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인분을 위한 노동
“아들을 둘 키우고 있네.”
새해를 맞아 모 영화의 관객 수를 맞혀 입소문이 난 점술가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 생년월일을 듣고 한문을 휘갈겨 쓰더니 말했다.
“네? 전 일곱 살짜리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요.”
“낳아야만 아들인가? 같이 사는 남자, 그 남자가 평생 키워야 할 아들이야.”
함께 간 친구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는 게 느껴졌지만, 정말이지 나는 떡국 한 입만큼도 웃기지 않았다. 아침 일이 떠올랐다. 남편은 머플러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5분 뒤에 자신의 스트라이프 수트 바지가 총 몇 벌인지 물었다. 똑같이 출근 준비를 하면서 나는 아들 아침밥을 먹이고 준비물을 챙겼으며 옷을 입혔다. 거실 테이블에는 며칠 전 그가 먹다 남긴 맥주와 순대 봉지가 화석으로 변해 있었던가. 일곱 살짜리가 벌여놓은 레고 블록과 중년의 남자가 흘려놓은 옷가지를 뒤치다꺼리할 팔자. 역시 그 점술가는 소문만큼 용했다.
“남편을 아들처럼 키운다”는 말에는 돌봄 노동의 불균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유사 문장으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 있다. 남자가 임금 노동에 집중하도록 가정의 모든 일은 여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회적 함의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청소, 빨래, 설거지 같은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가사 노동뿐 아니라 가족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감정 노동도 포함되어 있다. 가족 구성원을 가사 노동과 육아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역할, 생일이나 여행 같은 가족 모임을 챙기고 계획하는 역할까지 모두 아우른다. 그야말로 가정을 책임지는 총감독이다. (명령문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독이라고 칭했을 뿐, 요구받는 일 면면을 뜯어보면 집사나 비서에 가깝다.)
가정을 책임지는 총감독 자리는 전혀 즐겁지 않다. 삶을 갉아먹는다. 사실 결혼 초반에는 불균형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둘 다 서툴렀고, 각자 선호하는 가사 노동을 찾아 분담했고, 그럭저럭 운영이 됐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부모님과 살림을 합치면서 남편은 ‘난 육아를 잘 모르지 뭐야?’ 하는 태도로 서서히 집안일에서 발을 뺐고 어느새 ‘내 일은 아니지만 하라고 하니 도와줄게’ 식의 태도를 장착했다. 책임자와 보조자의 관계로 변화하자 그는 구체적 요구에는 움직이되 절대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청소, 쓰레기 버리기는 했지만 아이 운동화 모래 털기, 휴지 갈아 끼우기, 떨어진 식재료를 파악해 인터넷 쇼핑하기 같은 일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됐다.
가정의 관리자로 등극한 후 에너지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이 기사를 쓰는 중에도 아이를 마중 나오라는 학원 전화를 받았고, 스웨터를 드라이클리닝 맡기라는 친정 엄마의 카톡을 받았으며, 포털 사이트 쇼핑 배너를 보고 집에 달걀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편에게 아이 예방접종을 할 병원을 예약하라고 부탁 같은 지시도 했다. 재주가 늘어가는 스마트폰 덕분에 짬 나는 시간은 모두 인터넷 장보기, 주말 나들이 장소 검색 등에 사용하고 있는데 가족을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은 보조를 하다 보면 정말이지 에너지가 달린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비겁하다고 생각하던 변명이 실제로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바빠 죽겠네. 오늘도 원고를 다 못 마치겠어.” 똑같은 시간에 출근한 남편은 업무 시간 동안 과연 몇 분이나 가사를 생각했을까. 학생이었다면 전교 1등도 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제마 하틀리(Gemma Hartley)는 저서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에서 여자들에게만 보이는 지긋지긋한 감정 노동에 대해 말한다. 가사와 육아를 정확히 5 대 5로 나눈다고 해도 여성들이 그 일을 수행할 때 사용하는 감정 노동은 수량화되지 않는다는 것. “왜 그는 하지 않는가? 왜 꼭 부탁을 해야 할까? 처리해야 할 일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항상 여자일까.” 정확하게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분명한 중년의 남성에게 끊임없이 할 일을 지시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을 설명해주는 분명한 언어였다. 그러니까 왜 여자는 돌봄 노동을 가르치는 노동까지 해야 하는가. 귀엽지도 않은 중년 남성을 왜 아들 키우듯 해야 할까. 나아가 가사 노동의 불균형을 풀어보자고 대화를 시도하는 노동까지 왜 여자의 몫이어야만 하는가. 이유는 하나다. 해야 하는 일이라고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 벌어오는 남자, 가사 노동과 육아를 전담하는 여자는 산업화 시대에 만들어진 역할 분담 모델이다. 효과적으로 노동자를 길러내기 위해 고안된 캠페인 같은 정책이었다. 시간이 흘러 사회는 복잡해졌고 여성들 역시 일터로 나갔지만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는 의무만 달라지지 않았다. 가사 노동의 쏠림 현상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잰시 던은 저서 <아기를 낳은 후에 남편을 미워하지 않는 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정치 평론가 애너벨 크랩은 저서 <아내 가뭄>에서 지긋지긋한 감정 노동에 대해 토로한다. (이들이 묘사하는 상황은 놀라울 정도로 한국과 유사한데, 작가들이 내 남편과 결혼한 건 아닐까 착각할 지경이었다.)
