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서 나조차 몰랐던 내 취향을 찾다
‘내가 이 출장을 가도 될까?’ 와인을 테마로 한 시애틀 출장 일정이 확정된 뒤 줄곧 머릿속을 맴돌던 의문이다. 직접 와인을 사 마신 경험이 손에 꼽을 정도인 나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적임자가 아니었다. 결국 시애틀 도착 첫날, 웰컴 디너 자리에서 선언하듯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건호이고, 서울에서 왔어요. 미리 사과하자면, 저 와인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술이라고는 대학 시절 필름이 끊겨가며 배운 소주와 가성비 좋은 맥주밖에 모르던 나에게 와인이란 ‘어려운 술’의 대명사였다. 셔츠에 넥타이 차림으로 마셔야 할 것 같은 술, ‘보디감’이나 ‘피니시’ 같은 용어를 이해해야만 즐길 수 있는 술. 출장 둘째 날, 바코비노(Bacovino) 와이너리의 테이스팅 룸에서 조용히 레드 와인을 홀짝이던 중 대표 랜디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테이스팅 노트는 결국 누군가의 감상에 불과해요. 와인의 향과 맛에 정답은 없습니다.” 와인에 진입 장벽 따위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후, 와인을 마실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 그때의 감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테이스팅 노트보다는 메모에 가깝지만 아무렴 어떤가. 술은 젠체하기 위해 마시는 게 아니라 더 솔직해지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시애틀에서 끊임없이 와인을 접한 덕분에 나와 와인의 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었다. 시애틀이 속한 워싱턴주는 캘리포니아에 이은 미국 제2의 와인 생산지로, 이곳에만 1,000개가 넘는 와이너리가 있다. 출장 내내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가도 종업원은 자연스럽게 와인을 권했고, 호텔 근처에서는 여성, 유색인종 혹은 LGBTQ가 만든 와인만 취급하는 테이스팅 룸도 있었다. 웰컴 디너를 함께한 투 마운틴 와이너리(Two Mountain Winery)의 대표 형제, 매튜와 패트릭은 시애틀이 다양한 품종의 포도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도시라고 이야기했다. “워싱턴주에선 사계절뿐 아니라 극한의 기후에도 직면하죠. 차로 2시간 30분만 운전하면 사막은 물론 만년설로 덮인 산과 빙하가 있는 지역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기후 덕분에 독창적인 블렌딩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출장의 방점은 ‘테이스트 워싱턴 2026’에 찍혔다. 3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워싱턴주의 와인과 미식 문화를 조명하는 이벤트로, 올해는 200개 이상의 와이너리와 75개 이상의 레스토랑이 참여했다. 행사장에 발을 들이자 주최 측 직원이 와인 잔과 함께 짧은 인사를 건넸다. “Go Crazy!” 와인에 정답은 없으니, 마음 가는 대로 테이스트 워싱턴을 즐겨도 좋다는 신호였다. 나는 직원의 말처럼 ‘크레이지’하게 현장을 돌아다니며 온갖 와인을 맛봤다. 이타(Itä)의 샤르도네는 목 넘김이 부드러워 호불호가 없을 것 같았고, 테라 블랑카(Terra Blanca)의 ‘2022 오닉스’는 수십 년 된 빈티지 와인 못지않은 묵직함을 자랑했다. 시애틀 근처 우딘빌에서 1934년부터 와인을 생산해온 샤토 생 미셸(Chateau Ste. Michelle)의 리슬링 와인은 그날 마신 와인 중 가장 상쾌했다.
와인 잔을 몇 번이나 세척했을까. 취기가 오르기 전, 잔을 돌리며 향을 음미하는 사람들과 와인을 들이켜는 사람들로 가득한 행사장을 빠져나오며 또 한 번 생각했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즐기면 되는 게 와인이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와인이 존재하는 시애틀은 나만의 ‘테이스트’를 발견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도시였다. VK
- 포토그래퍼
- Aubrie LeGault
추천기사
-
뷰티 트렌드
안명 거상 기술이 특이점에 도달했다?
2026.04.06by 이숙명, 이주현
-
데코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에게 물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아이코닉한 가구'는? 1편
2026.03.27by 김현유, Elise Taylor,Nicole Kliest
-
라이프
쿨병 걸린 밀레니얼은 모르는 Z세대의 직진 사랑법 '샬랑'
2026.03.04by 김현유, Julie Le Minor
-
푸드
시애틀에서 나조차 몰랐던 내 취향을 찾다
2026.04.28by 안건호
-
라이프
한 땀 한 땀 벚꽃을 수놓은 자동차
2025.04.07by 오기쁨
-
여행
그윽한 녹차의 멋과 맛, 하동 여행
2026.02.27by 엄지희
인기기사
지금 인기 있는 뷰티 기사
PEOPLE NOW
지금, 보그가 주목하는 인물
