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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의 달’, 이것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2023.01.20

by 민용준

    ‘유랑의 달’, 이것은 결국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논쟁적인 소재를 관통하지만 결국 마음과 마음의 연결을 말하는 영화, <유랑의 달>에 관하여.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눈썹달은 차차 보름달로 차오른 뒤 다시 이지러져 왼쪽으로 기운다. 초승달에서 그믐달로, 한 달 주기로 달이 시시각각 제 모습을 바꾸는 건 본래 형태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을 받아 빛나는 달의 형태가 지구상에 자리한 인간의 시야 조건에 따라 드러나 보이는 위치가 각기 달라지는 탓이다. 떠오르는 실상은 늘 그대로지만 눈에 보이는 형상에는 매번 차이가 있다. 보는 사람이 머무는 시공간에 따라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 보인다. 달의 이름이 다양한 건 그만큼 많은 달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자리한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시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 달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변화하는 달의 형상을 달의 정체성처럼 결정하고 규정한 것이다.

    앞뒤로 흔들리는 그네를 탄 소녀의 뒷모습을 비추던 카메라는 곧 소녀의 정면을 응시한다. 마치 소녀와 마주 보듯, 카메라 너머를 응시하듯, 카메라와 소녀가 대면하더니 이윽고 원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카메라가 그네 옆 벤치에 앉은 소녀를 오른쪽으로 밀어내듯 왼쪽으로 서서히 움직이다 이내 다른 벤치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비로소 멈춘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흐르듯 지나는 구름이 해를 가리는 풍경이 차례로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던 소녀는 갑작스레 떨어지는 빗방울을 의식하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대신 몸으로 비를 가려 책을 마저 읽으려 하던 중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우산을 받쳐 들고 선 남자를 본다. 그리고 소녀는 우산을 쓴 남자와 나란히 길을 나선다. 호기심인지, 의심인지 모를 표정을 짓는 소녀의 얼굴 뒤로 마음에 격랑이 일어나듯,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강물이 불어나 세차게 흐른다.

    나기라 유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유랑의 달>은 한 남자와 한 소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인 남자 사에키 후미(마츠자카 토리)는 어린 소녀 카나이 사라사(시라토리 타마키)를 집으로 유인해 납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고 소아 성애 범죄자가 된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사라사(히로세 스즈)는 결혼을 재촉하는 남자 친구 료(요코하마 류세이)와 동거 중이다. 그런 어느 날 직장 동료와 함께 충동적으로 커피숍에 간 사라사는 가게 주인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더니 곧 미소를 짓는다. 어린 시절 공원에서 만났던 그 남자, 후미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정체된 마음이 흘러 요동친다.

    <유랑의 달> 원작자 나기라 유는 자신이 ‘세상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을 주로 다룬다고 말해왔다. 사라사와 후미는 그 말에 딱 떨어지는 사람들이다. 세상으로부터 소아 성애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분류되는 후미와 사라사가 다시 만난 건 서로를 편안하게 여기고 말이 통하는 존재였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비록 성인과 아이라 해도 서로를 친구처럼 받아들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드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인의 시선에서 후미와 사라사는 소아 성애 기질로 아이를 유인해 납치한 가해자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던 피해자로 분류된다. 두 사람이 처한 현실이 어떠했는지, 두 사람이 실제로 어떤 관계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가해자와 피해자를 지목하는 뉴스 헤드라인의 범죄와 함께 기억될 뿐이다.

