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꾸뛰르 다이어리 – ① 꾸뛰르 주간 첫날
파리 오뜨 꾸뛰르를 취재하기 위해 오랜만에 파리에 왔다. 익숙한 호텔 풍경과 쇼장의 열기, 익숙하지 않은 파리의 여름과 달라진 중국인들의 위상, 프레타 포르테와는 다른 꾸뛰르 쇼의 사소한 풍경들… 한여름 파리 꾸뛰르 주간엔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 ▷ ① 꾸뛰르 주간 첫날
7월 3일, 꾸뛰르 주간 첫날
11시 첫 쇼장으로 향했다. 꾸뛰르 쇼는 아니다. 꾸뛰르 주간에 발표하는 에르메스 리조트 컬렉션으로, 예전 마르탱 마르지엘라가 디자인 수장을 맡았던 시절처럼 나데주 시뷸스키는 생토노레에 있는 에르메스 매장에서 쇼를 열었다. 하프 연주가 시작되며 쇼가 시작됐다. 더없이 정갈하고 담백한 쇼. 일요일 아침을 여는 하프 소품곡 같은 쇼. 에르메스에 어울리는 절제된 럭셔리를 보여주는 쇼였다. 프린트는 간간이 등장한 스카프 프린트 정도. 엄지발가락만 끼는 샌들은 날렵하고 예쁜데 안타깝게도 발볼이 넓거나 발이 통통한 고객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쇼에는 아시아 모델들이 네 명이나 섰는데 한국인 모델 박지혜와 이선정도 있었다.
6시 두 번째 베트멍 쇼도 정식 꾸뛰르 쇼는 아니다(꾸뛰르 주간의 오프닝 쇼로 적혀 있었지만, 며칠 후 디자이너는 <더블유 코리아>와의 인터뷰에서 2017년 봄여름 쇼라고 밝혔다). 꾸뛰르와 프레타 포르테의 개념과 경계 자체를 무시한 쇼. 그런데 이 쇼는 꼭 봐야만 했다. 내가 패션 위크에 못 간 2년 동안 패션계 핫한 주인공으로 떠오른 쇼, 어느 날 짠하고 나타나 말도 안 되게 크고 헐렁한 옷들을 전 세계 유행의 도시에 퍼뜨린 조지아 출신 디자이너 뎀나 바잘리아. 그가 선보인 아방가르드가 마르탱 마르지엘라(그는 그곳 스태프 출신)와 꼼데가르쏭을 떠올린다 해도, 지금 대세는 베트멍이다(서울의 멋쟁이들이 죄다 소매가 길고 헐렁한 셔츠를 뒤로 훌러덩 젖혀 입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게다가 백화점에서 날아온 프로모션 전단지 같은 초청장(그래서 버릴 뻔했다!)엔 여러 브랜드의 협업을 상징하는 로고들이 인쇄돼 있었다. 브리오니, 쇼트, 리바이스, 꼼데가르쏭 셔츠, 리복, 캐나다 구스, 닥터 마틴, 쥬시 꾸뛰르, 알파 인더스트리, 이스트팩, 매킨토시, 루체스. 모두가 각자의 아이템으로 최고를 자랑하는 브랜드들이었다. 과연 이 브랜드들과 어떻게 협업했다는 거지?
쇼장은 1층부터 꼭대기 층까지 가운데가 뻥 뚫린 갤러리 라파예트 1층 통로. 다른 층에선 정상 영업 중이다. 첫 룩은 베트멍의 시그니처인 비비빅 재킷. 베트멍 마니아들의 애간장을 녹일 긴소매 셔츠, 긴소매 트렌치, 에이프런 드레스, 점프수트처럼 보이는 셔츠와 팬츠, 진짜 점프수트, 패딩 수트, 한쪽 소매 실크 원피스 등이 빠른 속도로 걸어 나왔다. 베트멍의 장기인 실용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링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벨트 한쪽을 바닥까지 축 늘어뜨리고, 새틴 싸이 하이 부츠를 허리까지 끌어 올려 팬츠처럼 보이게 신고, 사각 체인 백은 화살통처럼 사선으로 등에 바짝 메는 식이었다. 쇼의 정체성이 뭐든, 그 속엔 꾸뛰르급 콜라보레이션이 숨어 있었다.
한눈에 알 수 있는 협업은 마놀로 블라닉의 싸이 하이 부츠와 쥬시 꾸뛰르 트랙 수트를 변형시킨 이브닝 드레스 등. 하지만 빅 재킷엔 브리오니, 헐렁한 셔츠엔 꼼데가르쏭, 진 오버올엔 리바이스가 찍혀 있을 것이다(<WWD>에 의하면 뎀나의 형제 구람이 브랜드들에 직접 허락을 받아냈고, 결과는 공동 상표 부착의 콜라보레이션 옷과 액세서리의 탄생. 각각의 브랜드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란다). 불과 10여 분간 눈앞을 휙 스쳐 지나간 30여 벌의 옷들이었지만, 머리를 짧게 자른 모델들의 씩씩한 워킹만큼이나 울림은 굉장했다.
명품 브랜드의 라벨이 들어간 베트멍의 한정판 옷이라니! 그것도 요즘 젊은 패피들이 딱 원하는 가볍고 실용적인 아방가르드 스타일! 참으로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멋진 결과물이었다. 좋은 쇼를 보면 늘 그렇듯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2년간 베트멍의 정체를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베트멍부터 쇼핑해야겠다고 맘먹었다.
8시 꾸뛰르 주간에 딱 어울리는 첫 쇼, 아틀리에 베르사체 쇼장으로 왔다. 얼굴이 정말 하얀 도자기 미인 카렌 엘슨이 자주색 브래지어 톱을 노출한 새틴 드레스와 새틴 안감의 코트 차림으로 등장했다. 뒤를 이어 사스키아, 마리아칼라, 사샤, 한느 개비… 마지막 캐롤린 머피까지 <보그> 커버 모델들이 총출동했다. 여신 같은 그들의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멋진 테일러링의 바이어스 컷 드레스들! 짧거나 길거나 테일이 길게 끌리거나, 모든 드레스에 드라마틱하게 사용된 끈과 주름 장식. 마리아칼라, 사샤, 캐롤린 머피가 입은 드레스는 특히 예뻤다.
- 에디터
- 이명희 (두산매거진 에디토리얼 디렉터)
- 포토그래퍼
- JAMES COCHRANE, LEE MYUNG HEE, INDIG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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