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빙

커피 없이 살 수 있을까?

2023.06.09

by 류가영

    커피 없이 살 수 있을까?

    각성 상태로 일하는 것을 근사한 라이프스타일로 칭송하는 시대,
    카페인 없이 삶의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Illustration of a Woman Drinking Coffee, Surrounded by Coffee Cups, 1930s. Screen Print. (Illustration by GraphicaArtis/Getty Images)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깬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래층으로 터덜터덜 내려갔다. 전날 만들어놓은 새까만 액체가 담긴 병을 냉장고에서 꺼내(그 옆에는 룸메이트의 드립 커피가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누군가는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우유를 탄 뒤 시원하게 들이켰다.

    1시간 후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며 사무실 책상 앞에 겨우 앉아 있었다. 상태는 점점 나빠졌고 주변 동료들도 슬금슬금 나의 불안정한 상태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었고 나는 몸살에 걸린 듯 여러 겹의 담요를 뒤집어쓴 채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갈 때쯤 나는 담요를 벗어 던지고 동료에게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오후 3시가 되자 매니저는 내가 전염성 강한 병에 걸렸거나 최악의 경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생각해 나를 귀가시켰다.

    집에 돌아온 나는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포근한 파자마를 입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룸메이트가 돌아왔다. 시커먼 다크서클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정말 최악이었어. 너무너무 피곤하더라. 아무리 애를 써도 쏟아지는 잠에서 도통 헤어나올 수가 없었어.” 여전히 덜덜 떨리는 손을 보여주며 내가 대답했다. “우리 매니저는 내가 쳇바퀴 도는 다람쥐처럼 행동한다면서 집에 가라던데.” 이윽고 우린 말없이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은 것이다. “우리 오늘 커피 바꿔 마셨나 봐.” 그녀는 경악했다.

    내가 원래부터 디카페인 커피만 마신 건 아니다. 심지어 디카페인 커피를 마신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때도 있었다. 디카페인 커피는 임산부라든지 카페인과 상극인 약을 장기 복용 중인 환자 혹은 노인이나 마시는 것이지, 나처럼 커피 맛을 음미하는 사람을 위한 선택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커피에는 나쁜 남자 같은 매력이 있었다. (나 좀 봐! 난 아침 7시부터 이 커피와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혈기 왕성한 사람이라고!) 현대인에게 커피는 일종의 액세서리인 셈이었다. 살결처럼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명품 핸드백을 메고 다니는 것처럼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카페인이 가득 담긴 텀블러를 들고 출근길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나는 아주 바쁜 사람이며 이 분야에서는 엄청나게 성공한 사람’임을 의미하는 행위이기도 했으니까.

    대학 시절에만 해도 나는 진심으로 커피를 즐겼다. 평생 불면증에 시달려온 나에게 멍한 감각을 깨워 나를 움직이게 만들 무언가가 항상 필요하기도 했다. 낮잠 대신 트리플 샷 아이스 라테를 택하며 불안한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식은땀을 훔치며 힘겹게 시험 답안을 적어 내려가면서 말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내가 잃게 될 것이 얼마나 많을까? 성적을 망치게 되겠지? 중간고사 내내 잠만 자면서? 직장 면접도 말아먹고?’ 그 시절 내내 나는 이런 걱정에 시달렸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커피가 없으면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뉴욕 어디에나 있는 3,000개 이상의 커피숍에서 몇 달러만 내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나라가 허락한 이 간편한 각성제의 도움만 있으면 그런 일을 겪을 필요조차 없는데 말이다.