    “근원적으로 인간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가 중요하기보단 선과 악에 대한 고찰이 결핍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닐까?” <유랑의 달>을 연출한 이상일 감독은 자신의 물음과 닮은 문제적인 수작을 거듭 만들어왔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악인>과 <분노>는 인간 악행 이면에 잠재된 악의에 초점을 맞추는 영화다. <악인>이 누군가의 악행이 다른 누군가의 악의에서 비롯된 결과일 때 사회적 처벌의 대상이 되는 악행에 비해 악의가 안전해지는 아이러니를 지켜보게 되는 영화라면 <분노>는 뿌리 깊은 악의로 불신과 의심과 분노를 품게 된 이들의 면면을 살피며 악의의 알고리즘을 탐구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선악 여부를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선악의 인과를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사건에 자리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역시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과 <분노>는 감정적으로 분리되거나 심리적으로 단절되는 데 능한 현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기저를 살펴보고자 하는 창작자의 의지가 발현된 결과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랑의 달>은 보다 적극적으로 고립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서는 영화같이 느껴진다. <악인>과 <분노>가 악행의 내면을 파고들어 악의라는 실체를 적출해내는 영화라면 <유랑의 달>은 악의의 주체로 낙인찍힌 개인의 무고한 진심을 소명하는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소명의 대상이 되는 이에게 찍힌 낙인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 자체로 <유랑의 달>은 논쟁의 대상이 될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아이를 납치했다는 혐의로 소아 성애자 범죄자가 된 후미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딱히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후미는 범법자로 분류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고 특수한 악의를 발산하지도 않는다. 그의 소아 성애는 하등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그는 소아 성애가 아니라 소아 수준의 순수와 교감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속내까지 발가벗기듯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몇몇 관객은 자신의 관점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랑의 달>은 사회적으로 견고한 관성적 시선과 대결을 벌이는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만인을 설득하는 보편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의식에 사로잡힌 영화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우화적 세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만약 이런 관계가 이 세계에 실재한다면 이보다 순수하고 운명적인 관계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혼의 쌍둥이 같은 두 사람이 연결된 세계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이상일 감독의 말처럼 <유랑의 달>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두 사람의 만남을 그린 운명적인 알레고리에 가깝다. 후미는 식물 같은 사람이다. 자신 스스로 소아 성애자라고 인정하는 후미의 심리는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보인다.

    그는 자신의 뿌리 깊은 결핍을 내보이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라 되레 타인에게 심각한 오해를 받는 상황에도 거리낌이 없다. 사라사는 그런 후미가 온전히 마음을 여는 유일한 열쇠 같은 존재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사라사 역시 마음의 빗장을 풀 상대가 필요한 소녀였다. 갑작스럽게 부모와 이별하게 된 사라사는 이모 집에서 자라며 사촌 오빠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사라사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니다. 그런 사라사 앞에 나타난 후미는 유일하게 사라사의 이야기를 온전히 들어주는 존재가 된다.

    사라사의 유년 시절에서 시작되는 원작의 서사는 과거에서 현재로 순행적인 흐름 안에서 진전되는 반면, 영화는 유년 시절인 과거와 성인이 된 지금이 플래시백 형식을 동원한 교차 편집 방식으로 나열된다. 원작이 사라사의 시점을 바탕으로 후미와의 관계 심리를 조망하고 후미의 내면적 고백으로 이르는 서술 형식을 통해 반전적 묘미를 안긴다면, 영화는 사라사의 시점과 내면 심리를 줄기 삼아 후미의 입장을 조금씩 이어 붙여가며 두 사람의 심정을 하나의 가지처럼 접목해나가듯 묘사하는 과정에서 터져나올 것 같은 모종의 에너지를 축적해나가고, 후반부에 다다라 일거에 폭발시킨다. 스스로를 결핍으로 가둔 개인의 억눌린 심정이 거세게 분출하는 영화의 가장 마지막 부분은 원작 소설에서 드러내지 않았던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전적이라는 인상이 느껴지는 대목인데, 이는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영화적인 형식으로 보완하고자 한 선택 같기도 하다.

    나기라 유는 <유랑의 달>이 사라사를 향한 세간의 시선에 깃든 심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이 두 사람에게 붙이는 동정의 꼬리표는 당사자에게 고통일 뿐이다.” <유랑의 달>은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로 규정된 후미와 사라사 모두가 가혹해지는 이야기다. 사라사는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주변인들은 그런 발언 역시 피해로 인한 증상으로 여긴다. 결국 사라사와 후미의 연대는 사회적인 고립일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아의 독립이기도 할 것이다.

