고 묻자, 애니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물론이지. 그런데 그런 건 왜 하고 싶은 거니?’ 그때 나는 할머니의 인생이 내 글에 영감이 될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할머니를 잃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할머니를 남겨보고 싶다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에게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처럼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애니 할머니와 함께 있을 때마다 마치 나 자신과 함께 있는 기분을 느꼈다.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나의 미래를 보는 방법이기도, 나의 과거를 보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할머니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할머니 어머니의 죽음, 할머니 아버지의 재혼, 할머니가 예술학교를 다니던 시절, 뜻밖의 임신과 이후 등기소에서의 결혼, 남편의 학대로 결혼 2년 만에 집을 나온 일,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갓 태어난 아들을 데리고 홀로 런던으로 이사한 이야기까지.
하지만 애니 할머니는 쉽게 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가 인터뷰를 기쁘게 생각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할머니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할머니에게 시금치 페타 치즈 파이 레시피를 물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할머니는 그냥 구글에 찾아보라고 대답했었다. 할머니는 남 보기에 좋도록 자신을 꾸며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데도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 혹은 옛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는 것, 혹은 그 두 가지가 모두 할머니를 슬프게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한 시간쯤 지나 인터뷰를 포기했다. 우리는 십자말풀이를 하며 남은 오후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인터뷰의 방향을 틀었다. 애니 할머니가 젊었을 때 알았던 사람들과 차례차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밖에서부터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이모는 애니 할머니가 엄마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말해주었다. 할머니는 나팔바지 끝에 바짓단을 고정하는 클립을 꽂고, 뒤로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태운 채 자전거로 웨스트 런던을 누비고 다녔다고 했다. 이모는 할머니가 미술 교사였을 때 한 작업들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집 서랍은 반짝이 가루, 휴지 심, 리본, 단추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애니 할머니의 두 번째 남편)는 두 분이 필라델피아에서 1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했을 때에 관해 이야기해주었다. 두 분은 그곳 사람들이 편집증에 사로잡혀 총을 살 때 그곳을 떠났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형제와 함께 문을 연 자연식 식당 이야기도 해주었다. 할머니는 그 식당에서 이스트를 넣지 않은 빵을 굽고, 과일즙으로 단맛을 낸 딸기잼 라벨을 디자인했다. 할아버지는 또 두 분의 개방 결혼 생활과,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여자친구들, 그리고 자녀들이 10대가 됐을 무렵 할머니가 만난 열정적인 펑크록 타입의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그 남자친구는 매일 우편함으로 엽서를 보내며 할머니에게 이혼해달라고 애원했고, 결국 할머니는 그 말대로 했다.
내가 어린 시절 자주 봤던 애니 할머니의 친한 친구 알렉스도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심하게 취한 할머니가 주차된 차 중에서 자기 차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운전하려고 했던 일이다. 택시 뒷좌석에서 남자들을 더듬었던 일이나,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할머니가 두 번째 이혼을 하고 몇 년 후, 그리고 첫아들인 삼촌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후의 일이었다.
애니 할머니의 예전 남자친구도 만났다. 그는 할머니와 사귀던 당시 소유했던 노팅힐의 골동품 가게 위층에 아직 살고 있었다. 그는 할머니가 살던 집 뒷방에 가마를 두고 깨진 도자기를 고치는 사업을 했다고 말해주었다. 할머니가 이비자에 살면서 자연과 햇빛을 누리고 마음의 치유를 얻었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되었다. 할머니는 1990년대 중반에 이비자로 이주했다. 그곳에서는 오전 11시에 맥주를 마시는 게 사회적으로 용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는 인터뷰를 중단했다. 아빠, 브렌다(Brenda) 고모할머니, 또 애니 할머니의 친구 등 인터뷰할 사람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인터뷰가 점점 불편해졌다. 잠깐 내려놓을 시간이 필요했다. 녹음 파일들은 노트북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다시 들어볼 생각만으로도 불안해졌다. 녹음 파일들 속 애니 할머니는 내가 아는 온화하고 침착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여러 가지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게 고통스러웠다. 마치 평생 속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스스로 야기한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삶에 침범한 건 나였으며, 이게 그 벌이었다.
그 인터뷰 파일들을 듣는 데 3년이 걸렸다. 누군가가 녹취 앱을 내려받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듣는 동안 한 가지 알아차린 것은, 나를 포함한 모두가 애니 할머니를 지칭할 때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를 번갈아 썼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속에서, 할머니는 여기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여기에 있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할머니의 다양한 면모는 그 파일들 안에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대신, 이번에는 녹음 파일 속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계속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달라지는 것이 기만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도 이해하게 됐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와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힘을 주기도, 또 우리를 고갈시키기도 하는 이유인 듯했다.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동시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 말이다.
나는 애니 할머니가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자아를 비추는 거울은 없다. 인터뷰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진정한 자신은 침묵에,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에, 하지 못한 말들에 있다. 아마도 애니 할머니는 도자기를 고칠 때나 그림을 그릴 때, 혹은 독한 술을 따를 때 가장 자기다웠는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애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할머니의 집에서였다.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아 내 아들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큰 아이는 종잇조각에 소를 그려 할머니에게 주었다. 할머니도 소를 그려 아이에게 주었다. 치매로 인한 상실은 그 속도가 매우 느렸다. 내가 인터뷰를 통해 한 일은, 사라지는 것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나는 할머니의 완전하고 객관적인 초상을 그려내고 싶었던 게 아니다. 그런 건 가능하지도 않다. 나는 삶을 찾으려 했다. 그 모든 생생함과 신비로움이 고스란히 담긴 삶을.
마지막으로, 이모의 인터뷰를 받아쓴 내용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옮긴다. “열일곱 살 때 뉴욕에 간 적이 있어. 돌아오는 날 할머니가 빅토리아역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지. 난 온통 호피 무늬 옷을 입고, 얼굴은 새하얗게 분칠한 상태로 기차에서 내렸어. 승강장 끝에서 나를 본 할머니의 표정이 기억나. 할머니는 나에게 키스해주지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내가 거기 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할머니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어.”
사바 샘스(Saba Sams)는 3월 영국에서 출간된 소설 <Gunk>를 썼다.

Saba SamsGunk
(2026, Bloomsbury Publishing P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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