엄마의 뒷바라지를 먹고 자란 밀레니얼 세대는 엄마가 집안 살림과 대소사를 책임지는 동안 아빠가 소파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뽀로로>를 보며 ‘왜 요리는 루피만 할까’ 의문을 품었지만 딸들은 남자 형제보다 가사 심부름에 자주 동원되며 무의식중에 가사는 여자의 책임이라는 메시지를 주입받았다. (얼마 전 뮤지션들의 버스킹을 담은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매일 아침 설거지를 한 건 유일한 여성 출연자 태연이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설거지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제작진은 그 장면에 태연히 ‘부지런하다’, ‘묵묵하다’는 자막을 달았다.) 딸들이 무럭무럭 자라 만난 세계는 더 험난하다. 임금 노동을 해서 살림에 보탬이 되면서도 완벽하게 가정을 운영하는 슈퍼우먼.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여성상이다.
경험했기 때문에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여자가 감성적이라 타인을 더 잘 배려하기 때문에 가사 노동과 감정 노동에 적합하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집안일은 잘하도록 타고난 게 아니라 자주 하면서 익숙해질 뿐이다. 남편은 꼼꼼한 성격이라 당근도 잘 썰고 창틀 청소도 잘하지만 그 일의 책임자는 나다. 사회는 카레 속에 든 당근 모양으로 가사 담당자를 결정하지 않는다. 육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아이를 낳은 당사자이기에 출산휴가를 받았고 그 기간 동안 남편보다 아이를 더 자주 돌보았다. 이 과정에서 육아에 먼저 익숙해졌고 그 결과 책임자가 됐다. 처음부터 그와 나 사이에 능력 차이는 없었다. ‘가사 노동과 감정 노동을 자기 일로 생각하느냐 아니냐’가 실력 차이를 낳았을 뿐이다.
남편과 둘이 살던 시절, 가사 노동은 누가 더 오랫동안 더러움을 견디느냐의 싸움이라고 말하곤 했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자가 치우게 되는 일종의 게임으로 여겼다.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게으름을 부려서,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하지 않은 노동은 남편이 아니라 나이 든 우리 엄마에게 돌아갔다. 아내가 있어 야근과 회식이 자유로운 남자처럼 나는 엄마가 있어 출장과 저녁 약속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엄마가 손목을 다쳤을 때는 가사 도우미를 구했다. 이어달리기 배턴 터치하듯 가사 노동이 넘어갔다. 엄마 또래의 중년 여성이 엄마의 일을 대신했고 우리 집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갔다. 우리 사회는 가사 노동과 감정 노동을 여자에게만 대물림한다.
제마 하틀리는 책 말미에 이르러 남편과 어느 정도 가사와 감정 노동 분담에 성공한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스스로 관리자 역할을 내려놓음으로써 변화를 일궈냈다. 법이 아닌 개인이 해낸 이 성취는 솔직히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해피 엔딩에 가깝다. 남편을 변화시키는 감정 노동을 할 바에 가사 노동의 짐을 홀로 짊어질 여자들이 대부분이라 그렇다. 누구라도 유리한 자리를 선점했는데 명분에 의해 불편함을 애써 감수하기란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몫인 1인분의 노동을 하지 않아서 파트너가 끊임없이 그 일을 대신해야 한다면 다 같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랑하니까 해달 라는 것도 아니고 성인이니까 자기 일은 자기가 하자는 것뿐이다. 똑같이 일터에서 퇴근했는데 한 명은 텔레비전을 보고 한 명은 밥을 차리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하지 않나. 나는 설거지를 할 테니 당신은 아이를 씻기고 재우라고 부탁 같은 지시를 해야 하는 감정 노동은 삶을 너무 피폐하게 하지 않나.
나는 오히려 기술 발달에서 희망을 본다. 요즘 3대 필수 가전제품으로 꼽히는 건조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는 어떤 정치인도 해내지 못한 저녁 있는 삶을 선사했다는 평이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기특한 가전제품이 나올 때마다 가사 노동의 고단함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도 순작용이다. 나는 그저 인공지능 로봇이 가사 노동을 완벽하게 해내는 날, 이 모든 기계의 조작을 여자들이 도맡고 있지 않기만을 바란다. 전자 기기 다루기만큼은 남자들이 여자보다 잘한다고 알려진 일 아닌가. 고전적인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믿음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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