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할머니의 여름휴가

2023.06.03

by 정지혜

    할머니의 여름휴가

    올해 봄 각별했던 외할머니와 영원히 작별했다. 너무 슬프지 않게,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어느덧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요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에게도 여름휴가라는 게 있었을까.’ 처음 떠올려본 질문에 스스로도 당황했다. 어째서 지금껏 단 한번도 ‘할머니’와 ‘휴가’를 연관 지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마치 할머니와 휴가는 만날 일 없는 두 세계인 양, 하등 상관없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서, 둘 사이 그 어떤 조합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는 늘 가족 속에 있었다. 내내 가족부터 챙기느라 분주했고, 가족 걱정이 앞섰던 할머니에게 ‘자신만의 무엇’이라는 게 있었을까.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잘 그려지지 않는다. 할머니의 인생은 으레 무리로서 가족으로 등치됐고 그 무리로 희석돼왔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 할머니에게 묻거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에 이 역시 순전히 내 추측일 뿐이다. 할머니의 자리에 슬며시 ‘엄마’를 가져다 둬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엄마의 휴가’에 대해 나는 얼마나 생각해봤던가. ‘엄마의 휴가’에 대해 엄마에게 묻거나 궁금해한 적이 있던가. ‘엄마만의 무엇’에 대해 내가 아는 바는 거의 없다.

    안녕달 ‘할머니의 여름휴가'(창비, 2016)

    안녕달 작가의 그림책 <할머니의 여름휴가>(창비, 2016)를 읽다가 생각이 흘러 여기까지 이르렀다. 담백하고 유려한 서사와 사랑스러운 그림으로 이뤄진 이 책이 끝나지 않고 조금 더 계속되기를 바라며 나의 할머니를 떠올려본 것이다. 여름날의 한낮, 무더위를 뚫고 어린 손자가 혼자 지내는 할머니를 찾아왔다. 방금 바닷가에서 돌아왔다는 아이는 다음에는 할머니와 같이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한다. 할머니는 힘들어서 못 가신다는 엄마 말에 아이는 바다에서 가져온 소라 껍데기를 할머니에게 내민다. “바닷소리를 들려드릴게요.” 아이 덕분에 할머니는 소라에서 들려오는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두고 간 선물인 소라 껍데기가 마법이라도 불러일으킨 것일까. 할머니와 반려견 메리를 태연하게 여름 바닷가로 데려간다. 준비물은 간단한다. 할머니는 아주 먼 옛날 사둔 수영복을 꺼내고 커다란 양산과 가벼운 돗자리를 챙긴다. 여름의 맛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수박 반쪽도 빼놓지 않는다. 자, 이제 메리와 함께 소라 껍데기 안쪽으로 들어서볼까. 그럼 곧 고요하고 시원한 바다가, 고운 모래와 눈부신 하늘이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첨벙첨벙 바다에 몸을 담그고, 뒹굴뒹굴 볕 아래 굴러도 보고, 챙겨 온 수박을 먹으며 구름과 바람을 느끼면 된다. 이것이 할머니의 여름휴가다. 이어서 할머니는 바다의 추억을 머금은 조개 하나, 일명 ‘바닷바람 스위치’를 휴가 기념으로 가져간다. 집으로 돌아온 할머니가 고장 난 선풍기에 이 바닷바람 스위치를 다니, 또 한번 태연히도 바닷바람이 선풍기를 타고 집 안 가득 불어온다. 할머니의 여름휴가가 소라에서 조개로, 바다에서 집 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듯이.

    창비 공식 홈페이지
    창비 공식 홈페이지

    <할머니의 여름휴가>는 보고만 있어도 저절로 시원해지는 작품이다. 청량한 바람이 이마와 볼을 스치는 듯하고, 혼탁했던 눈과 마음, 정신이 한순간 깨어나는 듯도 하다. 상쾌하다. 누군가에게 휴식 같은 순간을 전하고 싶을 때, 이 책을 건네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나의 할머니. 나는 할머니에게 소라 껍데기를, 그 안쪽 바다의 소리와 바람을 전한 적이 있던가. 어김없이 언제나, 늘, 매번, 나는 할머니에게서 바다의 소리와 바람을 받기만 했던 것 같다. 평생 자신의 ‘여름휴가’를 반납한 그녀 덕분에 뒤늦게나마 비로소 ‘할머니의 여름휴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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