    서로를 향한 온전한 진실과 진심을 아는 두 사람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시선을 벗어날 순 없다고 해도 끝내 서로를 선택하는 건 두 사람이 서로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할 수 없는 말을 하고 타인이 들어주지 않는 말을 들어주는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유랑의 달>은 로맨스 영화로서 선명한 여운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한데, 이는 애초에 원작의 서사가 그러한 감정으로 수렴하는 덕분이기도 하지만, 후미와 사라사의 연대가 다다를 감정이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이상일 감독의 이해와 납득에서 비롯된 결과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유랑의 달>은 결국 범상치 않은 로맨스 영화이자 사랑의 형태에 대한 고찰을 요구하는 영화가 될 운명이었다. 겉으로는 자상하고 배려가 넘치는 것처럼 보이는 료는 사라사의 과거를 동정하는 듯 우위에 서려고 한다. 자신의 뜻대로 따르지 않는 사라사에게 과격한 폭력을 불사한다. 사라사는 그런 료 앞에서 자신을 숨기고 다른 사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후미를 만나 비로소 숨을 쉰다. 위장된 미소를 짓고 뱉어야 할 말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자신처럼 웃고, 말한다. 온전히 자유분방한 스스로를 내보인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후미는 그래서 사라사가 사랑할 수 있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반면 후미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이 내줄 수 있는 것을 내주고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끝내 꽁꽁 싸매고 있던 궁극의 결핍을 사라사에게 유일하게 내보임으로써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그렇게 <유랑의 달>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이들이 나눌 수 있는 감정이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서 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상대와 나누는 감정이란 사랑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흥미로운 건 <유랑의 달>이 그것을 설득하거나 공감하길 권하기보다는 그런 운명을 전시하는 영화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해를 구하거나 공감을 요구하는 보편적 세계의 영화로서 제시되기보다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영역을 구획하고 보존하는, 어느 타인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조명하는 영화에 가깝다. 문제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위험성을 의식하기보다는 보여지는 대로 돌파해버리는 듯한 영화는 마지막까지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듯 밀고 나간다.

    사라사와 후미의 감정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거나 설득하겠다는 요량보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관객의 요량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으로 소아 성애자라 규정된 인물의 투명한 내면을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시 피해자라고 규정된 이가 가해자라고 규정된 이를 거듭 그리는 갈망을 무엇이라 규정할까? 누군가는 순수와 사랑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겠지만 누군가는 끝내 거부할 것이다. 모든 것을 보여줘도 온전하게 납득할 수 없다면 그건 결코 영화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물론 <유랑의 달>에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공감하지 못함과 납득할 수 없음이 이 영화를 힐난할 수 있는 자격도 아닐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유랑의 달>은 이 영화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논쟁 자체가 영화의 영역에 자리한 듯한, 감상 역시 영화적 세계의 일부인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 소설이 발굴해낸 문제적인 관점을 보다 날카롭게 벼리고 단단하게 담금질해낸 듯한 <유랑의 달>은 이상일 감독의 경력에서 가장 도전적인 질문을 품은 영화처럼 보인다. 다다르는 답은 각기 다를지 몰라도 그 질문은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뒤흔들 것이다. 히로세 스즈의 열연과 마츠자카 토리의 호연은 그러한 도전을 견인하는 강력한 동력이며 홍경표 촬영감독이 포착하고 확보해낸 풍광과 표정에 깃든 심상은 영화의 내면을 수식하는 심미의 수사로서 제 역할을 해낸다.

    초승달의 이미지로 갈무리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두 사람이 비로소 출발선에 나란히 선 운명에 다다랐다는 것을 대변하는 은유처럼 보인다. 물론 그 이후의 삶이 원만하거나 평탄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함께하기를 갈망한 이들이 함께한다는 건 그 자체로 완전한 회복일 것이다.

    “인연을 권장하는 세상에서 혼자가 되길 선택한 사람에게 가해지는 위협에 관한 이야기”라는 나기라 유의 말이나 “타인의 검열을 의식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자아를 위장하는 시대를 비판하거나 변화를 촉구하는 건 아니지만 왠지 기분이 불쾌해진다는 공감대를 전하고 싶다”는 이상일 감독의 말처럼 <유랑의 달>은 비로소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상대를 만난 이의 삶이 독립이라는 단어와 어울린다는 실감과 맞닿는 영화이기도 하다. 타인의 시선에서 스스로 해방된 이들에게만 허락된, 유랑의 시간을 거쳐 비로소 서로를 달처럼 비추는 존재로 거듭난 이들의 이야기. <유랑의 달>은 결국 그런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민용준(영화 저널리스트&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사진
    Courtesy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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