    그러던 내가 어쩌다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게 됐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초조함의 소용돌이를 지겹도록 경험하면서 서서히 디카페인 커피를 고르는 날이 많아졌다. 그 후 10년 가까이 디카페인 커피만 마시면서 새로운 모닝 루틴이 정착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나는 부엌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듬직한 비알레띠(Bialetti) 모카 포트에 디카페인 원두를 가득 채워 넣는다. 그리고 원두가 가열되며 집 안에 은은히 퍼지기 시작하는 고소한 냄새를 명상하듯 깊이 들이마신다. 에스프레소 포트가 부글부글 끓으며 시작되는 달가닥거리는 소리와 뜨거운 커피를 머그잔에 따르면서 생기는 가늘고 기다랗고 우아한 연기를 즐겁게 감상하면서. 마지막으로 우유를 따르고 갓 태어난 망아지 눈동자 색, 옻칠한 오크 나무 서랍장, 도토리를 닮은 밤색이 될 때까지 부드럽게 젓는다. 고요한 의식 끝에 맛보는 보드라운 첫 모금은? 가히 디오니소스적이다. 사람들은 보통 커피 맛을 묘사할 때 ‘플로럴한 산미가 느껴진다’ ‘고소하고 묵직하다’는 표현을 쓴다. 내게 디카페인 커피는 초콜릿 같은 크리미한 질감 속에서 맥아 혹은 버터를 찾아 헤매는 듯한 맛이 난다.

    누군가는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마시는 커피를 앞에 두고 이 기사를 빠르게 훑어 읽으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사람은 커피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놓치고 있군.’ 커피의 맛은 둘째 치고, 중요한 건 카페인으로 인한 각성 효과라고, 우리의 집중력을 끌어올려 할 일을 제때 끝내도록 부추기는 그 활기 넘치는 여운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요즘 세상에서 미디어가 카페인을 장려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스타트업 회사나 공유 오피스가 공유 부엌과 탕비실에 알록달록한 에스프레소 캡슐과 콜드브루 캔을 잔뜩 쌓아놓고, 라테를 탭에서 마음껏 내려 마시는 시설을 갖춘 것을 자랑하는 그런 분위기 말이다. 인터넷에서 ‘디카페인을 마시느니 죽는 게 낫다(Death Before Decaf)’든지 ‘디카페인? 절대 사절(Decaf? Decline)’ 같은 문구를 써 넣은 머그잔과 맨투맨이 판을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아주 좋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더 많이 고생하기 위해 우리 몸을 혹사하려고 카페인 음료를 마신다. 카페인은 생산성을 높여주는 장치이자 자본주의 로봇(우리 자신)에게 주기적으로 투입해주어야 하는 검은 알약이다. 그런 면에서 카페인에서 손을 뗀다는 건 사회 시스템에 저항하는 행위다.

    카페인에 의지하기를 멈춘 후 비록 아주 늦게 잠들거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지만, 그리고 ‘전투용’ 라테를 생략함으로써 생산성은 좀 떨어졌지만 더 느린 하루를 보내게 된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약속을 취소하거나 마감일보다 약간 늦는 것이 데드라인에 맞추기 위해 필요한 신체적, 감정적 피로감보다 훨씬 건강한 긴장감으로 다가온다. 커피는 여전히 나의 소중한 모닝 루틴이다. 이제 더 이상은 커피를 즐기면서 나중에 이것들이 공황 발작으로 가는 급행열차처럼 나를 향해 질주해올까 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스크램블드에그를 만들고, 부지런하고 근사한 남자들을 곁눈질하기 위해 공원을 산책하고, 찰스 3세가 뱀파이어인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을 이어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시껄렁한 시간을 보내기 전에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일반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일상에 훨씬 상쾌한 리듬을 선사한다.

    카페인 애호가라면 이 글을 읽고 발끈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나의 사랑은 지극히 순수하다. 나는 이제 커피가 선사하는 몇 시간의 각성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풍미와 커피를 만드는 평화로운 의식 전반을 즐기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다채로운 디카페인 리스트를 갖춘 카페를 찾아 헤매는 험난한 여정을 반긴다. 비록 ‘나는 죽을 때까지 디카페인만 마실 거야(I’ll Drink Decaf ’Til I Die)’라고 쓰인 키치한 머그잔은 아직 못 찾았지만. VL

      Luna Adler
      사진
      Getty Images
      에디터
      류가영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